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소연 기자 (ery347@skkuw.com)

영화 ‘아이로봇’ 속 2035년,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며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일방적이었던 인간과 로봇의 관계는 고도로 지능화된 로봇이 개발되면서 변화한다. 로봇이 자아를 갖게 되면서 인간과 대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영화 속 이야기처럼 인간과 기계는 복종이나 대립관계로만 이뤄진 사이일까. 기계와 인간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기계비평’은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번 학기에 새롭게 ‘기계비평론’ 강의를 개설한 우리 학교 국어국문학과 황호덕 교수는 인간이 기술을 변화시키는 것만큼이나 인간도 기술에 의해 변화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기계 덕분에 ‘스마트’한 존재가 되었지만, 그만큼 기계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를 자각하고 앞으로의 흐름을 읽어내려는 시도가 기계비평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이에 학술면에서는 현대의 기술발전에 따라 기계비평이 기존의 시각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고, 기계비평론 책임교수인 황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기존의 기계비평, ‘속’ 보다는 ‘겉’
기술문명에 대한 비평이 낯선 분야는 아니다. 기계비평의 역사는 기술문명이 발전해온 역사와 그 시작을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계비평은 기술의 외형적인 측면에만 주목해 기술이 가져온 결과를 비판하거나 찬양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영화에 대한 비평이 그 대표적 사례다. 영화는 도입 초기, 파시즘의 한 유형으로 간주되며 아도르노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영화를 통해 군국주의를 홍보하는 메시지가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관객들은 그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는 의미에서였다. 반면 영화의 형식을 인간 본연의 욕망과 연결시켜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관점도 있었다. 영화의 형식이 꿈의 형식과 유사하다고 생각해 관객 자신이 희망하는 바를 영화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관점 모두 기계 자체의 알고리즘, 즉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비평하기보다는 기계가 불러온 결과에만 초점을 맞춘 시각이었다.

  기계, 역사를 말하다

 기계비평론 강의가 제시하는 시각은 기술과 인간을 분리시켜 생각했던 기존의 비평적 시각과는 다르다. 인간이 기술 세계 안에서 살고 있고, 기계와 서로 접속되어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의는 인간이 기계에 접속된 방식과 이 접속관계가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가령, 스피커를 기계비평적 관점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스피커가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60~70년대부터다. 전기조차 보급되지 않는 농가가 많았던 당시, 마을마다 스피커가 설치된 풍경은 이색적이었다. 그런데 스피커의 보급은 마을 내 풍경을 바꾸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보급 이전까지 마을 내의 이야기구조는 마을 내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마을마다 스피커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스피커를 통해 중앙정부의 메시지가 전달되면서 마을의 이야기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중앙 정치의 문법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향촌의 질서도 바뀌었다. ‘새마을 운동’을 비롯해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국가 주도적 메시지는 농촌의 이상적 모습을 변화시켰다. 즉, 사운드 스케이프가 바뀌면서 마을의 모습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사운드 스케이프=소리의 풍경. 소리가 특유의 풍경을 형성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국어국문학과 황호덕 교수

사진|ⓒ장혜수 기자 chhyaensgu@skkuw.com

"기계 속에서 인간을 읽어야 혁신이 가능합니다"

