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한가득 피규어를 쌓아놓고, 하루 종일 만화방에 틀어박혀있는 사람들만이 키덜트는 아니다. 기억하라. 우리 모두는 무인도에 홀로 남아도 만화, 장난감, 게임 세 가지만 있으면 좋다고 생각했던 어린아이였다는 것을. 어렸을 때의 추억을 곱씹을 줄 안다면 누구나 키덜트다. 옛날 그 만화를 보고 반가운, 문방구 앞에서 고민하던 그때가 그리운 당신은 이미 키덜트로서의 자질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렸을 때 뭘 하고 놀았던 걸까.
어린이 문화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만화다. TV, 책, 장난감, 심지어 필통과 책가방까지 만화와 무관한 것이 없다. 우리가 어린이었던 1990년대로 가보자.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는 <달려라 하니>, <머털도사>, <날아라 슈퍼보드> 등 국내 제작 애니메이션이 흥했다. <아기공룡 둘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TV 창작 만화영화로 1987년 처음 방영됐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만화를 보러 책방이나 극장에 가지 않고 안방 TV 앞에 앉기 시작한다. 인형, 게임, 문구용품, 액세서리, 과자 등 만화 캐릭터의 상품화를 이끈 것도 둘리다. 90년대엔 본격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에 쏟아져 들어온다. <피구왕 통키>, <축구왕 슛돌이>는 전국의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보냈고, 이때 시작된 스포츠 영재 열풍은 <슬램덩크>로 정점을 찍는다. 이외에도 <기동전사 건담>,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로봇 히어로물이 남아들을 휩쓴다. 한편 더빙판 비디오로 처음 출시된 <세일러문>은 미소녀물의 문을 열고 여아들의 사랑을 받았다. 5년간 200화가 방영되고 원작자가 직접 방영 금지를 요청할 정도로 인기는 대단했다. 이후 <뾰로롱 꼬마마녀>, <애천사전설 웨딩피치>, <카드캡터 체리>가 마법소녀물의 길을 이어간다. TV 만화가 이렇게 흥할 때, 극장 만화는 디즈니가 섭렵했다. <인어공주>를 필두로 <라이온킹>, <알라딘> 등 디즈니 대작 만화가 등장했다.
2000년대엔 케이블 만화 전문 채널이 활성화되면서 TV 만화가 더욱 발전하고, 한국 만화가 다시 부활한다. <검정고무신>은 엄마, 아빠를 애청자로 만들었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하얀 마음 백구>는 게임과 광고까지 만들어진다. 한편, 일본 수입 만화의 인기도 그치지 않는다. <이누야샤>, <신풍 괴도 잔느>, <원피스>와 같은 만화는 요괴, 도둑, 해적을 한순간에 어린이의 친구로 만들었다. <포켓몬스터>는 닌텐도에서 만든 게임에서 출발해 오늘날까지도 시즌을 이어가고 있다. <디지몬 어드벤처>, <유희왕> 이후로 이제 만화에서 주인공은 직접 싸우지 않고, 자신과 동고동락하는 ‘사육물’에 몸을 맡긴다. ‘디지몬과 포켓몬을 모르면 왕따’라는 말이 생겨났고, 모든 아이들의 책가방엔 포켓볼, 디지바이스, 유희왕 카드가 자리 잡는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어떤 만화영화가 유행할까. <뽀롱뽀롱 뽀로로>는 각종 상품, 교재, 게임 캐릭터로 활용되면서 아이들의 대통령으로 등극했다. 프랑스에서 시청률 47%를 기록할 정도로 국외 인기도 높다. 이를 뒤이어 <라바>, <로보카 폴리> 같은 국내 제작 유아용 만화가 인기를 얻고 있다. EBS 애니메이션부 곽내영 PD는 “요즘은 초등학생만 돼도 예능을 많이 본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주 타깃이 유아로 몰리게 되면서 ‘뽀로로’나 ‘타요’가 인기를 얻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 “국내 제작물의 기획력이 높아지고 연령층이나 내용면에서도 다양해졌다”고 평했다. 재능 TV 편성국 김아람 사원도 “요즘 일본 만화는 성인물이 많아 수급이 줄고 있다”면서도, “<짱구는 못 말려>, <도라에몽> 같은 일본 만화는 여전히 인기가 많다”고 했다.
한편 만화영화와 장난감의 연계가 밀접해진 것도 오늘날의 주목할 만한 추세다. 완구회사 영실업 관계자는 “예전엔 만화가 먼저 인기를 얻으면 이를 응용한 장난감이 상품화됐다. 그러나 오늘날엔 <닌자고>나 <또봇>처럼 완구회사가 아예 만화 기획에 참여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만화영화도 장난감도 시간에 따라 변한다. 키드 컬처가 변하니 키덜트 컬처도 바뀌기 마련이다. 곽 PD는 “당장의 키덜트 문화에 집중하기보단 아이들에게 더 도움 되고, 수준 높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서 미래의 키덜트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지금 대학생인 우리가 더 나이가 들어 키티 폰 케이스나 타요 버스를 더 이상 귀엽다 생각하지 않을 때, 그때의 키덜트는 어떤 모습일까. 대한민국만세는 어떤 어른이 돼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