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위대한 예술가는 배가 고픈 법’이라는 신화는 예술가들의 이윤 추구를 그릇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당연하게 대중문화의 상업성은 문화, 예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예술에 대한 동경과 주류문화에 대한 반감을 혼동하는 오류는 문화비평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이제 예술가들의 저항은 사익 추구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향해야 할 지경이다. 그러나 모두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편견 사이에서 전자의 태도를 보인다고 믿는다.


창작 활동에 대한 목적은 지식인들의 정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멋대로 선언한 당위에 따라 예술가들이 자신의 선호를 거세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상업성에 대한 경계가 예술가들의 사명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창작 활동 역시 직업적 수단이 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현대의 문화산업 자체를 기만적이라 저평가하기도 하지만 대중문화 이전의 예술이라 하여 사익 추구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참 버릇이 없고, 옛날이 살기 좋았다’는 식의 과거를 미화하는 편향적 사고는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말대로라면, 대중문화의 질은 시간 축에 따라 하향곡선을 그렸어야 함에도, 대중문화는 점점 더 다양한 사람들에게 문화를 소비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고민해볼 시기다. 찰리 채플린은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는데, 거기서 예술이 탄생했다’고 했다. 히치콕의 ‘현기증’도 당시에는 그저 그런 상업 영화로 평가되었었다. 우리가 동경하는 많은 고전도 당시에는 비판의 대상이던 과거의 주류문화였다. 대중의 선호에 부응하고, 상업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 자체는 예술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예술이란, 우리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일 때보다 일상적 존재로 우리의 필요에 따라 소비될 수 있을 때, 더 가치를 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차르트는 황제의 하품 횟수에 따라 공연의 지속 여부를 결정했다는 일화가 있다. 문화산업의 발전과 자유시장의 등장으로 이제 예술가들은 황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사라졌다. 이제 예술가들은 다양한 대중들을 설득하고 만족하게 하기 위해 창작을 한다. 예술이 상업화될 수 있었기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의 품 안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의 예술에는 상업적 목적이 없었기에 진정한 예술일 수 있었다는 생각은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문화가 좀 더 낮은 곳을 향해,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된 것이 어떻게 문제일 수 있을까.

 

정낙영(신방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