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만화가 유승하 인터뷰

기자명 강도희 기자 (nico79@skkuw.com)

 

/정현웅 기자 dnddl2004@skkuw.com

외딴 시골의 산부인과. 열여덟 살 소녀는 부른 배를 잡고 침대에 누워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축복받아야 할 산모 옆에는 아무도 없다. 엄마에게 전화가 오지만 받지 못한다…. 유승하 만화가의 작품집 《엄마 냄새 참 좋다》에 수록된 만화 <축복>에 나오는 장면이다. 비혼모, 용산 철거민, 장애인 등 그녀의 만화 속 주인공은 영웅이나 미녀가 아니다. 차가운 현실을 살아가지만 유승하의 만화 속에서 그들은 따뜻하다.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그리는 인권 만화가 유승하 씨를 만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나.
어머니가 동양화 화가여서 어릴 때부터 먹 가는 걸 보고 자랐다. 그림에 대한 관심은 그때부터 생긴 것 같다. 또 연년생 사 남매 중 셋째다. 친척들이 전화해서 받으면 첫째 이름 부르고, 둘째 이름 부르고, 다 아니면 누구냐 하고… 존재감이 없었다(웃음). 서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나왔다. 서양화를 그리다 왜 만화가가 됐나.
당시 만화가는 그다지 환영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술은 하고 싶었지만 꼭 만화가가 돼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한 동양화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고, 자유로운 서양화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전형적인 서양화와 나는 맞지 않았다. 서양화가 나의 세계를 펼쳐놓고 남들이 다가오기를 바라는 장르라면 만화는 소통을 중시한다. 친구 같은 형제들과 아웅다웅 지냈던 나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조정해주는 일에 익숙했다. 그림을 그리더라도 다른 사람의 얘기를 전하는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 만화를 좋아하고 잘 그리다 보니 포스터나 교과서 삽화로 쓸 그림들을 주변에서 내게 부탁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 갈 길은 만화라고 느끼게 됐다.
 
만화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언제부터 했나.
졸업하고 잠깐 회사에서 책 표지 디자인을 했다. 그때 매킨토시 컴퓨터가 처음 나와 컴퓨터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만화를 손으로 그리는 게 좋았던 나는 회사를 나와 정말 그리고 싶은 그림을 해보기로 했다. 어린이 만화 공모전에 작품을 냈고 1994년 <휘파람>이란 만화로 상을 받았다. 그 후 바로 만화를 그리진 않고 어린이 동화 일러스트를 했다. 본격적인 만화 작품 활동은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서 인권 만화를 그리면서 시작했다. 동화 일러스트와는 다르게 만화는 이야기를 내가 직접 만들기에 하고 싶은 말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인권에 대한 만화도 이때부터 그리게 된 건가.
2001년 인권위가 만들어지고, 인권에 관한 영화와 만화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게 열 명의 국내 만화가들이 인권에 관한 만화를 한편씩 그려 만든 작품집이《십시일반》이다. 나는 장애인 운동가 최옥란 씨의 삶을 다룬 <새봄나비>를 그렸다. 2001년 뇌성마비 1급 장애인 여성 최옥란 씨는 비현실적으로 낮은 최저생계비를 고발하는 텐트 농성을 했다. 그녀는 아들의 양육권마저 법원 판결로 빼앗기자 음독자살을 시도해 결국 생을 마감했다. 그 이야기를 접하고 충격이 컸다.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나처럼 아이를 키우는 여성인데, 나는 그녀에 비하면 정말 편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만화로 인권위에서 활동을 시작한 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다신 만화를 못 그릴 줄 알았는데 이후에 용산 철거민이나 밀양 송전탑 사건 등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만화를 계속 그리게 됐다.
 
