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성경 기자 (stellask@skkuw.com)

우리 학교 인사캠 수선관 1층에 가면 유화물감 냄새가 진동한다. 인디고색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캔버스들이 복도에 쌓여있다. 누군가 x축과 y축을 그으며 문제를 풀 때, 미술학도들은 캔버스라는 연습장을 사용한다. 겨우 다 완성이 된  듯해도 그린이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림은 버려진 습작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렇게 버림받은 캔버스를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곳이 있다. 의류 브랜드 ‘ul:kin’(얼킨)은 각 대학 미술학과 학생들을 비롯한 화가들의 습작을 받아 가방으로 만드는, 이른바 ‘업사이클링’ 활동을 하고 있다. ‘업그레이드’와 ‘리사이클링’의 합성어, ‘업사이클링’. 리사이클링이 버려진 물건을 원래 목적대로 재사용하는 것이라면 업사이클링은 새로운 가치를 입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회의로 분주한 이대 앞 얼킨의 작업실에서 이정민 아트디렉터를 만나고 왔다.

얼킨의 이정민 아트디렉터가 자신들의 모토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안상훈 기자 tkd0181@skkuw.com
 

 

브랜드 얼킨의 소개를 부탁한다.
얼킨은 버려지는 미술작품을 이용해 크로스 백, 클러치 같은 제품을 만들고 이로 인한 수익금으로 신진 작가들을 지원하는 예술, 문화 기반의 브랜드다.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원래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의상디자이너 두 사람을 만났고, 셋이서 뭔가 재밌는 일을 함께 해보고 싶다는 데 뜻이 통했다. 미술학도의 작품들이 졸업전시 후에 대부분 버려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버려지는 그림을 활용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이성동 디자이너가 그림으로 가방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면서 얼킨을 설립했다.

버려진 캔버스가 어떤 작업을 통해 가방으로 재탄생하는지 궁금하다.
각 대학 미술학과 학생회장과 연락해 학생들이 습작을 기부하면 우리는 같은 크기의 새 캔버스로 바꿔준다. 성균관대 미술학과도 교류하고 있다. 그 외에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개인 작가들의 습작도 받고 있다. 그림을 받으면 나무틀과 캔버스 천을 일일이 분리해서 자체 연구한 용액으로 그림을 코팅한다. 이제 그림이 아닌 원단이 된 캔버스를 공장에서 재단하고 로고를 붙이면 하나의 가방이 완성된다. 가방이 판매되면 협업한 작품에 한해 수익의 10%는 작가에게 돌아가고 또 다른 일부는 신진 작가를 후원하는 전시에 쓰인다.

제품 라인이 여러 개다. 각 라인을 설명해달라.
얼킨의 가방은 △업사이클링 △아티스틱 △콜라보 이렇게 3개의 라인이 있다. ‘업사이클링’은 말 그대로 버려지는 작품을 업사이클링한 제품 라인이다. 각각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세상에 단 하나 뿐이다. ‘아티스틱’은 얼킨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만든 제품 라인이다. ‘업사이클링’과 달리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콜라보’는 서울시 디자인 재단과 협업한 제품 라인이다. 재단에서 주최한 서울디자인 문화상품 개발에 참여해 서울의 건축이나 풍경을 표현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가로 1m가 넘는 크기의 작품을 그대로 프린팅하여 그 일부가 가방이 되도록 제작해 같은 제품이라도 한 작품의 다른 면들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얼킨의 제품이 되는 그림은 유화나 아크릴화가 많다. 특별히 제한을 두는 것인가.
그림의 형식이 크게 정해져 있지는 않다. 톱밥을 물감과 섞어서 그린 작품으로 만든 제품도 있다. 그러나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동양화보다는 서양화가 많은 편이다. 유화, 아크릴화 등 서양화의 배경이 되는 캔버스는 내구성이 강한 면직물로 만들어져 가방으로 쓰기 용이하다. 그러나 동양화의 경우 대다수 종이 등에 작업하기 때문에 원단으로 적합하지 않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디자인적으로 가치가 있고 원단으로서 기능을 다한다면 어떤 장르든 활용할 의향이 있다.

습작으로 가방을 만드는 것 외에 다른 일도 한다고 들었다.
단순한 판매뿐만 아니라 예술가를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건 재능 순환 전시회다. 작년 9월에 열었던 첫 전시 ‘얼킨 라이크 유(ul:kin like you)’는 신진작가들의 작품 홍보를 돕자는 의도로 시작했다. 주제를 정해 공지하면 작가들이 포트폴리오를 보낸다. 그 중 몇 개를 뽑아 전시회를 연다. 작년 가을을 시작으로 벌써 4번째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이외에도 얼킨의 SNS 계정으로 작가들의 작품과 전시 정보 등을 소개한다.

생긴 지 아직 일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렇게 사랑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하나는 기존엔 보기 힘들었던 형태의 디자인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얼킨의 철학이 대중에게 긍정적으로 다가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의류브랜드는 홍보와 그에 이은 판매에 집중한다. 그러나 얼킨은 제품 판매 외에도 예술계에 선순환을 이끌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또 업사이클링이라는 소비 트렌드가 떠오르고 있어 대중들이 매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얼킨만의 모토가 있다면.
우리의 슬로건은 ‘Art is you’다. ‘예술은 너무 어려워’, ‘이해 못 하겠어’ 하는 대중에게 ‘그냥 너 자체가 예술이야’라고 외치는 말이다. 얼킨의 브랜드 철학은 예술가와 대중 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에 있다. 실제 생활에선 물감조차도 마주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 제품은 그 자체가 실제 그림이다. 한 사람의 예술이 나의 생활로 녹아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을 알리는 데 큰 비용과 시간을 투자할 여력이 없는 작가들도 얼킨을 통해 홍보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가 예술가와 대중 간의 벽을 허물 수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얼킨은 앞으로 보다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신진작가들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도 확장시켜나갈 계획이다.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도를 계속해가면서 ‘얼킨스럽다’는 인식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어? 저건 누가 봐도 얼킨이 했네!’ 같은 생각이 드는 작업을 하는 것이 목표다.

예술가의 습작으로 만들어진 얼킨의 컵홀더들.

사진| 안상훈 기자 tkd0181@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