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영화 『설국열차』에 나오는 ‘엔진’의 진실에 대한 장면을 기억하시는지? 열차의 ‘엔진’은 작품 내에서 마치 ‘영구운동기관’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며, 결함 없고 고장도 나지 않는 완벽한 기계장치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환상이었을 뿐, 영화의 막바지에 ‘엔진’ 속에서 어린아이들이 고장 난 부품의 역할을 대신 수행한다는 것이 폭로된다. ‘완벽한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가장 아래의 존재들’이었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었다.
『설국열차』의 해석 중 하나는 ‘열차’와 ‘엔진’이 금융자본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비추어 볼 때, 앞서 언급한 ‘엔진의 진실’은 금융자본주의가 피지배층의 희생 위에 바로 서 완벽을 가장하고 있는 체제라는 메시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착취의 역사로서의 천민 금융자본주의의 시대의 모습은 『설국열차』의 기득권층이 누리는 향락과 ‘꼬리칸’ 주민의 생활 모습의 대비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메시지는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은강시’ 공장 단지의 노동자들은 기업에 돌아가는 부를 생산하는 노동의 주역이었지만, ‘부품’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이 받아야 할 대가는 경영인들의 부로 축적될 뿐이었다. 그들은 끝없이 일한다. 그러나 끝없이 빈곤하다. 나눠 먹을 파이를 키우는 역할을 하였으나, 파이가 크든 작든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이다.
앞서 제기한 문제 상황은 허구 속에만 있는 사태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노동 빈곤’의 사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은강시’의 노동자들과 ‘엔진의 부품’이 된 아이들은 이 사회에 함께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겪는 노동이 빈곤을 타개하지 못하는 상황의 문제는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단순히 ‘빈곤’이 구조적 문제임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빈곤’의 지속성, 혹은 빈곤의 대물림이 왜 발생하는가를 말해주는 한 가지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천민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노동 빈곤’의 문제는 기업의 노동자 착취 구조, 그리고 명목상 존재하나 무력한 노동법(근로기준법)의 실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고도성장 사회에서 ‘노동 빈곤’을 가중하는 착취의 구조는 은폐되고 약자의 삶에 깊게 침투한다. ‘경제적 성장’이라는 거대 담론 앞에서 그들의 희생은 쉽게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고도성장을 이룩한 시대에 놀랍게도 자살률은 오히려 아주 높은 수치를 보인다. 사회의 경제적 풍족함이 개개인의 행복한 삶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에 나타난 모든 자살의 원인을 ‘노동 빈곤’의 악순환으로 인한 ‘생계 곤란’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빈곤’과 우리에게 닥치는 삶의 위기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듯 천민 금융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자살’이라는 비극과 ‘노동 빈곤’의 상관관계를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고도성장 시대의 이러한 단면은 이 시대의 그늘이 꽤 짙고 깊음을 말하는 듯하다.

▲ 최장락(철학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