기계비평론 강의를 개설하게 된 취지는.
기술의 급속적인 발전에는 기술의 진화 자체를 뛰어넘는 의미가 담겨있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수용자들의 사고나 행동방식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 글은 인쇄매체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쓰는 자와 읽는 자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쓰는 자와 읽는 자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다. 뉴스도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전달되는 소식이 뉴스라 여겨졌는데 지금은 페이스북에 올라온 지인들의 소식이 훨씬 더 궁금한 뉴스가 됐다. 뉴스의 개념과 가치가 변한 것이다. 이처럼 기계와 인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 나간다. 그런데 기계를 만드는 사람들은 여전히 기계의 메커니즘 안에서만 사고하고,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기계를 도구적 관점에서만 생각한다. 기계 자체의 알고리즘과 기계와 인간의 접속관계라는 두 가지 관점을 오버랩 시켜서 사고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대학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이공계 학생들은 이공계의 관점에서, 인문사회계 학생들은 인문사회계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경향이 짙은데, 그럴 것이 아니라 기계와 인간 전체를 봐야 한다. 더욱이 이공계 학생에게도 인문학과 관련한 상상력을 요구하고, 인문사회계 학생에게도 기계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시대이지 않나. 그렇기에 인문사회계 학생들은 기술과 연계된 상황에 대한 판단력을 기르고, 이공계 학생들은 인간적 가치를 전제하고 기계를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그간 국내에서는 기계문명에 대한 비평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회현실을 반영한 기계비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계를 경험하면서 주로 경이와 공포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이미 개발된 기계를 도입해온 입장이었고, 주도적으로 기계를 생산한 역사가 매우 짧다. 즉, 생산자의 입장에서 기계의 알고리즘을 알고 있고, 인문학적 시각으로 기계를 바라본 역사가 굉장히 짧은 것이다. 전차를 예로 들어보자. 전차에 대한 사람들의 첫 경험은 공포의 감정으로 이뤄졌다. 전차에 치여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그 이전까지 ‘치이면 죽는 기계’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계를 비평하기보다는 기계로 인해 공포의 감정을 더 크게 느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계와 인간사이의 관계가 바뀌었다. 기계를 생산하게 된 새로운 한국인들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와서야 기계비평적인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또한, 다른 사회와 구별되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전공 중심성이 강하다. 기계비평은 기술을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하는데, 개별전공에 집중했던 경향이 짙었던 탓에 학문을 넘나드는 논의가 활성화되지 않은 것이다.  

기계비평의 활성화가 한국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기술의 근본적 혁신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기계를 아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반대로 인문학적인 비평의 가치를 아는 자만이 진짜 인간을 위한 기계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는 인간의 신체에 맞추어 가장 사용하기 편한 방식을 고안했다. OS개념도 완전히 바뀌었다.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바를 생각하고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에 이런 기계가 개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기계는 결국 사람들의 삶과 사고까지 바꿔놓았다. 이제 더 이상 2G시대를 상상할 수 없지 않나.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의 기술혁신은 통상적으로 기존의 기술 형태 안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생각됐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기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봤던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적 가치가 실제 삶에 기여하는 바가 적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계비평적 관점을 통해 기술과 인간의 접속관계를 이해한다면 근본적인 기술혁신이 가능해지고 기존의 패러다임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생들에게 인문학적 비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기술 개발을 독려하는 사회적 흐름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 있다. 그럼에도 기계비평이 대학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보는 이유는.
기계비평을 통해 다른 영역의 문제라고 여겨졌던 바를 자기 영역의 문제로 가지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공학도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C언어나 빅데이터같은 분야를 인문학도들도 배우기 시작했다. 기계비평이 기계에 대한 인문학적 비평을 한다고 해서 공학도의 영역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C언어와 인간의 언어는 무관하지 않고, 두 영역 사이를 잇는 통로가 있다. 이 통로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만 인문학도가 공학을 배우고, 공학도가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그저 막연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기계비평적인 시각을 통해 그 통로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즉, 통로를 이용해 다른 영역일지라도 자신의 영역으로 가지고 와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 없이 그저 사회의 흐름에 맞춰 다른 영역의 학문을 배우다 보면 두 가지 영역을 연결시키기가 어렵다. 이는 밀접한 연결을 맺고 있는 두 영역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기계비평론 강의를 통해 학생들이 어떤 시각을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두 가지다. 첫째는 기계 자체의 문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는 기계와 인간의 접속관계에 대해 비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즉, 하나는 기계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학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결과로 나올 수 있는 방향도 두 가지다. 기계에 대한 이해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경우와 기계를 중심으로 탐구하되 인문학적 평가요소를 덧입힌 경우다. 정답은 없다. 둘 다 나름대로 좋은 기계비평적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기계에 대해 탐구할 수는 없지만 어느 분야가 되었든 그 분야를 자신의 기계비평적 관점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