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천일’야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천일’야화
  • 장지원 기자
  • 승인 2015.06.08 23:01
  • 호수 15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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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장애등급제는 장애인을 일원화된 등급으로 나누고 그에 따라 신청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한한다. 이는 신체에 등급을 매기는 민감한 제도인데도 불구하고, 장애 당사자의 필요보다는 행정의 편의를 위해 의학적 기준에만 맞춰 운영된다. 한편, 현행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수급자의 가족이 부양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탈락시킨다. 이처럼 사회 공동의 책임인 복지를 가족에게 전가하는 부양의무제는 100만 명 이상을 생활지원 밖에 머물게 하는 대표적인 복지 사각지대로 꼽힌다. 전국 227개 시민단체의 참여로 출발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2012년 8월 21일부터 두 ‘악법’을 넘어서기 위한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일, 마로니에 공원에서 이화사거리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의 시위가 있었다. 행렬의 맨 끝, 두 참가자가 작은 현수막을 함께 들고 행진하고 있다. / ⓒ정현웅 기자 dnddl2004@skkuw.com

야광 조끼를 입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과 그 보호자들이 문득 그 자리에 멈췄다. 대기하고 있던 사복경찰이 곧장 가장자리 차선으로 차들이 지나가도록 안내하자 차량 사이에 갇힌 그들은 마치 섬처럼 보였다. 이들이 외치는 ‘우리는 살고 싶다’는 구호는 배기음과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의 아수라장에 묻혀 버렸지만, 그 묘한 모습만으로도 호기심에 찬 시민들을 멈춰 세우기 충분했다. 누군가는 어눌한 발음으로 외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는 ‘이건 심하다’며 혀를 찬다. 그런 시민들을 향해 확성기가 가장 많이 외친 말은 ‘죄송합니다’와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였다. 이윽고 시위 참가자들은 이화사거리 방향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행렬 맨 끝 목발을 짚은 장애인의 걸음에 맞춰 느리게 행진하는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유인물을 나눠주고 발언을 이어나갔다. 발음이 힘든 중증 장애인들에게 확성기 차례가 넘어오면 발언 대신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홍익대 아트센터 앞까지, 비장애인의 평소 걸음으로는 15분이나 걸릴까 한 거리를 50여 분에 걸쳐 행진했다. 그 과정에서 1~2개 차선만 사용하게 하려던 경찰과 다른 차선으로 진출하려는 참가자들 사이에 말싸움이 일며 해산명령이 떨어지는 촉박한 순간도 있었지만, 무사히 행진을 마치고 공원으로 돌아오는 이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지난 2일 화요일 오후 5시 30분경 대학로에서 펼쳐진 이 진풍경의 주인공은 공동행동의 ‘95인의 그린라이트를 켜줘!’ 시위 참가자들이었다.
본지 1551호 “400일의 농성, 조금은 특별한 그들의 권리찾기”는 당시 농성 400일을 돌파한 공동행동의 광화문역 농성장을 찾았다. 그때만 해도 이들이 농성장에 600일을 더 머무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대선 전후의 당시 정치권은 이들의 요구에 성실히 귀를 기울였다. 농성 시작 6일 만에 당시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였던 정세균 대표와 정책간담회를 가진 것을 시작으로, △민주당 문재인 캠프와 김두관 예비후보 △통합진보당 김미희 의원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 △안철수 캠프가 줄줄이 농성장을 찾았다. 민주당이 정책 제안과 시민 투표를 통해 선정한 공약 ‘국민명령 1호’에는 ‘장애등급제 폐지’가 선정되었고, 당시 박근혜 후보 역시 ‘장애등급제 폐지 및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을 공약으로 세우고 부양의무제 개선을 약속했다. 대선 이후 정부는 장애계와 학계가 참여하는 장애판정기획단을 구성하고 이르면 2016년부터 기존 등급제를 폐지하고 새 장애판정체계를 도입하겠다며 희망적 전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근 정부의 행보는 공약을 사실상 파기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실질적인 서비스나 복지 총량은 변하지 않는 ‘보여주기식’ 등급제 완화나 점수제 전환이 대안으로 제시됐고, 복지예산 3조 원 축소 선포가 뒤따랐다.
결국 지난 5월 17일, 농성이 1000일을 돌파하기까지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바뀐 것은 농성장에 놓인, 그간 장애와 가난으로 숨진 11명의 영정사진뿐이었다. 이에 공동행동은 농성 3주년을 맞는 8월까지, 95일 동안 전국 각지에서 출퇴근길 도로를 막아서고 요구사항을 외치는 ‘그린라이트 투쟁’에 돌입했다. 남은 두 달여의 시간 동안 그들의 시위가 돌파구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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