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범준 편집장 (magic6609@skkuw.com)

바둑은 인류사 5000년을 겪으며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놀이다. 바둑판은 가로, 세로 19줄의 괘선이 교차하면서 361개의 착점을 이루고 있다. 첫수를 주고받는 경우의 수만 대략 13만 가지, 전체 경우의 수는 10의 360승에 달한다. 관측가능한 우주의 전체 원자 개수보다 많다.

바둑은 계산이 아닌 직관의 영역이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젖히고’, ‘갈라치고’, ‘넘긴다’. 바둑의 수는 엷음과 두터움의 이치로 환원된다. 이런 이치를 깨달은 자는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라고 밖에 딱히 표현할 길이 없다. 바둑에서 9단은 ‘입신(入神)’이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바둑 고수들의 착점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거기에 둬야 해서 둔 것이다. 고수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기풍을 갖고 있다. 그들의 기풍을 표현하는 언어는 문학적이다. 웹툰 <미생>에 수록돼 주목받았던 박치문의 기보해설을 보자.

“대평원의 낙조처럼 무심한 수가 다시 한 번 등장했다. 칼날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정체불명의 막막함이 40을 감싸고 있다.… 조훈현도 은은한 압박감에 문득 둘 곳을 찾지 못한다. 상대는 조용히 묻고 있다. 전쟁이냐, 평화냐”(『대국:제1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 결승』, 박치문)

박치문은 대국에서 문화혁명 시절 헤이룽장성의 돼지우리 당번으로 쫓겨난 녜웨이핑 9단의 무상함을 읽는다. ‘변방의 맹수’ 조훈현 9단의 매서운 기세를 읽는다. 그의 해설을 통해 바둑은 삶의 궤적이 교차하는 하나의 문학작품이 된다.

이렇게 직관적이고 문학적인 바둑의 영역에 기계가 등장했다. 컴퓨터의 계산 앞에서 인간의 직관은 무력했다. 지난 12일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제3국에서 이세돌 9단은 알파고에 176수 만에 불계패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 둘의 승패를 너머 인공지능을 향하고 있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은 대체로 걱정과 두려움이다. 세계경제포럼은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5년 안에 선진국 5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일찍이 “인류는 100년 이내에 인공지능에 의해 끝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몇몇 사람들은 알파고의 승리를 불쾌하게 여긴다. 알파고가 인간 고유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알파고의 승리를 통해 인간 고유의 영역을 ‘확인’했다고. 대국화면 속 이 9단은 긴장감에 손을 떨었다. 목이 타는 듯 물도 자주 들이켰다. 반면 이 9단의 대국 상대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제2국이 끝난 후 이 9단은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식사도 방에서 해결하며 하루 종일 호텔방에 머물렀다고 한다. 호텔방에서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호텔방에서 그가 느낀 감정과 그가 한 고뇌는 인공지능이 흉내 낼 수 없는 혹은 흉내 낼 필요가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어떤 것일 것이다.

이 9단은 대국에 들어서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바둑의 낭만과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지켜내겠다” 비록 이 9단은 졌지만, 그가 졌다고 해서 바둑의 낭만과 인간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이 9단의 승패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며 스스로 빛나고 있다.

박범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