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소현 기자 (thonya@skkuw.com)

전시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한 편의 시가 눈에 띈다.  "노니는 물고기 지느러미 치고 푸른 물결 깊은데 / 숲 속 새 울음소리 나의 시에 화답하네 / 만물은 절로 때를 얻고 천기는 절로 움직이니 / 내 지금 생물을 바라보며 하늘의 마음을 보았노라." 조선 전기의 뛰어난 문장가 조위의 시다. 앞의 두 구절은 화자가 지켜본 자연의 풍경을 묘사했고 뒤의 두 구절은 이를 통해 깨달은 바를 전하고 있다. 빽빽이 우거진 나무를 뒤로하고 계곡을 바라보는 상상을 해보자. 강물 속에서 뛰노는 물고기들이 보인다. 귓가에는 무슨 말을 그리도 하는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들려온다. 조위를 비롯한 대다수의 옛 선인들은 동식물이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우주 만물의 법칙과 섭리를 이해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던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공존하고자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꽃과 풀, 날짐승과 들짐승을 뜻하는 ‘화훼영모’는 비단 이뿐만 아니라 물고기와 벌레 등 모든 살아있는 생물을 소재로 한 그림을 일컫는다. 각각의 동식물은 △과거 급제 △무병장수 △자손 번창 등의 의미가 있다. 우리 선조들은 상징을 가지고 있는 동식물을 그림으로써 작품 속에 이야기를 담아냈다. 또한 당시 시대상이나 문화적 코드 역시 작품 속에 사실적으로 녹여냈다. 고려 시대 공민왕이 그린 ‘이양도’를 보면 양의 다리가 어색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 없던 양의 형상을 기억에 의존해 그려낸 까닭이다. 조선 전기 김시의 작품에서는 중국의 영향이 지대했던 시대상을 알 수 있다. ‘야우한와’는 우리의 산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들판에 엎드린 소는 목이 아래로 늘어져 있다. 중국에만 살던 물소가 우리나라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강세황의 '향원익청'

Ⓒ 간송 문화 미술재단


조선 후기의 작품들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삼면이 벽으로 막힌 큰 공간이 보인다. 조선 후기 최고의 선비 화가이자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강세황의 그림 ‘향원익청’을 위해 마련된 방이다. ‘연꽃의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는 작품의 제목대로 두어 걸음 작품에서 떨어져 본다. 멀리서 보니 위아래로 넓게 출렁거리는 연잎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에 위치한 연꽃은 토실토실한 꽃잎을 활짝 벌리고 그 향을 내뿜고 있다. 끝이 불그스름하게 물든 연꽃의 새하얀 빛이 짙고 연한 녹색과 대비되어 탐스러움이 부각된다. 향기도 그만큼 강하게 느껴진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쪽에는 개구리가, 연꽃잎 위에는 여치 한 마리가 앉아있다. 이를 통해 연잎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유일한 꽃이라고 한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굳은 심지를 지키는 선비를 꼭 빼닮았으니 사랑받을 법도 했다. 본디 무리 지어 피는 연꽃을 단 두 송이만 그려내면서 연꽃이 가지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더욱 강조했다.

이광사, 이영익의 '잉어'

Ⓒ 간송 문화 미술재단


다음 전시관으로 이동한다. 넓은 전시관 속에서 몸을 펄럭이는 잉어 한 마리가 있다. 잉어가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관람객과 눈을 맞춘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서예가로 유명한 이광사와 그의 아들 이영익이 그린 작품 ‘잉어’다. 이광사는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서예가다. 영조의 왕위 계승을 반대한 소론이었던 그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는 탓에 유배를 가고 만다. 유배를 가기 전 머리와 눈을 그려뒀던 잉어 그림을 후에 아들 이영익이 뜻을 이어받아 완성했다. 잉어의 위에 그려진 피라미 세 마리는 이영익의 자식들을 의미한다. 피라미 주위에 떠다니는 마름이라는 식물을 통해 공부를 하느라 타향살이 중인 자식들을 표현했다. 한편 잉어의 아래에 그려진 식물의 이름은 한자로 ‘여뀌 료’라 한다. ‘마칠 료’라는 한자와 동음이의어로 학업을 마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영익은 이처럼 전통적으로 출세와 과거 급제를 뜻하는 잉어와 피라미, 마름, 여뀌 등의 동식물을 통해서 ‘지금은 타향살이를 하고 있으나 어서 출세하여 학업을 마치라’는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윤두서의 '심산지록'

Ⓒ 간송 문화 미술재단


잉어가 출세를 뜻한다면 사슴은 입신양명의 의미가 있다. 당대의 지식인이자 선비 화가였던 윤두서의 ‘심산지록’에는 백록의 사슴이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있다. 사슴의 털 오라기가 배경의 색과 거의 비슷해 멀리서 보면 사슴이 있는지조차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다. 평범한 동물의 그림이지만 이 사슴은 사실 윤두서 자신의 처지를 그려낸 것이다. 사슴 위쪽에 적힌 구절 역시 이를 잘 보여준다. ‘풀은 길고 영지는 빼어나니, 깊은 산은 색다른 봄일세. 중원은 비바람 치는 밤이니, 이곳에 몸을 숨기기 좋으리.’ 그가 살았던 17세기 말은 당파싸움이 심했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정치색과 관계없이 사람들을 만났던 그를 향한 비난이 많았다. 그런 현실을 피해 몸을 숨기고자 했던 윤두서의 심정이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화훼영모’ 전의 그림들은 옛사람들이 바라던 염원을 담고있다. 부귀영화, 입신양명, 무병장수 등 살면서 바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와 닮아있는 진솔한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동음이의어를 통해, 동식물 자체의 특성을 통해 상징적으로 바람을 표현한다는 데 있어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지혜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