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1

기자명 이성경 기자 (stellask@skkuw.com)

와인오프너 ‘안나G’가 움직이고 있다.
ⓒ안상훈 기자 tkd0181@skkuw.com

여기 와인오프너가 있다. 평범한 와인오프너가 아니다. 소녀의 모습을 한 이것의 이름은 ‘안나G’. 치마 안에 와인병을 끼우고 머리 부분을 돌리면 손잡이인 팔이 발레를 하듯 올라간다. 그 팔을 내리면 코르크 마개가 빠지고 와인을 마실 수 있다. 귀여운 외모와 그보다도 더 주목받는 편리한 기능 때문에 이 제품은 전 세계적으로 1분에 1개씩 팔린다. 이 와인오프너의 제작자는 ‘알레산드로 멘디니’, 건축설계부터 제품디자인과 그래픽디자인까지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는 이탈리아 디자이너다.

저 멀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폭하니 안겨있는 거대한 인형 하나가 보인다. 미스터 차오라는 이름의 인형이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지난달 8일부터 DDP에서 진행된 ‘알레산드로 멘디니전’은 디자이너 멘디니의 초기부터 최근 작업까지 6백여 점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멘디니는 건축설계사무소와 건축잡지 <카사벨라>, <도무스>, <모도>등에서 일하다가 남들은 ‘여생’이라고 부르는 58세가 되서야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현재까지도 활발히 활동 중인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촉발한 디자인계의 거장이라고 평가받는다. 디자이너 멘디니의 세계를 만나러 DDP를 찾았다.

이번 전시의 모뉴먼트인 '미스터 차오'가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안상훈 기자 tkd0181@skkuw.com


미스터 차오가 알록달록한 몸으로 예고했듯이 문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사로잡은 건 발랄한 색감의 작품들이다. 멘디니의 디자인에서 색은 작품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완성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창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역할이 크다. 그의 색감은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 등 20세기 현대미술작가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전시장의 맨 앞에서는 얼굴 모양의 거대한 조형물 ‘데뜨 제앙뜨’를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은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과 수직, 수평의 선들로 이루어져 몬드리안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프루스트의자의 다양한 버전이 미니어쳐로 전시돼있다.
ⓒ안상훈 기자 tkd0181@skkuw.com


색색의 거대한 얼굴을 지나쳐 넓은 전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거대한 의자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멘디니의 대표작인 프루스트 의자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고전적인 앤티크 의자에 새롭게 장식만 해서 만들어진 이 의자는 소설 속 ‘기억의 파편’을 색색의 점으로 표현했다. 익숙한 물체에 새로운 조형을 결합해 제3의 의미를 가진 디자인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멘디니의 ‘리디자인’인데, 이렇듯 그는 기존의 디자인에 반발하는 생각을 가지고 프루스트의자를 비롯한 수많은 혁신적인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이번 전시회의 도슨트 김찬용 씨는 “멘디니를 주축으로 한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인간다운 디자인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 멘디니를 비롯해 에토레 소트사스, 가에타노 페세 등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기능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감성을 중시하는 ‘벨(bel)디자인’을 제시했다. 이는 기능성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굿(good)디자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인간의 감수성을 충족시키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전시회장 한쪽, ‘BEL DESIGN; 디자인, 예술을 넘보다’ 섹션에서는 이탈리아 디자이너로서의 멘디니의 디자인관 또한 찾아볼 수 있었다.

벨디자인 섹션에 멘디니가 디자인한 조명 ‘아물레또’가 전시장을 밝히고 있다.
ⓒ안상훈 기자 tkd0181@skkuw.com


이번 전시는 작품의 배치는 물론이고 모든 벽의 색과 위치 심지어는 아트샵의 선반 높이까지 전부 멘디니가 기획했다. 1300제곱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전시 공간이 그가 디자인한 하나의 작품인 셈이다.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인간의 감성에 집중한 디자이너다. 그가 쓰는 색깔과 형태는 모두 그만의 감성을 담고서 우리에게 파고든다. “삶은 아름다운 것과 연결되어 있고 그 모든 건 디자인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삶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면 DDP를 찾자. 새로운 자극과 일상의 경이가 그곳에서 당신을 반길 것이다.
 

글 | 이성경 기자 stellask@skkuw.com
사진 | 안상훈 기자 tkd0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