기자명 강신강 기자 (skproject@naver.com)

 

다시 봄이 왔다. 마치 친한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난 것처럼, 어색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봄은 스며들었다. 기사를 마감하고 커피 한 잔 마시려고 금잔디를 가로질러 갔다. 금색의 잔디는 당분간 초록을 품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길에서 우연히 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친구는 내게 자연스레 뭐 하고 사느냐고 물었다. “철학 공부하며 살고 있어”라고 대답했다. “그래? 그럼 복수전공은 뭘 하고 있는데?” 망설임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서 이 질문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까. 누군가에겐 몇 날 며칠을 고민하게 만든 문제였을 것이다. 가끔은 주변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 내 걱정을 해준다. 취업하기 힘들다는데···. 그거 배워서 어디 써먹을 때가 있겠어? 인문학의 위기라고 불리는 시대 속에 사는 내가 감내해야 할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다음부터 걱정은 정중히 사양하려 한다.
다시 보았다. 문·사·철 교수님들을 만나 인문학과 관련된 담소를 나누다 보니 인문학은 어느새 학문이 아니라 일상으로 다가왔다. 인문학의 위기는 학문 자체의 위기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취업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을 걱정하고 시대를 생각했다. 그들에게 인문학의 위기는 인간의 위기였다.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나를 맞추다 보니, 어느덧 삶을 되돌아봤을 때 그곳엔 이미 ‘나’는 없었다. 늦은 밤 때때로 우리를 찾아오는 공허함은 내가 없음에서 오는 허무함이었으리라. 어느 순간 대중 인문학의 쏠린 사람들의 관심 역시 이러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내가 잃어버린 나를 찾기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대중들의 허탈함은 거리의 인문학을 향한 비난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잘못은 강단에도 거리에도 없었다. ‘나’를 찾아야만 ‘나’를 잃은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문학에는 이에 대한 답이 담겨있다. 돌아온 봄,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