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판결 속 역사를 비추다
엇갈린 판결 속 역사를 비추다
  • 박주화 기자
  • 승인 2016.04.10 22:29
  • 호수 15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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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4일, 대법원에서 종전의 판결들을 뒤엎는 이례적인 판결이 내려진다. 이날 대법원은 일본 기업과 일제강점기 피해자들 간 소송에서 원고 측 손을 들어줬다. 일제 전범기업을 대상으로 계속해서 제기돼왔던 소송 중, 처음으로 원고가 승소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일러스트  │어나윤 전문기자 webmaster@

올해 여든여섯인 A 할머니는 1945년 여수에서 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근로정신대’로 일한다면 많은 월급과 상급학교에 진학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담임선생님과 군청 직원의 말에 속아 부산항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당시 군청 직원은 꼬마였던 A 할머니에게 “비행기 청소와 같은 쉬운 작업을 한다”라고 알려줬을 뿐이다. A 할머니는 부산에서 출발해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야마 지역의 후지코시 사 공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은 군청 직원이 말해준 것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이제 막 도착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한달간의 군대식 훈련이었다. 이후 매일같이 10~12시간 동안 철을 깎는 노동을 해야만 했다. 고된 일과가 끝나고 그녀가 휴식과 잠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은 다다미 한 장이 채 되지 않는, 반 평 남짓한 공간이 전부였다. 냉난방 시설은 없었고 식사조차 제대로 배급되지 않아 물로 공복을 채우기도 했다. 철조망에 둘러싸인 공장에 갇혀 외출은 사실상 금지됐고 가족과의 연락은 검열 하에 이루어졌다. 종전 이후 회사는 조선인 근로자들을 방치했고 할머니는 고향까지 자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후 1965년 ‘국교 정상화를 위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협정(이하 한일청구권협정)이 체결됐다. 구체적 내용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이 조약과 협정을 통해 일본이 제공한 경제지원으로 인해 일본 국민에 대한 개인 청구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됐다고 여겨져 왔다.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를 뒤 바꾸는 두 사건이 발생한다. 2005년에 국가와 일제 피해 당사자들로 구성된 민관공동위원회에서는 1965년 이루어진 협정으로 청구권이 소멸한 것이 아니라고 표명했다. 나아가 2012년 대법원은 반인도적이거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협정이 적용될 수 없다고 천명한다. 이로써 A 할머니는 당시 피해를 보상받을 길이 생겼고 결국 지난달 22일 후지코시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승소를 얻어냈다. 재판은 “이번 판결로 피해자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받고 여생을 편안히 보내시기를 소망한다”는 재판장의 말로 끝이 났고 기쁨의 환호가 법정을 가득 메웠다. 한편 국내 판결에 앞서 동일한 내용의 소송으로 일본 재판소에서는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측이 패소했다. 어떤 사안이 국내 법원과 일본 재판소에서 다른 판결을 내리게 했을까.

 

대한민국 법원이 재판할 수 있는 문제인가
이따금 여러 국가의 법이 동시에 적용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본 재판소는 이 사건에 대해 “강제 징용 사건이 일본 내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해당 사건에 재판권은 일본에 있다”라고 판결했다. 반면 국제사법 제2조 1항은 “분쟁이 된 사안이 대한민국과 실질적 관련이 있을 때” 국내 법원이 재판권을 가질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 법원은 “불법적 행위가 이루어진 곳은 일본국 내뿐 아니라, 피해자들을 징집해간 일련의 과정이 조선 내에서도 자행됐기 때문에 해당 분쟁에 국내법도 적용 될 수 있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후지코시가 자행한 불법행위가 피해자들이 강제로 동원된 일본 공장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징집 과정에서부터 발생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조선의 영토가 불법적 행위가 이루어진 곳에 포함돼  대한민국과 실질적인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국내 법원이 이 사건에 대해 재판권을 가질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일본 재판소의 판결은 국내에서 유효한가
외국 판결은 민사소송법 217조의 4가지 조항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국내에서도 효력을 가질 수 있다. 후지코시 측은 일본 재판소에서 판결이 4가지 조항을 모두 만족하기 때문에, 국내에서 다시 같은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부당하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 법원은 일본재판소의 판결이 민사소송법 217조에 저촉된다고 판단했다. 4가지 조항 중 소송의 쟁점이 된 것은 3항인 “외국 판결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 국내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아니할 것”이다. 본 판결에 앞서 2012년 미쓰비시 강제징용 판결에서 대법원은 “미쓰비시의  손을 들어준 일본 판결은 국내의 선량한 풍속과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217조 3항에 위배돼, 국내에서 효력을 가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미쓰비시 사건과 유사하게 일본 재판소는 후지코시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국내 법원은 “일본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은 3·1운동과 4·19 민주항쟁 정신을 계승하는 우리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며 일본 판결의 효력을 부정했다.

청구권은 유효한가
우리 법은 사건 유형에 따라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소멸시효를 도입하고 있다.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피해자가 그 사실을 안 다음으로부터 3년, 불법행위로부터 10년이 경과하면 소멸한다. 권리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해도 소멸시효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대법원은 ‘객관적으로 당사자가 권리를 주장 할 수 없는 장애사유’ 등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예외를 둔다고 해석하고 있다. 후지코시 측은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손해배상청구권은 소멸했고, 소멸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당사자가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했다. 일본 재판소도 이 주장을 받아들여 후지코시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우리 법원의 해석은 달랐다.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일본은 한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관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이다”라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따라서 우리 법원은 한일청구권협정이 일본 국가권력이 개입된 식민지배와 관련됐거나 반인도적 행위에 적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해방 후 1965년 국교 정상화 이전까진 국교가 단절돼 있었고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 2012년 대법원의 견해 표명 이전까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청구권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이 다수의 견해였던 점을 들어 장애사유가 존재했다고 판단했다.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청구권이 소멸했고 권리 행사에 대한 장애사유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후지코시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심 판결 그 이후
반인도적이고 불법적인 식민지배에 대해서는 한일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 본 판결은 2012년 미쓰비시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수호한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해서 패소해온 일제 강점기의 피해자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한 판결이기도 하다. 우리 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현소혜 교수는 “국내 법원이 외교 문제를 넘어 국민의 권리를 우선시한 판결”이라며 본 사건의 의의를 전했다. 물론 1심 판결 후 후지코시 측이 항소를 제기한 상황이지만 종전의 미쓰비시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봤을 때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승소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미쓰비시나 후지코시가 *확정판결 이후 배상을 하지 않을 경우 해당 법인의 국내 혹은 해외 자산에 대해 *강제집행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법원의 판결과 일본의 판결이 정면으로 부딪치기 때문에 일본 자산에 대해 강제적으로 집행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국내 혹은 제3국에 존재하는 재산을 강제집행해야 하는데, 이 경우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가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배상하는 것이 가장 원만한 문제 해결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기업들이 배상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 이를 기대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국내 법원에서 승소했지만, 현실적으로 배상이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소송을 맡은 장완익 변호사는 “한국과 후지코시가 합작한 회사가 있어 국내에서 강제집행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향후 대법원에서 후지코시가 패소하는 경우에도 끝까지 이행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강제집행 가능 여부에 대해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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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시효=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사실상태가 일정기간 계속된 경우에 그 권리의 소멸을 인정하는 제도.
◇확정판결=보통의 방법으론 취소 ·변경이 허용되지 않는 판결.
◇강제집행=국가권력이 강제적으로 의무이행을 실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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