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테일러 이경주씨

기자명 이성경 기자 (stellask@skkuw.com)

“슈트는 신사의 갑옷이다.” 영화 <킹스맨>에서 콜린 퍼스는 이렇게 말했다. 양복은 삶이라는 치열한 전쟁터에 나가는 신사들의 ‘전투복’이자, 어떤 남자든 멋있게 만들어주는 ‘날개옷’이다. 하지만 입는 사람이 달라서일까. 어쩐지 아침마다 아빠가 입는 양복은 스크린이나 브라운관 속 그 느낌이 아니다. 이유는 기성복과 맞춤 제작의 차이에 있었다. 테일러 이경주(70세) 씨는 내년으로 개점 100주년을 맞이하는 종로 양복점을 3대째 잇고 있다. 한국전쟁 때도 영업했던 종로 양복점은 시대가 바뀌면서 자리를 옮겼고, 많은 이들은 기성 양복을 찾아 떠나갔지만, 그는 여전히 손에 줄자를 쥔 테일러로 살아가고 있다. 그를 만나 묻고 또 들어봤다. 저기... 우리 아빠도 콜린 퍼스가 될 수 있을까요?

사진| ⓒ안상훈 기자 tkd0181@skkuw.com

 

테일러라는 직업을 설명해달라.
‘옷이 날개다’라는 말이 있듯이 의식주에서 가장 첫 번째가 옷이야.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지. 기성 양복은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기계가 만든 것이고, 우리(테일러)는 단춧구멍조차도 손으로 다 내고 바느질 해. 양복 한 벌을 만들 때 손님의 모든 치수를 다 재서 단 하나만을 위한 옷을 만드는 거지. 테일러는 그런 옷을 만드는 사람이야. 가끔 맞춤양복이 너무 비싸다는 사람도 있는 데 사실은 기성복이 비싼 거라고 생각해. 옷에 들어간 정성과 그만큼 잘 맞는 옷에 비하면 맞춤양복이 싼 것이고. 입어보면 알아.

맞춤양복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나.
손님이 오면 원단을 보여준 후 옷감부터 정하고, △앞품 △팔 길이 △등 어깨까지 약 20가지 정도 치수를 재면서 시작해. 재는 게 많아질수록 더 잘 맞는 옷이 만들어지지. 치수를 바탕으로 디자인한 후, 그걸 종이에 본을 뜨고 옷감 위에 그려서 가봉을 만들어. 보통 치수 재고 4, 5일 후에는 피팅을 하는 데, 손님이 입어보고 수정할 부분을 체크하지. 수정한 걸 재단사들이 있는 공장으로 보내면 1주일 정도 후에 옷이 도착하고, 손님이 마지막으로 옷을 입어보면 옷 한 벌이 완성 되는 거야.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에 대해 얘기해 달라.
한 40년 전인가. 내가 양복일을 배우고 얼마 안 됐을 때지. 가게에 온 손님이 맞춘 옷을 막 찢어버렸어. 자기 생각하고 옷하고 하나도 안 맞는다면서 찢고 가버리셨어. 그때 내가 가진 기술이라고 해봐야 뭐 얼마나 있겠어. 공부도 그렇잖아. 1학년 때 들어가서 4학년 책 들이밀면 어떻게 알아. 그거랑 똑같지. 그렇게 혼났어. 배우는 중에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10년 정도 후에 한 80살 정도 된 할아버지가 찾아온 적도 있었어. 그때 80살이면 지금 생각하는 거보다 훨씬 할아버지거든. 그런 노신사가 옷을 맞춘 적이 있었는데 완성된 옷을 입어보시곤 “여태껏 이렇게 잘 맞는 양복 태어나서 처음 입어본다”면서 좋아하셨어. 그 두 분이 제일 기억에 남네.

