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정혜윤·윤아림 기자
  • 승인 2015.03.29 15:13
  • 호수 15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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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스케치-빌 비올라 개인전

 

그는 정지했다. 어제만 해도 눈앞에서 살아 숨 쉬던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조그마한 심장이 더는 일하기를 거부했고 그와 함께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일, 사랑했던 것, 맺어왔던 관계는 의미를 잃었다. 그렇게 끝났다. 그때, 어디선가 외침이 들려온다.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끝나지 않았다. 죽음으로 가는 길은 숭고하며, 그 끝은 초월이다.”
 
예술과 과학이 만나 탄생한 현대예술, 비디오 아트
빛과 소리를 담아내고 시간의 진행을 보여주는 비디오. 일반인들에게는 단순히 신기한 과학의 산물이었지만 예술가들에게는 달랐다. 상황을 종합적으로 쉽게 기록하고 광범위하게 전달하는 비디오의 특성은 실험적인 영화제작가나 사진가, 행위 예술가 등 많은 예술가 집단을 매료시켰다. 이 독특한 현대 예술 ‘비디오 아트’는 아직 태어난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아이’다. 고정된 형식이나 주제가 없는 이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학교 미술학과 이상봉 교수는 “비디오 아트가 미술 내부의 양식적, 매체적 경계를 수용하는 것을 넘어 미술 외부의 개념적, 기술적 변화를 받아들이며 진화하고 있다”고 평했다.
 
비디오 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이 동양의 관점에서 서양의 방식을 받아들였다면, 제자인 빌 비올라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불교사상에 기초해 시간과 윤회에 대해 말한다. 빌 비올라는 고속 촬영을 통한 슬로우 모션 기법을 이용해 시간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느리게 설정한다. 그의 작품 속 ‘느림’은 감상자에게 시간의 미학을 느끼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이후 그는 우리의 삶 너머의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불교, 신비주의, 동양사상 등을 통해 인간의 내면적 가치와 삶과 죽음의 진리를 탐구해온 그는 현대 미술에 대한 정의를 재정립하고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일본에서 했던 선(Zen) 공부가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는 빌 비올라는 정신적, 심리적 의식의 흐름을 깊게 탐구하며 숭고와 초월에 몰입된 사유세계를 그만의 깊은 영상미로 펼쳐낸다.
 
현대 미술의 영상시인, ‘빌 비올라’ 개인전
▲ 사진 1 물의 순교자, Water Martyr /ⓒ국제 갤러리 제공
그의 신작 7점이 전시된 국제 갤러리의 입구는 저승으로 통하는 문을 연상시킨다. 한 줄기 빛도 들지 않는 깊은 어둠. 길을 더듬어 가다 보면 한 남자가 누워 있다. 바지만 걸친 채 밧줄에 묶여 거꾸로 매달린 그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고 있다. 그의 벗은 몸 위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줄기는 영원히 간을 뜯기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리게 한다. 남자는 지지 않는다. 고개를 젖히고 팔을 뻗은 남자의 모습에선 모든 고통과 시련을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은 강인함이 느껴진다. 어느새 남자는 사라지고 주변에는 그의 몸에서 떨어졌던 물방울만이 환영을 이루고 있다. ‘물의 순교자’(사진 1). 그의 죽음은 이미 그를 초월했다.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의 몸짓에서는 숭고함이 느껴진다.
▲ 사진 2 조우, The Encounter /ⓒ국제 갤러리 제공

 걸음을 옮기면 영상에는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두 여인이 걷고 있다. 여인 뒤로는 물결에 반사돼 대칭을 이루는 산과 나무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휘날리는 치마와 머릿결, 그리고 걸음새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그들은 여전히 제자리다. 어느 순간 두 여인은 ‘조우, The Encounter’(사진 2) 한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여인이지만 마주 본 그 눈빛은 깊은 유대감을 담고 있다. 그 짧은 ‘조우’에 젊은 여인은 삶의 지혜가 담긴 신비를 전해 받는다. 늙은 여인은 일렁이는 풍경을 향해 다시 느리게 걷는다. 그들은 무엇을 향해 걷는 것일까. 뚜렷했던 그들의 형체는 사라진 채 자연 속 하나의 점이 되고, 고요한 풍경만이 우리를 마주한다.  