인권 만화를 그리다 보면 소외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슬픈 이야기를 듣는 게 마냥 기쁜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취재를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인권위에서 두 번째 작품집을 낼 때 비혼모 얘기를 다뤘다. 결혼을 아직 못한 엄마, ‘미혼모’라는 단어는 결혼을 해야만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여성차별적 시선이 담긴 단어다. 결혼을 안 한 여자, ‘비혼모’에 대한 차별은 당시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한 차별이었다. ‘그늘에 숨겨진 그들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리라’하며 자신만만하게 비혼모 시설에 갔는데 꼭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상처 입은 그 사람들을 데리고 뭘 물어볼 것인가. 쑥스러워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결국 취재를 하지 못하고 대한사회복지회에서 낸 수기집을 읽고 그렸다. 그 뒤로 심리 상담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비혼모, 철거민, 장애인… 이들은 모두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만화를 그리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사람은 누구인가.
용산에서 철거민 투쟁을 해온 강정희 씨를 그릴 때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10층에서 20층, 20층에서 30층, 계속 높은 곳을 바라보고 살았는데 그분은 마당에서 살아도 당차게 사는 거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지위, 더 높은 명예를 원한다. 그러나 그런 삶은 결국 꽉 막힌 양계장의 삶이다. 소박해도 자유롭게 사는 강정희 씨의 모습이야말로 ‘마당을 나온 암탉’이었다.
 
▲ 만화 <축복> / ⓒ도서출판 창비

 

 

유승하 작가의 만화에는 여성을 빼놓을 수 없다. 여성에 대한 관심은 이때 생긴 건가.
상담 공부를 하고 ‘여성의 전화’라는 단체에서 여성 상담을 시작했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상담해주는 단체인데, 우연히 그곳에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상담을 하게 됐다. 여성단체에서 일을 하다 보니 여성은 여전히 사회의 약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낳은 엄마는 아직도 장애인과 비슷하다. 한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한 손에 아이를 안고 장애물 경기를 하는 것 같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한국 최초의 여성 노동운동가 강주룡, 조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등 역사 속에서 차별과 맞서 싸웠던 우리나라 여성들을 다룬 만화도 그렸다.
역사적 인물이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기존 작품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내 모습과 역사 속의 여성들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허난설헌과 나혜석 캐릭터는 나와 비슷하게 그렸다. 특히 나혜석은 서양화를 전공한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친 여성이다. 그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세계 여행도 한 신여성이었지만 여성 화가를 대하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 탓에 지금까지 그녀의 작품은 단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 만화 <새봄나비> /ⓒ도서출판 창비

 

 

같은 작가가 그린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만화마다 그림체가 다르다. 이런 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는가.
고 최옥란 씨를 다룬 <새봄나비> 같은 경우엔 너무 슬펐기 때문에 순정 만화 같은, ‘슬픈 그림체’를 연출했다. 비혼모 고등학생을 다룬 <축복>은 일부러 밝고 명랑하게 그리려 했다. 배우가 노인 역도 하고 어린 아이 역도 하듯이 만화가도 만화마다 다양한 그림체를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어떤 만화를 그리고 있나. 두 아이의 엄마인데 마감에 쫓기는 만화가의 일과 집안일, 둘 다 하기 힘들지 않나.
얼마 전엔 세월호 유가족들과의 인터뷰를 담은 책에 삽화를 그렸다. 또 ‘한겨례신문’에 만화 칼럼을 연재하고 있고, 다른 작가들과 함께 인권위에서 인권 만화를 계속 그리고 있다. 집안일을 하면서 만화 일을 같이 하면 힘들 때도 있다. 아직까지 장편을 못 낸 이유다. 사회의 민감한 문제를 다루다 보면 선입견도 많다. 현재 한겨례에 연재하는 시사만화가 중에 내가 유일한 여성 만화가다. 그만큼 우리나라엔 여성 만화가가 많이 없다. 엄마의 삶과 만화가의 삶을 병행하는 게 힘들지 않는 대한민국이 됐으면 좋겠다.(웃음)
 
▲ 작품집 <엄마 냄새 참좋다> /ⓒ도서출판 창비
▲ 유승하 작가를 포함한 작가 10명이 그린 작품집 <십시일反> /ⓒ도서출판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