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TO. 당신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처음 해외에 나갔을 때,
처음 그녀 혹은 그를 만났을 때...
기억하시나요?
 
첫사랑, 첫눈, 첫인상...
처음을 궁금해하는 마음은
이토록 띄어쓰기하지 않는 한 단어로 굳어졌습니다.
문득 우리는 '당신의 첫'이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첫사랑이라는 단어 때문 이었을까요?
당신이 들려준 '첫'은 기대만큼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들었던 '첫'은 오히려 막막하고 낯설고 서툴렀습니다.
 
FROM. 박범준, 고소현, 신예찬, 홍정아 기자
 
<성대신문> 특집팀은 우리 학교 학우, 동문, 교수님의 '첫'에 관한 얘기를 취재해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아! 인간 송해룡이가 이제 별꼴을 다 보는구나!'  

-송해룡(신방) 사회과학대 학장

 

내가 우리 대학을 다니던 70년대 서울은 지금과는 달랐다. 하수구가 제대로 복개되지 않은 채 악취를 풍기며 도로 옆을 흐르고 있었고, 가로등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지금 마로니에 공원이 있는 그 자리에는 서울대 문리대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더러운 하수구가 냇가를 이루며 흘러갔다. 선배들은 그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미네르바의 다리’라 불렀다.
‘한 번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개강 첫날 선배들과 함께 간 술집에선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이 흘러나왔다. 술에 잔뜩 취해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성북동 자취방으로 향했다. 비틀거리다 발을 헛디뎌 하수구에 빠지고 말았다.
‘아! 인간 송해룡이가 이제 별꼴을 다 보는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똥물에서 허우적거리며 황급히 하수구를 빠져나왔다. 
추락의 시기였다. 당시 성균관대는 지방에서 공부 잘하던 학생들이 서울대에 떨어지고 지원하는 학교였다. ‘서울대에 떨어지더니 이젠 진짜 똥물에까지 빠지는구나’ 그날 이후 이를 악물고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대학교 1학년 때 겪었던 두 번의 추락은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경험이었다.  

개강 첫날, 건물은 호흡하듯 사람들을 마시고 내뱉었다.

-함제균(경영 13)


처음으로 대학생이 되던 날. 미리 골라두었던 옷을 입고 버스에 올라탔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로 풍선처럼 부푼 마음을 새로운 것에 대한 걱정이라는 돌덩이가 꾹 누르고 있었다.
개강 첫날을 맞은 학교는 분주했다. 건물들은 호흡하듯 사람들을 마시고 내뱉었다. 도로에는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밀물과 썰물처럼 흐르는 사람들의 파도 속에서 나는 스마트폰이라는 튜브에 의지했다.
첫 수업에 들어갔다. 근데 이 수업이 끝나면 곧 점심시간이었는데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었다. 우선 오티에서 친해진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 조난신호를 보냈다. ‘밥 먹을 사람!’ 그러나 시간이 맞는 사람이 없었다. 다른 단톡방에도 톡을 보냈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러다 혼자 밥을 먹게 되는 건 아닌가. 불안감이 밀려왔다.
결국, 나랑 같이 점심을 먹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경영관 지하 2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볶음 우동을 받아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배경음악처럼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옆 사람이 신경 쓰여 괜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밥을 먹었다. 그러다 내 옆자리에서 자연스럽게 혼자 밥을 먹는 다른 사람들을 봤다. 문득 불안해졌다.
학창시절 나의 점심시간은 친구들과 나누는 시시콜콜한 일상사, 반찬 투정으로 채워졌었다. 그런데 그런 자연스러운 일상이 이제 더는 자연스럽지 않게 됐다.

 사랑의 원형

-A학우
 

한여름 냇가. 귓가를 스치는 바람. 바람을 타고 온 짙은 풀냄새.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맨발을 통해 느껴지는 물의 온도. 구겨진 양말. 그녀의 옆모습. 목선. 샴푸 냄새. 다리 밑에서 비를 그으며 주고받았던 시선.
첫사랑 하면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들이다. 재수학원에 다니던 시절 우리는 냇가를 자주 걸었고, 재수생이 할 만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그녀가 왼손이라면 나는 오른손이었다. 그녀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라면 나는 내성적이고 우유부단했다. 그녀는 멜론 차트를 듣는 사람이었고 나는 인디밴드의 음악을 들었다. 그렇게 둘이 겹치는 것이 전혀 없는데도 대화를 시작하면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왼손과 오른손처럼 우린 꼭 맞았다.
수능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작은 오해로, 우린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만남의 이유가 사소한 만큼 헤어짐의 이유도 사소한 법이다.
하지만 그녀와의 기억은 그 이후로도 꽤 오랜 기간 ‘사랑의 원형’으로 존재했다. 그녀 이후의 모든 연애는 그 사랑의 변주였다. 사랑의 변주곡들은 좋긴 하지만 원곡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생각이 깨진 건 작년 말부터였다. 이제 나는 나의 첫사랑을 꽤 객관적인 시선으로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를 만나고 꼭 4년 만이다. 그녀를 통과하는 데 4년이 걸렸다.

