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잊혀지다'라는 단어가 있다. 맞춤법에 관심이 많다면 '잊다'의 이중피동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맞는 표현은 '잊히다'지만, '잊혀지다'는 여기저기서 많이 쓰인다. 평소에도, 노랫말이나 문학에도, 가끔은 공식 석상에서도 쓰인다. 하필 두 번씩이나 피동 표현을 쓴 ‘잊다’가 왜 이리 많이 쓰이는지 궁금하다. 생각해보면 ‘잊혀지는'일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잊히면 안 될 수많은 것들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잊혀지고’, 두 번이나 피동을 써서 ‘잊혀진다.'

이천십사 년의 봄이 지나고 벌써 두 번째 봄이다. 봄이 두 번 지나는 동안 확실히 느낀 것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이들이 결국 '잊혀졌다'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광화문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건 어느 순간 당연해졌다. 당연해질 정도로 그들은 '잊혀졌고',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사람들은 그들을 지나친다. 봄이 두 번 지나는 동안 세월호는 여전히 진도 앞바다에 가만히 잠겨있다. 잊지 않고 바꾸겠다 했지만 바뀐 것은 없다. 그냥 잊혀졌다. 두 번의 피동 표현을 쓰면서.

'잊혀진'건 세월호뿐만이 아니다. 유가족들 바로 밑에는 광화문 역사에서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해 싸워오신 분들이 있다. 그들 중 하나는 불이 난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조금 더 걸어 서울광장에 가면 높은 광고판 위에서 현대차의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단 현대차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면 종로에서 ‘잊혀지지' 않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간은 지나가고, 그들은 모두 두 번의 피동 표현을 받으며 '잊혀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청년, LGBT,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노동자, 수많은 소수자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잊혀지거나 더 심한 꼴을 당했다.

잊혀지는 것이 더 늘어날수록 그 사이로 들어오는 것이 있다. 불이 꺼진 어둠 사이로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처럼 그것들은 잊혀진 틈 사이로 들어오고 많이 잊을수록 더 가까워져 불빛 한가운데의 우리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온다. 규제 완화, 경제민주화, 일자리 해소, 바른 역사교육, 청년 살리기, 실리 외교, 테러방지의 탈을 쓰고 다가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은 우리가 시꺼먼 방에 홀로 있을 때 그것들은 우리를 덥석, 집어삼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우리가 잊었던 사람들처럼 잊혀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떨까. 잊혀지는 것들에 관심이 있을까. 잊혀져서는 안 될 것들을 잊혀지게 하는 이가 누군지 관심 있을까. 주위의 사람 중에서도 아무도 모르게 잊혀지는 사람들이 지금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잊혀지는 것과 잊혀져서는 안 될 것에 주목해야 한다. 환한 불이 꺼지지 않게 끊임없이 주위에 불빛을 비춰야 한다. 머리 바로 위의 불빛에만 신경을 쓰면 어느새 어둠에 삼켜질 것이다. 잊혀질 것이다.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한 명의 기억을 여러 명의 기억으로, 수많은 기억으로 만들고 그 한 개의 불빛을 수많은 불빛으로 만들어야 한다. 누구도 억울하게 잊혀지지 않는 세상을 위해서는 그 불빛을 비춰줘야 한다. 어둠 속에서 그 누구도 ‘잊혀지지’ 않으려면.

나원영(철학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