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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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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호] 승인 2015.12.08  12: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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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응답하라 1988>이다. 1986년에 대학에 입학했던 내게 1988년은 스펙트럼처럼 이어지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최류탄 냄새 자욱하던 1학년과 2학년을 보내고 비로소 봄다운 봄이 대성로에 찾아온 해, 그래서 명륜당에서 처음으로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던 해, 꽃이 만발한 5월에 보길도로 수학여행을 갔던 해, 그리고 여름 방학이 되자마자 군대를 가야 했던 해...
<응답하라 1988> 바로 전에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가 <응답하라 1994>이다. 이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끌던 재작년 가을, 수업 시간에 학생 하나가 “선생님은 1994년에 뭐하셨어요?”라고 갑자기 물어왔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뭔가 근사했던 첫사랑의 이야기라도 기대하는 듯 다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학생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덕수궁 석조전 반지하에서 국어사전을 만들고 있었어.”
순간 학생들의 얼굴에는 실망스러운, 그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근사하고 멋지기는커녕 국어사전을 만들고 있었다니... 하지만 어쩌랴. 1994년에 내가 국어사전을 만들었던 건 분명했고 고궁 음악회가 열리는 토요일 오후에 음악 소리를 들으며 사전의 뜻풀이를 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드라마에는 추억이 가득하고 아련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사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러 국어사전을 소개하면서 현재 남북이 통일을 대비해서 공동으로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한 학생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너무나 낭만적이라는 것이었다. 남북이 함께 무엇을 한다고 하면 개성 공단에서 물건을 만들거나 금강산 관광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사전을 함께 만드는지는 몰랐다는 것이었다.
낭만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멋있다는 말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다른 학생들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멋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이런 말들을 칠판에 적어 내려갔다. 좀스럽지 않다는 것, 고상하고 우아하다는 것,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것,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녔다는 것... 토요일 오후 혼자 사전 뜻풀이를 하던 오래 전 그날처럼 머릿속에 단어가 쏟아져 내렸다.
학생들이 내게 알려 준 것처럼 사전을 만드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고 멋진 일이었다. 1994년 20대 후반부터 그후 30대 후반까지 10년이 넘도록 사전을 만들면서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나는 내가 했던 것을 허드렛일로 기억할 뿐 그 허드렛일이 원석을 다듬어 보석을 만드는 일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인간은 서로의 생각을, 지적인 사유를, 역사와 삶의 경험을 만들고 서로 전달하고 공유하며 살아 왔다. 이러한 생각과 소통은 인간이 영위하는 활동의 바탕이 되고 사고와 행동의 길잡이가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듣던 옛날이야기, 인류의 위대한 영혼이 담긴 고전, 장엄한 역사의 기록, 우주와 시간의 신비에 대한 철학과 사유는 언어로 표현되고 전달되고 인간의 유전자 깊이 기록되어,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생각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공감하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
이처럼 언어는 인간의 모든 활동의 시작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언어로 표현되는 이 모든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국어사전이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책상 앞에서, 출퇴근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대답하며, 누군가와 소통하고 대화하는 순간을 함께하면서 국어사전은 우리의 부름에 언제나 응답하고 있다. 

 

   

정희창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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