 캐나다에서 지불한 인생수업료

조한별(시스템 11)
 

지난해 6월, 난 워킹 홀리데이를 하기 위해 토론토에 있었다. 도착하고 3주 정도 헤매다가 한 부동산 업체의 비서로 일하게 됐다. 손님들을 응대하고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등 비서가 할 만한 단순한 잡무를 맡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날 무렵, 사장은 나에게 새로운 직책을 부여했다. 앞으로 은행에서 전화가 오면 나 자신을 한 중소업체의 인사팀장으로 소개하라는 것이었다. 사장은 탈세를 위해 유령회사를 만들고 거기에 나를 이용하려 했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그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그는 네가 외국인이라서 잘 모른다고, 이게 캐나다의 관행이라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월급까지 떼먹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그냥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해. ‘그냥 그런 사람도 있구나’라고” 담담하게 답하셨다. 그 담담한 말이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후로 난 한 대학교 앞의 작은 카페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크리스마스 시즌, 모은 돈으로 친구와 뉴욕여행을 갔다. 새해 전날, 타임스퀘어 광장의 카운트다운을 보려고 48번가에 있던 숙소에서 나왔다. 그런데 카운트다운을 보기 위해서는 입장티켓을 따로 구매해야 한다고 했다. 티켓이 없는 우리는 결국 계획을 수정하고 타임스퀘어와는 멀리 떨어진 한 술집에서 TV를 보며 새해를 맞았다. 우리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쯤, 한 흑인 남성이 일어나더니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술을 한 잔씩 샀다. 그리고 한명 한명씩 포옹을 하며 소리쳤다. “Happy New Year!” 폭죽이 뉴욕의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눈가의 주름이 웃었습니다. 

-김려홍(신방 13)
 

먼저 미역을 불려야겠습니다. 큰 대접에 미역을 쟁여놓고 스마트폰을 켰습니다. 애호박전. 버섯전. 오이무침. 동그랑땡. 모두 당신이 평소에 내게 해주던 요리들입니다.
우연히 부엌에서 요리하는 당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요리를 준비하는 당신의 손은 무척 빨랐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리듬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오랜 세월을 거쳐 최적화된 어떤 리듬이 당신의 몸짓에서 느껴졌습니다.
그 리듬을 아직 갖추지 못한 나는 허둥댔습니다. 동그랑땡을 벌써 5개째 버렸습니다.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좀 진득하게 기다려야 하는데 30초도 안 돼서 뒤집어서 망치고. 모양이 일그러져서 버리고…. 새송이버섯이 잘 썰리지 않았습니다. 편 썰기로 버섯을 썰고 밀가루, 달걀을 차례로 입힙니다.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버섯을 올립니다. 버섯이 탈까 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이모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당신의 생일을 놓칠 뻔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환갑이면 더 화려한 식사를 대접해드려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늦둥이로 또 외동으로 낳은 딸을 위해 당신은 오늘도 직장에 나갔습니다.
허리를 펴면서 시간을 확인합니다. 6시 40분. 6시에 퇴근한 당신이 이제 돌아올 시간입니다. 요리를 시작한 게 4시였으니 세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다리가 저리고 허리도 조금 아팠습니다. 전을 태우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느라 눈도 아팠습니다. 전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불 앞을 지키시던 당신도 이렇게 아팠을까요?
“너, 뭐하냐?” 앞치마를 두른 저를 보고 당신은 당황했습니다. “엄마 생일상 차리고 있었지”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보다” 당신은 그제야 웃었습니다.
이제 케이크에 초를 꽂아야 합니다. 촛불 여섯 개를 꽂았습니다. 당신은 수줍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항상 표현을 잘 안 하는 당신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음. 괜찮다. 내가 끓인 것보다 더 맛있는데?” 미역국을 먹고 당신이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습니다. 눈가의 주름이 웃었습니다.

"번호 좀 줄래?"

-B학우
 

1학년 1학기 ‘비즈니스 영어’ 수업 시간,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나와 똑같은 검은색 체크남방에 청바지까지 비슷하게 챙겨 입은 그녀. 주변에선 커플룩이냐며 혹시 둘이 사귀는 거냐며 놀려댔다. 웃어넘기고 말았지만, 그때부터 그녀에게 눈길이 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매번 ‘비영’ 시간을 기다렸다. 그 아이를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시간마다 번호를 물어보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음을 기약하는 것을 반복하기를 여러 번. 그러다 결국 중간고사를 보게 됐다.
‘오늘은 꼭!’하고 속으로 다짐하며 강의실에 들어갔다. 째깍째깍. 시계를 보며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쯤, 그녀가 시험지를 내고 나갔다. 급히 나가 그녀를 쫓아갔지만, 뒷모습조차 보이질 않았다. ‘결국, 오늘도…’ 한숨을 푹 쉬며 뒤돌아서는 순간. 마법처럼 그녀가 서 있었다. “번호 좀 줄래?”

