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내 트라우마 3가지 사례

기자명 허옥엽 기자 (oyheo14@skkuw.com)

 

거미줄처럼 얽힌 트라우마는 가정을 병들게 한다. 균형이 무너지는 가정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입히고 아파한다. 우리는 왜 가장 사랑하는 가족에게 상처받고 힘들어할까? 우리는 ‘가족’이라는 존재를 무조건 받아들였거나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나쳤던 것은 아닐까? 가정 내에서 받은 상처는 애써 잊거나 무시하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상처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객관적으로 인식해야만 치유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이에 가정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3가지 사례로 재구성하고 최 교수로부터 이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을 들어봤다
 
왜 우리 엄마는 유독 나만 미워하는 걸까
“우리 엄마는 유독 막내딸인 ‘나’를 미워했다. 나는 언제나 엄마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고 그래서 항상 억울했다. 언니와 오빠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는 나를 대하는 태도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나는 늘 이유 없이 엄마에게 상처를 받았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훗날 다른 사람에게 투사되곤 하는데, 이런 현상을 ‘전이감정’이라고 한다. 프로이트가 명명한 전이감정은 과거의 경험이 현재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상대를 착각하고 오해하게 만드는 현상이다. 전이감정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부모가 형제를 다르게 대하는 경우에도 대체로 전이감정이 작용한다. 부모의 자녀 사랑이 형제들 간에 똑같다는 의미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느냐’는 말을 하지만, 자녀를 키워 본 사람이면 대부분 조금 더 정이 가는 자식, 다른 형제보다 한결 의젓하고 믿음이 가는 자식이 분명히 따로 있다고 말한다. 부모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어느 자녀에게 잘 해주고 반대로 어느 자녀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기도 한다.
위의 사례 또한 전이감정의 발생으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사례 속 엄마는 시집살이를 할 때 시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엄청난 갈등과 상처를 경험했다. 막내딸은 유난히 외모가 시아버지와 비슷했고 무의식적으로 엄마는 막내딸에게 시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전이시켰다. 막내딸을 볼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시아버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결국, 시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막내딸에게 표현하게 되었고, 막내딸은 자기의 잘못도 아닌 것으로 인해서 상처받고 아파한 것이다. 이렇게 전이감정을 통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왜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 객관화시켜야 한다. 감정의 전이는 무의식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여도 외로운 나, 무엇이 문제일까
“나의 어린 시절은 늘 외로웠다. 부모님은 맞벌이 생활을 했고, 형제들과도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나는 이런 환경 속에서 가족에 대한 소속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에 외로웠던 것철머 나이가 든 지금도 나는 언제나 외롭다.”
가족은 우리에게 울타리를 제공하지만 모든 가족 구성원이 그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족에 소속되기 위해 노력하고 심지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속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이처럼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이는 사실 ‘다시 홀로 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늘 쉽게 외로움을 느낀다. 이런 사람일수록 외롭지 않으려고 평상시 애를 많이 쓴다. 일에 빠져들거나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챙기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분주히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을 떨쳐낼 수 없다.
 객관적으로 볼 때 외로운 처지가 아닌 사람이 왜 매사에 외로움을 호소하는 것일까? 그것은 ‘감정 채널’이 고정된 결과이다. 리모컨에 수십 개의 버튼이 있지만 누르는 버튼만 누르는 것처럼, 외로움을 느낄 때가 아닌데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지속적으로 고정되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액면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감정 채널이 한 곳에 고정되면 계속 같은 감정에 사로잡힌다. 서운함, 불편함 같은 충분히 다른 감정을 느낄 만한 상황인데도 자신도 모르게 외로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곳이 가정인 만큼 우리가 그 안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감정을 경험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가정에서 맺는 관계와 경험한 감정은 평생 동안 간직될 감정의 채널을 고정시키게 만들기 때문이다. 감정 채널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감정을 느낄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고정된 감정을 느끼고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그 특정한 상황에서 외로움이 아닌 다른 감정들을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는 우리 가족의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부모님의 갈등이 잦아지면서 우리 집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우리 엄마, 아빠가 이혼할까봐 항상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힘든 내색 없이 착하고 공부 잘하는 딸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야 부모님이 기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사회 안에 불안, 불만 그리고 갈등이 생길 때 가장 적은 대가를 치르고, 일시적으로 가장 높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대응책은 누군가 또는 일부 소수자들에게 문제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다. 책임으로 지목된 사람에게 증오와 분노 그리고 적대감을 터뜨려 결과적으로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무마하고 일시적으로 질서를 찾는 방식이다. 이를 ‘희생양 메커니즘’이라고 한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생겨났으며 모든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여 문제와 갈등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 대처방식이었다.
 이러한 희생양 매커니즘이 가정 내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가족 희생양이다. 가족 희생양은 가족 중 한 사람의 희생으로 가족 구성원 전체가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일컫는다. 가족 희생양의 원인은 위의 사례처럼 대체로 부부 갈등이다. 일반적으로 부부 갈등의 회피 수단으로 희생양이 만들어진다. 부부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자녀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모는 그 책임을 자녀에게 무의식적으로 떠맡기게 된다. 이러한 가족 희생양에게 책임에 대한 선택권이란 없다. 그러나 가족 희생양이 가족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다만 문제가 드러나지 않도록 일시적으로 문제를 덮도록 간신히 버텨줄 뿐이다. 가족 희생양은 자신의 삶이 무엇 때문에 힘든지 알지 못한다. 가족 희생양이 자신이 희생양임을 인식할 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생긴다. 자신이 가족 희생양이었음을 인식해야 한 걸음 물러나서 가족을 관찰할 수 있고 무의식적인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