내년이면 종로 양복점이 벌써 100년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옷 만드는 것을 보며 자랐을 텐데, 선대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만주에서 양복 일을 배우던 아버지는 해방이 되고 한국으로 돌아오셨어. 그때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가족 중에 양복을 아는 사람은 우리 아버지밖에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양복점을 맡으셨지. 아버지 때엔 6.25 전쟁이 터졌는데 피난 가서도 우리 집은 문을 열었어. 사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여서 기억은 가물가물해. 그런데 한 가지 선명한 장면은 용산역에서 석탄 싣는 기차를 타고 피난을 가는 데 온 어른들이 다들 미싱이랑 양복감 짊어지고 피난열차를 탔던 모습이야. 대구 경산의 한 촌구석까지 내려가서도 아버지는 양복점을 여셨어. ‘그 전쟁통에 누가 양복을 입냐?’는 생각이 들잖아. 실제로도 그랬어. 그런데 마침 주위에 공군부대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지. 군복은 수선해서 입잖아. 군복도 수선해주고 돈 있는 사람들은 바지 정도는 맞춰서 입으니까 그거 하면서 버틴 거야. 아버지는 한 50년 동안 양복점을 하시다가 돌아가시고 그 다음엔 내가 맡게 됐지.

오랫동안 이 일을 한 만큼 한국의 양복 산업이 변화하는 것도 다 지켜봤겠다. 그 이야기가 듣고 싶다.
70년대에는 양복 가게마다 다 세일즈맨이 있었어. 그 사람들이 회사에 직접 가서 회사원들한테 주문을 받는 방식이었는 데, 일하는 데에서 치수 재는 건 물론이고, 가봉도 다 해줬지. 지불 방식은 할부로 많이 했어. 3개월, 5개월··· 이렇게 할부로 양복을 사면 경리가 월급에서 그만큼을 빼서 주는 거지. 그때는 신용카드가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런 게 싹 사라졌지. 또, 80년대에는 ‘제일모직’이 기성 양복을 생산하면서 맞춤양복시장이 확 작아졌어. 사실 초창기에는 별 신경을 안 썼어. 몸에 잘 맞지도 않는 기성복이 되겠냐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90년대로 들어서니까 이게 심각해지는 거야. 젊은 사람들은 다 기성복만 입고 다녔지. 그 이후로 시내의 양복점이 10분의 1로 줄었을 거야. 그전에는 종로 거리에 양복점이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수십 개는 더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어. 다 없어지거나 뒷골목으로 들어갔지. 양복점들이 제일모직 원단 팔아주지 말자고 불매운동도 했었는데 잘 안됐어. 그게 되나.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지 뭐.

사진| ⓒ안상훈 기자 tkd0181@skkuw.com

100년 동안 지켜온 가게인 만큼 후대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클 것 같다. 누구에게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은 없나.
그런 생각이야 200%지. 이대로 문 닫기가 너무 아까운 거야. 굴곡 많은 100년 세월, 만들 수가 없는 역산데 불행하게도 자식들 중엔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한 10여 년 전에 딸이 물려받겠다고 했을 때 여자가 뭘 하냐고 내가 안된다고 했어. 그런데 지금은 직업에 성별 없이 타워크레인도 여자가 하고 제트기 조종도 여자가 하잖아. 이제 와서 다시 물어보니까 하고 싶을 때 안 시켜줘서 싫대. 후회막급이지 뭐. 그래도 기다려보고는 있어.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는데 다들 돌려보냈어. 양복을 배우는 건 만만한 게 아니거든. 처음부터 기술을 배워야 돼. 디자이너가 되려면 처음부터 디자인을 배우는 게 아니라 미싱이나 바느질도 할 줄 알아야 디자인을 할 수 있어. 아니면 일이 돌아가는 걸 어떻게 알겠어.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은 일 배우라고 공장으로 보내.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선 젊은 친구들이 몇 명씩 오네.

인생을 먼저 살아간 선배로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달라.
옛말에 ‘한 우물만 파라’라는 말이 있어. 딱 한 가지만 잘하면 돼. 하고 싶은 거 한 가지만 확실하고, 열심히 해서 그 분야의 최고가 되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아. 지금은 직업의 귀천이 없잖아. 옛날엔 몇 가지 되지도 않던 직업이 요즘은 수만가지야. ‘한 가지만 잘해도 먹고살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지금 텔레비전을 틀면 어디든 셰프가 나와. 우리 때는 그냥 주방을 지키는 사람이었는 데 요즘은 셰프라고도 불러주고 방송에도 많이 나오잖아. 그러니까 한 분야의 최고가 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