▲ 사진 3 밤의 기도, Night Vigil /ⓒ국제 갤러리 제공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두 개의 영상이 나란히 놓여 있다. 왼쪽에선 여인이 느릿한 손길로 불을 밝히고, 오른쪽에는 흰 점으로 보이는 남자가 타오르는 불길을 향해 천천히 걸어온다. 은은한 촛불과 여인의 실루엣은 보는 이를 부드럽게 감싸며 안심시킨다. 모든 촛대에 불을 밝힐 때쯤, 여자는 물속으로 걸음을 옮기고 남자는 타오르는 장작불 위를 덮친다. 그리고 찾아오는 정적. 둘은 죽었다. 하지만 슬프지 않다. 완전하지 못한 그 둘이 비로소 완성돼 함께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품 ‘밤의 기도, Night Vigil’(사진 3)은 물과 불, 완성과 파괴, 남성과 여성, 그 상반된 것들이 하나 되는 순간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사진 4 도치된 탄생, Inverted Birth /ⓒ국제 갤러리 제공
발걸음을 옮겨 K3 관으로 이동하면 길이 5m가 넘는 스크린 속 오물을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듯 주먹을 쥐고 있다. 그의 몸 위로 물방울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솟아오른다. 검은색, 붉은색, 흰색. 물줄기는 점점 거세게 그의 몸을 씻겨내며 날아간다. 깨끗해진 남자의 몸은 잔상을 남긴다. 마침내 모든 것을 이겨낸 남자는 얽매임에서 자유롭다. 안개로 화하는 그. 그는 용서받았다. 작품 ‘도치된 탄생’(사진 4) 속 남자는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같다. 빌 비올라는 이 작품을 통해 탄생부터 죽음까지 이르는 ‘정화’의 과정을 보여주며 ‘윤회’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비디오 아트의 의의
오늘날 예술가들은 회화라는 평면 작업에 그치지 않고 실험을 통해 다양한 작품을 선사한다. 인터넷 매체와 무수한 콘텐츠가 범람하는 21세기. 이러한 변화로 우리가 예술작품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졌다. 현대 미술도 기존 장르인 △공예 △디자인 △회화와 조각들의 개념적 경계가 모호해지며 새로운 장르인 △뉴미디어 아트 △설치미술 △장소 특정적 미술 △토탈아트 등이 등장했다. 우리 학교 미술학과 정은영 강사는 “비디오 아트의 출현은 예술이 생산되고 인지되는 방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중에서 비디오는 순간을 기록하고 저장하는 동시에 미학적으로 작동시키는 의미 있는 혁신이다”라고 비디오 아트의 의의를 전했다. 건국대학교 현대미술과 구자영 교수는 “주제와 형식이 자유로운 현대미술에서 비디오 아트는 전자매체를 통해 회화나 조각이 직접적으로 다룰 수 없는 빛과 소리 그리고 시간의 영역을 개척했다”고 말했다. 예술가들은 비디오 영사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실험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좀 더 독특한 효과를 내는 작품들이 생겨났다. 2000년대 이후 고화질 디지털 녹화기술과 고해상도 모니터 및 프로젝터는 비디오 아트의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더욱 확장시켰다. 이상봉 교수는 “이제 비디오 아트는 △다원주의 △탈 경계 △탈 장르 등으로 불리는 문화 담론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형화된 형식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는 현대미술. 선뜻 다가가 친해지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자유분방함의 매력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오는 봄날, 삼청동 국제 갤러리에서 빛과 소리, 그리고 시간의 미학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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