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허옥엽 기자 (oyheo14@skkuw.com)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두 축으로 규정된다. 즉, ‘지금’이라는 시간의 X축과 ‘여기’라는 공간의 Y축이 맞물리는 특정 지점에서 우리의 존재가 구체화된다는 의미다. 이렇게 존재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맞물려 규정되지만, 존재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간보다 공간을 통해서다. ‘여기’라는 공간에 실제로 우리의 몸이 위치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타인에 의해 인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공간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삶의 관계와 질서를 만들고, 동시에 공간이 갖는 틀과 제약 속에서 삶의 관계와 질서를 바꿔 나간다. 윈스턴 처칠이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 의회의사당을 다시 지을 것을 약속하며 행한 연설의 한 부분인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는 문장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공간은 단지 우리 삶의 배경이 아니라 살아 숨쉬고 영향을 주고받는 입체적인 곳이다. 따라서 공간은 인간의 삶 전체를 담아내고 있으며, 그곳에 머무는 사람과 분리해 생각될 수 없다.

 

인사동에 위치한 쌈지길에 계단이 아닌 경사로를 설치함으로써 2층, 3층에 대한 자연스러운 접근을 유도했으며,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건물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제공했다.

Ⓒchulsa.kr


인간의 삶과 공간의 밀접한 관련성은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존 메이어스 래비 교수의 연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천장 높이가 당신의 사고를 바꾼다(Ceiling Height Alters How You Think)’라는 주제로 공간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천장의 높이는 사람들의 창의력과 집중력에 영향을 끼친다. 그는 천장이 높아지면 사람들의 창의력이 높아지고, 천장의 높이가 낮아지면 사람들의 집중력이 높아진다고 설명한다. 천장의 높이가 높아지면 인간은 그 공간에 영향을 받아 문제를 더 넓게 해석하고 사고를 확장하면서 창의를 요구하는 일에 자신을 더 적합하게 만든다. 반면에 천장의 높이가 낮아지면 인간은 그 공간에 영향을 받아 훨씬 더 구체적인 시각을 가지고 집중해야 하는 일에 자신을 더 적합하게 만든다. 미국 솔크연구소에서도 공간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쥐의 뇌를 비교해 본 결과, 다양한 환경에서 생활한 쥐의 경우 그렇지 않은 쥐에 비해 뉴런의 수가 15% 정도 늘어나 있었다. 이는 공간 즉, 환경적 자극이 쥐의 뇌 신경세포 증식과 뇌 신경조직 발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공간이 뇌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위치한 캐릭터 전시관 '딸기가 좋아'는 아이들의 관점에서 계획된 공간이다. 건물의 1층 입구 앞에 설치된 큰 딸기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frog30000 티스토리 블로그


특히, 아이들의 경우에는 발달 단계에서 공간이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변화하는 정도가 굉장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는 아이들이 어떻게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만들어 가는지에 대해 연구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발달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적응과정이며, 변화에 대응해나가는 과정에서 삶은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고 부드럽게 흘러나가기도 한다. 피아제는 새로운 변화에 순응해나가는 과정을 ‘동화’, 그렇지 않고 환경을 자신에게 맞추어 적극적으로 고치는 것을 ‘조절’이라고 불렀다. 동화와 조절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려는 목표는 세상과의 조화이다. 피아제는 이것을 ‘평형’이라고 불렀다. 피아제의 아동 심리발달 연구는 노베르그 슐츠와 같은 실존주의 건축이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슐츠는 피아제의 이론에 기반해 인간이 자신을 위한 실존적인 공간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 공간의 성질, 그리고 존재와 공간의 관계를 인식해 나간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을 인간과 공간의 상호작용이라고 보았다. 즉, 그는 인간과 공간의 기본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시점부터 인간과 공간이 상호작용을 통해 역동적인 균형을 이루려 한다고 본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위해 건립된 영화의 전당도 LED 조명을 활용해 화려한 이미지를 연출함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음블로그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있다. 서로 달리 살던 사람들이 결혼으로 한 공간에 같이 살면서 그 공간의 규칙에 따르다 보면 습관도 바뀌고 생각도 바뀌어서 결국 얼굴까지 닮게 된다는 의미다. 이렇듯, 공간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간과 공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이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