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생로병사’의 단 네 마디로 함축되는 우리 삶의 여정에 병들고 아픔이 있는 것처럼, 때때로 이 아픔이 치유되는 기쁨과 환희 그리고 감동의 순간들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치유’를 대신해 요사이 한껏 유행하면서 모든 매체를 도배하고 있는 어휘가 바로 ‘힐링’이라는 단어다. 굳이 치유라는 표현을 두고도 힐링이라 말하면 그 치료의 효과가 더 커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미미하고도 오묘한 치유와 힐링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나의 미숙한 언어감각을 타박해야 하는 일인지도. 하긴 “미장원에 가서 미용사에게 머리 자르고 손질 받았다”하는 말보다는 “헤어 살롱에 가서 헤어 디자이너에게 컷하고 트리트먼트 받고 왔다”는 말의 포장지를 벗기면서 우리는 몇 배나 부풀려진 비싼 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다. 비단 머리 손질하는 일 뿐만이 아니다. 찻집에서 차나 커피 한잔하는 것보다 카페에서 요상한 이름의 검은 물을 마시는 것이 웬만한 밥 한 끼 값보다 비싸고, 3000원 하는 볶음밥이 리조또나 필라프가 되는 순간 8000원의 부가가치가 생긴다.
어떤 책이나 상품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는 이면에는, 그 내용보다는 처음 내건 이름이나 제목이 한몫을 하는 경우들을 어렵지 않게 본다. 이처럼 우리는 실물이 아니라 그 이름에 가치를 더한다. 그리고 그 이름은 우리말 글자가 아닌 ABC와 같은 영문자로 포장될수록 그 가치가 더욱더 빛을 발한다. 그래서 농협이 NH가 되었고, 럭키치약과 금성TV가 만나서 LG로, 제일제당에서 연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CJ (여기는 제일제당의 동일한 ‘제’의 ‘ㅈ’이 영문표기에서 초두음과 아닌 것을 구분하여 한 번은 C로 한 번은 J로 되어야 하는 심오한 음성학 이론도 한몫하고 있다)에 이어 최근에는 새마을 금고가 아무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MG의 작명을 하사받았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요리를 천직으로 하는 젊은 셰프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의 요리에 대한 열정과 실력 등은 탓할 바가 없었지만, 그가 던진 한마디가 내 머릿속을 복잡한 산책길로 만들어버렸다. 요리사와 셰프는 다른 것인데, 요리사는 단순히 요리만 하지만, 셰프는 요리뿐만 아니라 요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자리라 했다. 그 ‘셰프’가 우리말로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답은 하나 ‘주방장’이었다. 그래도 우리의 언어적 소신은 주방장은 중국집으로 보내고 셰프는 이탤리언 혹은 프렌치 레스토랑 같은 이름과 짝을 지어준다. 그리고 거기에 엄청난 부가가치를 얹어서 피 같은 돈을 물처럼 쓸 수 있는 각오와 명분을 만들어 준다.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다. 우리 학생들 가운데 몇 명이나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하기 위해 마주하는 GLS가 ‘금잔디 광장(Golden Lawn Square)‘의 약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명품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웬만한 명칭들과 소통의 도구들은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을 명품으로 자리매김하는 척도가 되어버린 글로벌의 깃발 아래 다시 모여 야릇한 천에 심오한 수를 놓은 것 같은 영문 모를 영문(英文)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 성균관대학교가 표방하는 ‘브랜드 네임’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초일류 대학으로의 발돋움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심(truly) 우려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타요 버스의 분장을 한 셔틀버스의 이마에 그려 넣은 617은 우리 학교 617년 역사를 말하는데, 성균관 600년 전통의 숭고한 교육 정신과 가치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으로 ‘수요를 찾아서’가 아닌 ‘니즈를 아이덴티파이’ 하고, 우리 모두 ‘글로벌 리더’를 표방하는 ‘퍼스트 무버’로서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과 소통을 위한 노력이 사이언스(S)와 휴머니티(H)의 퍼블릭(P) 언더스탠딩(U)이 되어야 더 드높여질 수 있다고 밀어붙이는(PUSH) 계산법의 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 또 난감해지는 순간이다.
‘식민화하는 대학, 대항하는 인문학’에서 정면으로 마주했던 우리의 벌거벗은 영어 사대주의의 쪽팔림을 어디서부터 추슬러야 하는지, 그 국제화의 명분 아래 대의를 좇느라 찢기고 헤벌어진 우리 젊은 청춘들의 당연한 그 가학적인 아픔은 어디서부터 그리고 누구에게서 치유될 수 있는지 타요 셔틀버스의 이마에 쓰여 진 617의 숫자에 하릴없이 묻고 있다.

최명원 독어독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