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목간(木簡)은 좁고 기다란 양면체 혹은 다면체로 다듬은 나무 조각에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 등을 그린 것으로서 종이 이전 또는 동시대에 서사 재료로 이용된 것들이다. 이들은 사막이나 지하의 습지, 바닷속 등 나무가 썩지 않는 곳에서 발굴되는데, 단편적이지만 제작 당시의 언어문자를 비롯한 정치경제사회문화 생활의 실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고대의 역사 복원을 위한 새로운 자료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러한 목간을 중심으로 하여 정립된 하나의 학문 분야를 목간학(木簡學)이라 일컫는데, 대량의 자료 발굴로 목간학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에서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2007년 1월 ‘한국목간학회’의 창립을 계기로 역사학은 물론 고고학보존과학서예학한국어학 등 관련 분야의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목간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고대한국의 목간을 중심으로 한 목간 연구의 현황을 소개함으로써 일반의 관심을 환기하고자 한다.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97점의 목간이 발굴된 이래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남한 내의 20개 유적지에서 600여 점의 목간이 발굴되었는데, 이 중에서 먹글씨에 대한 판독이 가능한 묵서 목간의 숫자만 해도 400여 점에 이르고 있다. 2012년 12월까지 발굴된 목간을 하위 분류해보면, 신라 목간이 3개 유적지 349점(묵서 262점), 백제 목간이 7개 유적지 152점(묵서 79점), 통일신라 목간이 9개 유적지 121점(묵서 81점), 불명 유적지 1점(묵서 1점)의 분포를 보인다. 이로써 신라와 백제 목간들이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 자료로 태안 죽도선, 마도12호선에서 74점의 목간이 발굴되었으며,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한나라의 자료인 「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부(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簿)」와 함께 󰡔논어󰡕 죽간까지 출토되었음도 덧붙일 수 있다.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함안 성산산성에서의 자료 발굴, 최근 시작된 경주 월성 일대에 대한 발굴을 통하여 목간 자료의 출토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상 한국 목간의 발굴 수량은 중국의 약 40만매, 일본의 약 20만매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한 것임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기적인 면에서 7세기 이후인 일본에 비하여 우리는 6~8세기에 걸치므로 한 세기 정도 앞선다는 점에서 고대 한일 간 문화 교류의 실상을 이해함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자료로서의 가치에 주목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6~7세기 자료로 추정되는 경주 월성해자 출토 149호 목간과 일본 시가현 니시가와라 모리노우치(滋賀縣西河原森ノ內) 유적 출토 2호 목간을 비교한 결과, 어순 면에서 한문을 한국어와 일본어의 어순에 따라 재배치한 점뿐만 아니라 종결사 용법의 ‘-之’의 사용, 주제격조사 용법의 ‘-者’의 사용 등에 공통점을 보임으로써 고대 동아시아의 문자문화 교류가 ‘중국 대륙 ⇒ 한반도 ⇒ 일본 열도’의 흐름으로 전개되었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7세기 자료로 추정되는 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들에서 8세기 일본 목간과 유사한 특징들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망명 백제인들이 가져간 높은 통치 기술이 일본의 고대국가 체제의 확립 과정에 이식되어 일본의 목간 사용이 정착되었음도 최근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이상과 같이 고대한국의 목간 자료는 그 수량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문화 교류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으로 고대한국 더 나아가 고대동아시아의 역사 연구에 관심을 가진 더 많은 신진학자들이 나타나 고대의 역사 복원에 나아가는 학제적 연구에 동참하여 수준 높은 연구 성과들을 창출해낼 것을 기대해마지 않는다.
▲ 국어국문학과 권인한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