서울 너, 이름 빼고는 다 낯설구나

-박경민(신방 11)
 

입시가 끝나고 친구와 함께 서울 여행을 갔다. 경상도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자라온 내게 서울은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자 미지의 세계였다. 서울 여행은 내게 수많은 ‘첫’을 선사해주었다. KTX를 타고 도착한 서울역에서 나는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큰 역사 안에서 많은 사람이 각자의 길을 바삐 걷고 있었다.
지하철은 또 다른 신세계였다. 색색의 선들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노선도는 순식간에 나를 ‘촌놈’으로 만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하철은 몇 번 타봤으니 서울 지하철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큰 오산이었다. 지하철 1호선을 타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긴장하는 동안 지하철에서 여유롭게 졸고 있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인사동과 광화문, 국회의사당에 들렀다. 세종대왕 동상 앞으로 거대한 빌딩들이 왕을 호위하듯 우뚝 솟아있었다. 저렇게 큰 건물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저 건물들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을까.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지금도 광화문 광장을 지날 때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서울의 거대한 규모에 압도돼서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어색하게 행동했었던 그 날의 우리.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익숙한 일상이기에 그때 모습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어른에 가까워지다

-유관재(경제 11)
 

군대 가기 전에 면허를 땄지. 그리고 지난 봄이었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 안 나. 엄마가 백화점에 있는데 좀 데리러 와달라고 하셨어. 그때 처음으로 혼자서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했지. 아 물론, 운전학원에서도 운전하고, 도로에서도 운전해 본 적은 있지. 근데 그땐 항상 옆에 누군가가 있었거든. 코치해주고 조언해주는 누군가가. 그땐 차 안에 나밖에 없었단 말이지. 처음 운전해볼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는 운전해본 사람이라면 아마 다들 알 거야. 일단 의자를 최대한 핸들에 밀착시키고 시선은 항상 불안정하지. 내가 손에 땀이 많은 편인데 그때도 핸들이 땀에 흠뻑 젖었던 게 기억이 나네. 차는 누구 거였냐고? 우리 엄마 차였지. 차를 타면 그런 느낌이 있어. 마치 이 차가 내 몸의 일부인 듯한 느낌. 그래서 좌회전을 할 때 핸들만 왼쪽으로 돌리면 되는데 몸도 같이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막 그러지. 집에서 백화점까지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는데 그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요즘도 떠느냐고? 이젠 안 떨지. 익숙해졌어. 운전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느냐고? 그냥 어른이 되어간다는 느낌? 술을 마시고, 군대를 제대하고, 운전할 줄 알게 되고…. 그렇게 할 줄 아는 게 하나씩 늘어나는 거지.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다'

-C학우

초등학교 6학년 때 밤늦게까지 학원에 다녔어요. 셔틀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창밖의 놀이터가 눈에 들어왔어요. 갑자기 뛰어나가 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옆의 친구들도 같은 생각을 했나 봐요. 기사님께 차를 세워 달라 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다들 놀이터로 달려나갔죠.
가을밤, 하늘엔 별이 반짝거리고 공기는 시원해서 정말 좋더라고요. 뭐 하고 놀까 하다가 ‘탈출 게임’을 하기로 했어요. 규칙은 단순해요. 술래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빨리 미끄럼틀을 탈출하면 돼요. 여기서 바로 사건(?)이 발생했죠.
미끄럼틀을 차지하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 여자애와 부딪혀 버렸어요. 입술과 입술이 말이에요. 서로 깜짝 놀라 얼른 떨어졌어요.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났어요. 정신이 들자 저는 그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사실 따지자면 제가 미안해 할 일도 아니었지만요.
다음날 다시 만났을 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뭔가 어색하고 불편했어요. 결국, 그 아이와 같은 중학교에 갔지만 만나도 서로 본체만체하는 사이가 됐죠.
그래도 그때 그 친구와 입술이 부딪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첫 뽀뽀의 상대가 남자였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회사 그만두고 싶었떤 때야 수없이 많지"

-김정민(화공 06)
 

입사 1년 차 때 여러 가지 업무가 동시에 떨어져서 많이 우왕좌왕했지. 어떤 일을 우선순위로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과장님한테 얘기했지. 업무량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그때 과장님이 바쁘셨던지 잠깐만 있어 보라고 하더라고. 자기 할 일을 다 끝내더니 나를 흡연장으로 데리고 가더라. 과장님이 담배를 한 대 딱 피우더니 “정민아,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 정색했어. 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어리바리했지. 담배를 끄더니 “이제 8개월 됐잖아. 잘 좀 하자.” 하더라고.
그날 아주 된통 당했지. 과장님이 나를 사무실로 데려가더니 자기 옆에 앉으라는 거야. 그러더니 막 내 업무를 자기가 직접 하더라고. 그걸 난 옆에서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 있는 거야. 온종일 그러고 있었어. 점심 먹고 퇴근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어디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붙어있으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막 웃더라.
반대로 이런 일도 있었다? 입사 2년 차 때 공장을 짓고 시험 운전하는 일을 맡았는데, 회사를 다니다 보면 일이 막 몰리다가도 어느 순간 할 일이 없어지는 때가 있어. 그게 한 일주일 정도? 그 기간이 길어졌었는데 그때 회사에 다니기가 싫더라고. 다른 사람은 다 저마다 일로 바쁜데 나만 하는 게 없으니까.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