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범준 기자 (magic6609@skkuw.com)

 

▲ ⓒ한겨레

“보병 9사단의 장교입니다. 이번 군 부재자투표에 문제가 많아 제보하기 위해 전화했습니다” 이지문 중위는 광화문 공중전화부스에 서 있었다. 수화기를 꽉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렸다. 전화를 받은 ‘한겨레’의 한 기자는 가능하면 회사로 직접 와달라고 했다. 30분쯤 뒤 초조한 표정의 이 중위는 편집국의 문을 열었다. 증언은 새벽 한 시까지 이어졌다. 이틀 뒤, 이 중위는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이하 공선협)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떨리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그는 발표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군 부재자투표과정에서 간부들이 여당후보지지와 공개투표를 강요했다.”
 
이지문 씨는 13년 전 밤에 있었던 그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1992년 당시 있었던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의 투표부정 문제를 고발했다. 24세 청년 장교의 용감한 고발로 수십 년간 암암리에 행해졌던 군의 정치개입문제가 밝혀졌다.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 60만 국군은 비밀투표를 보장받게 됐다. 하지만 당시 이 중위는 고발 이후 ‘근무지역 무단이탈’로 구속돼 이등병으로 파면당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995년 중위신분을 회복하고 명예전역했다.
1996년 당시 최연소 서울시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이지문 씨는 시의원 활동 이후, 시민운동을 하며 내부고발자 보호에 앞장섰다. 2015년 현재, 그는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소장을 맡으며 내부고발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면서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이지문 소장. / 안상훈 기자 tkd0181@skkuw.com
 
최근 박흥식 교수, 이재일 씨와 함께 「내부고발자 그 의로운 도전」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취지와 간단한 내용소개를 해달라.
현재 ‘권익위법’이나 ‘공익신고자보호법’ 같은 내부고발자 보호 관련 법들이 있지만 많은 사람이 이런 법들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래서 책을 통해 내부고발자들이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내부고발과 관련한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내부고발을 실제로 했던 분들이나 내부고발자 보호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생생한 조언을 담아냈다.
 
92년 당시, 중위신분으로 고발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선거의 중요성’, ‘선거의 공정성’ 등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군대의 잘못된 투표행위로 당락이 뒤바뀌어서 엉뚱한 사람이 대표자가 되면 안된다’는 문제의식도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사병들의 경우 군대를 통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런데 그들이 군대에서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배워서 나가면 ‘군대에 온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는 87년 이후, 민주화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높았을 때다. 때문에 ‘군대도 이전하고는 좀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여러 가지 부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고발을 결심하게 된 것 같다.
 
고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초기에 군에서는 내가 제보한 내용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발 이후에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에서 부정선거 상담 고발창구를 만들었고 많은 군인이 자신의 부대에서 있었던 선거부정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국방부에서는 처음에 ‘일부 지휘관들의 개인적인 일탈이었다’는 식으로 답변했었다. 하지만 부정선거 시비가 군 입장에서도 점점 불편해지니까 결국 군에서 영외투표(부대 밖 투표)를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에서 내부고발자분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내부고발자가 있다면.
작년 5월에 어떤 분이 건설현장에서 발생한 부패행위를 감독기관에 실명으로 신고했다. 근데 감독기관의 감사 담당 공무원이 그분의 회사에 직접 전화해서 신고자의 신분을 다 밝혔던 일이 있었다. 그 다음부터 그분은 직장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 경우에는 그 공무원이 정말 잘못한 거다. 신고자의 비밀을 지켜줘야 하는데 오히려 본인이 공개적으로 유출해버렸으니. 그런 경우는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안타까운 경우였다. 제보자는 이 문제를 경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공무원은 ‘부패행위로 접수한 게 아니라 일반 민원으로 접수한 것이어서, 민원관계 확인 목적으로 전화한 것이라는 식으로 발뺌하고 있다. 그래도 결국 어떤 형태로든 그 공무원은 징계되지 않을까 싶다.
 
내부고발을 하다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은가?
내부고발하기 전에 상담하러 왔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일단 현행법상으로 내부고발자 보호가 상당히 미비한 부분이 많다. 아무리 비밀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조직에서는 누가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제보자들이 그런 것들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리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기존의 ‘공익신고자 보호법’과 ‘권익위법’이 어떤 제도적인 문제가 있으며 이를 어떻게 보완해야 할까?
우리나라의 경우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법 자체는 체계적으로 잘 정비된 편이다. 두 법 모두 제보자가 파면이나 해고를 당하지 않도록 하는 신분보장을 핵심으로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신분보장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왜냐면 조직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며 제보자에게 끊임없이 불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제보자 입장에서도, 당장 일을 그만두었을 때 먹고살 게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키지만,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 조금이라도 일을 못 하면 회사에서 꼬투리를 잡아서 해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신분보장에만 초점을 둘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실질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정부제출안을 포함해서 두 법의 개정안 17개가 올라가 있다. 개정안에는 언급한 내용이 포함 안 됐나?
개정안의 내용은 현재 제도상의 신분보장을 조금 더 강화하는 그런 차원의 것들이다. 물론 자잘한 것들이 조금씩 개정돼서 분명히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접근법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 내부고발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문제가 경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문 인터뷰를 하거나 국회의원 보좌관들을 만났을 때도 항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단순히 내부고발자들이 조직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내부고발자들에게 조언해준다면?
컵을 깨뜨렸을 때 깨진 컵 조각들을 다시 붙여도 원상회복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내부고발을 하면 아무리 법에 따라서 보호를 받는다 하더라도 내부고발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가장 좋은 것은 내부고발을 하기 전에 조직 내부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해결될 방법을 최대한 모색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