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불과 몇 주 전의 일이다. 고등학교 동창 한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긴급 모임. 장례식장 xxx" . xxx 본인상? 고등학교 동기 동창으로 국내 굴지의 은행에서 중역으로 정년을 마치고 계열사에서 또 몇 년 이사로 잘 보내고 나서 한국생활을 접고 딸들이 사는 미국으로 들어간다고 작년 동기 모임에서 인사하고 간 친구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급한 일들만 마무리하고 저녁 시간 좀 늦게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데 문자를 보낸 친구가 나오면서 “오늘 새벽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대” 말을 잇지 못하고 급한 일이 있다며 휑하니 사라졌다.

목표가 사라진 자가 고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거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친구의 죽음 앞에 모인 군상들, 이미 절반 이상이 현직에서 물러나 백수로 사는 자들에게 서로를 위로하며 애써 밀어내던 고독이 죽음을 동반하고 바로 우리 언저리에서 얼씬거린다는 서늘함이 분위기에 진하게 묻어있다. 베이비 붐 세대에 태어나 앞만 바라보며 달려온 초로의 얼굴들, 퇴직하면 놀고 여행 다니면서 즐길 거라고 노래 부르다가 막상 ‘수고했다. 이제 푹 쉬어’ 명받는 그 순간 자신이 서 있던 곳에서 좌표가 사라지고 가정에서는 궤도에서 이탈한 유성처럼 갈 곳도, 오라는 곳도, 반기는 곳도 없는 용도 폐기된 남정네들이다.

사람의 평생은 3S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Survival, Success, 그리고 Significance. 20, 30대에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고(Survival), 40, 50대에 소위 사회적 성공(Success)이란 명제 앞에 휘둘리며 살다가, 60대가 되면서 이제까지 미루어 두었던 삶의 의미(Significance)를 발견하지 못하면 결국 스스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길을 택하는가 보다. 과연 이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이것이 없으면 생존 단계의 고통보다 분명 더 큰 고통이 있기에 죽음을 해결책으로 삼은 것일까?

아주 오래전 헌책방에서 집어 든 책 한 권에서 장님들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독백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저 세상에 천국이 없어도 좋다. 현재의 이 고통을 면할 수만 있다면 한 생명 끊어 버리는 것이 구원이 아니겠는가?”(「어둠에 갇힌 불꽃들」,『1976년 문학사상』) 장님이 생존경쟁에서 당하는 고통이 너무 무거워 죽음을 택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성공 이후의 공허감이 존재감을 상실케 하여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고통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일러스트│정낙영 전문기자 webmaster@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두 가지 호르몬이 있다고 한다. 성취로 인한 행복감을 관장하는 도파민과 단조로운 일상의 삶 속에서도 나른한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세로토닌. 둘 다 뇌 신경전달 물질이지만 전혀 다른 자극을 통해 분비된다. 고등학교 때 방학이라고 흩어졌던 친구들이 고향에 모여 떼 지어 휘젓고 다니던 어느 날 친구 아버님이 술이 거나하게 취하셔서 우리를 불러놓고 하시는 질문이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행복한지 아느냐?”. ‘술 마신 사람이란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란다. 당시 전혀 이해가 가지 않던 이 말이 나이가 들었는지 이제는 좀 이해가 간다.

우리 세대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이제까지 가족들과 사회가 필요로 하기에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고, 단군 이래 처음이라는 조국의 초고속 성장이 가져다준 더 큰 도전과 성취 덕분에 도파민적 행복감으로 버티고 살아왔다. 그러나 더는 그들이 나를 필요하지 않아 존재감 상실이 극한 선택으로 이어지는 지금, 우리는 다시 이 문제에도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 어르신이 남긴 한 마디가 어쩌면 key가 되는 답이 아닐까? 주위를 돌아보면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의 남은 삶을 그들과 나눌 때 잃었던 존재감을 다시 회복하고 도파민 대신 말라붙었다고 생각했던 세로토닌 분비의 샘을 여는 작업이요, 행복자의 길로 가는 시발점이라는 이야기다.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행복감과 보람으로 더 기쁘게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 그분의 나이가 되면 완전히 이해하게 될까? 고인이 되신 친구 아버님의 그 한마디가 바로 죽음을 선택한 그 친구가 찾아 헤매던 답이었다는 사실을 왜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배용수 교수
생명과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