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홍정아 기자 (ja2307@skkuw.com)

 

일본군‘위안부’ : ‘위안부’라는 용어는 가해 남성의 관점에서 만들어졌으며 문제를 축소·은폐하려 한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역사적 개념을 드러내기 위해 ‘ ’(작은따옴표) 안에 넣고 범죄의 주체인 ‘일본군’을 결합하여 사용한다.

지난달 24일, 영화 <귀향>이 7만 5천 명 시민들의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14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세상 밖으로 나왔다. 290만여 명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분노하고 눈물 흘렸다. 차라리 모든 것이 거짓이었으면 바라게 만들었던 영화는 거짓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은 영화보다 더욱 참혹했다.

거칠게 뜯긴 머리카락은 부모, 고향과 억지로 단절됐던 고통을 드러낸다.
어깨위의 작은 새는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며 돌아가신 할머니들과 우리를 연결하는 매개체이다.
소녀상 뒤 그림자 할머니들의 원망과 한이 어린 시간의 그림자이다. 심장의 흰 나비는 환생을 뜻한다.
빈 의자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자리이자 그들과 함께 할 우리들의 자리이다.
꼭 쥔 주먹 진심어린 사과와 법적 배상을 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맞서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이다.
뒤꿈치 든 맨발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지만 제대로 발 디딜 수 없던 소녀들의 차가운 현실을 보여준다.

<귀향>을 통해 본 일본군‘위안부’의 삶
1943년의 어느 날, 열네 살 꽃다운 소녀 정민은 가족의 품을 떠나 일본군에게 끌려간다. 실제로 한국인 생존 ‘위안부’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1세부터 27세 사이의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으며 이 중 14~19세가 가장 많았다. 주된 동원 방식은 △인신매매 △취업 사기 △폭력과 협박에 의한 납치였다. 일본의 점령지인 △한국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동원되었으며 그 수가 약 20만 명에 달한다는 추정치가 있다.

정민은 행선지도 모른 채 다른 소녀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중간중간 차가 멈추고 몇몇씩 내린다. “거기 너” 동행한 일본군 손에 이끌려 정민도 차에서 내린다. 문서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위안소’는 상해 사변 중 만들어졌다. 이후 1937년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이 전면화되며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1941년에는 △네덜란드 △미국 △영국 등 아시아 태평양 각지로 확산됐다.

차에서 내린 소녀들을 한 조선인 업자가 맞이한다. 두려움에 떨며 정민은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성병 검진을 받는다. 물론 자신이 아닌 군인들을 위해서다. 옷을 갈아입은 정민은 좁고 캄캄한 방으로 보내진다. ‘위안소’는 일본군이 직접 설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수요가 늘며 민간업자들이 대거 운영하기도 했지만, 육군성의 직접적 지시가 있었으며 정부기관·조선총독부·대만총독부가 협력했다. 정부 군 당국의 주도로 미성년까지 포함한 여성들을 집단으로 동원해, 조직화된 제도로 장기간에 걸쳐 강간을 행한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다. 일본군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위안소’의 설립 목적은 △일본 군인에 의한 점령지 여성 강간 방지 △성병 만연 방지 △군인들 ‘위안’ 제공 △군의 기밀 유지와 간첩 행위 방지였다. ‘위안소’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계급에 따라 이용시간과 요금이 달랐으며 군의 완전한 관리와 통제가 이루어졌다. 군은 병사들에게 ‘돌격 1번’이라는 이름의 콘돔을 배부했으며, ‘위안소’ 할인권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우린 벌써 다 죽은게야, 여기가 지옥이다 야” 소녀들은 자신이 머무르는 그 곳을 ‘지옥’이라고 칭한다. ‘위안소’ 밖으로는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군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좁고 어두운 공간은 방마다 터져 나오는 소녀들의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위안소’는 일본군 지정 지역 가옥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방이 필요했기 때문에 학교·사원 등이 사용되기도 했다. 전선에 가까울수록 열악한 환경을 갖추고 있어 천막·막사에서, 더욱 급박한 상황에서는 동굴이나 방공호에서 강간이 이루어졌다. 내부는 칸막이로 막힌 작은 방들이 여러 개 있는 형태였으며 간단한 침구와 요, 씻을 수 있는 대야가 준비돼있었다. 대부분 일본군‘위안부’ 여성들은 한곳에 머무르기도 하고 특정 부대를 따라 이동하기도 했다. 또는 ‘위안소’가 없는 부대를 찾아 순회를 돌기도 했다. ‘위안부’ 여성들은 하루에 많게는 몇 십 명을 상대하기도 했으며, 생리 중에도 피해갈 수 없었다. 임신하거나 질병에 걸렸을 경우 강제적 시술·낙태를 강요받았다. 극심한 고통을 잊기 위해 마약에 의존하기도 했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빨래와 식사 준비 등 허드렛일이나, 총알 운반 등 전쟁을 돕는 일도 함께 수행했다. 물론 외출과 거주의 자유는 전혀 없었다.

강일출 할머니가 그린<태워지는 처녀들>. 조정래 감독은 이 그림을 보고 영화<귀향>을 기획했다.


1945년, 일본은 항복하였고 우리나라는 해방됐다. 그러나 ‘위안부’ 여성들에게는 더욱 잔혹한 죽음의 그림자가 덮쳤다. 일본군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위안부’ 여성들을 집단으로 총살한 후 한데 모아 불태운다. ‘위안소’에 그대로 버려져 군인들의 발길이 끊긴 후에야 종전 사실을 인식한 여성들도 있었다.

“언니야, 이제 집에 가자…” 정민은 일본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꿈에 그리던 집을 향해 길을 떠난다. “거창땅 한데기골로 가주세요” 고향으로 돌아가려 수없이 되뇌던 이 말을, 소녀는 꺼낼 수 있을까.

귀향(鬼鄕),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 넋으로나마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제목이다. 과연 지금의 우리나라는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따뜻한 고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