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사진부 (webmaster@skkuw.com)

 도심을 벗어나 휴양림을 찾아가야만 여유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학교 후문을 통해 와룡공원으로 올라가면 가까운 곳에서 다양한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우러지는 서울 성곽길을 걸을 수 있다. 이른 여름이 온 것처럼 무더운 오늘, 기자는 직접 서울 성곽길을 걸었다. 기자가 걸은 코스는 혜화문에서 창의문까지의 백악산의 능선을 따라 걷는 코스로 숲이 우거져 있고 성곽 복원이 잘 되어있었다. 서울 성곽길을 걷는 시간은 주변과 교감하고 낯선 자연과 친해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며 주위를 둘러보면 서울을 발밑에 둔 느낌이 든다. 성곽길의 많은 곳을 내려다봤지만 어디에도 같은 풍경은 없었다. 서울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꾸며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다. 이 코스를 걸으려면 꼭 준비해야할 것이 하나 있는데 신분증이다. 말바위 쉼터부터 창의문까지는 군부대가 밀집되어 있어 신분 확인 후 패찰을 달고 걸어 가야한다.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잘 보존되어 있는 구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있고 성곽길이 있는 만큼 때로는 숨이 찰 수도 있고 지치기도 한다. 하지만 성곽길은 경주하듯 걷는 길이 아니다. 여유를 갖고 서울의 역사와 성곽이 지닌 가치를 느끼는 것이 서울성곽을 걷는 진정한 이유이다.

일러스트┃강도희 전문기자 webmaster@

 

 

낙산공원
낙산공원은 서울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자연을 느끼는 공간이다. 혜화역 2번 출구 쪽에 위치한 마로니에 공원에는 낙산공원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다. 서울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낙산공원의 경관과 시원한 바람은 학업 등의 걱정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학우들을 위한 자연의 위로인 듯하다. 기자는 낙산공원에서 서울 성곽 너머로 보이는 대도시를 바라보며, 보존과 발전의 공존을 떠올렸다. 낙산공원의 끝에는 우리나라 보물 1호인 서울 동대문 등이 있어, 낙산공원의 서울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수연산방 
와룡공원에서 혜화문쪽으로 서울 성곽을 걷다 보면 수연산방을 발견할 수 있다. 수연산방은 <황진이>, <달밤> 등의 작품을 쓴 이태준이 살던 집이며, 현재 서울시 민속자료 11호로 등록되어 있다.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다른 고택과 달리 수연산방에 가면 직접 차를 즐길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인지, 기자가 수연산방을 방문했을 당시 적지 않은 외국인이 있었다.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현대가요는 수연산방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울렸다. 기자가 수연산방에서 마신 쌍화차는 서울 성곽을 걸으며 쌓인 피로를 풀기에 충분했다.

 

 

독립문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개선문을 닮은 문 하나, 독립문이다. 주변의 서대문형무소와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동상을 보고 일제강점기에 지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 지어졌다. 청과 러시아, 일제의 압박을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지어진 독립문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정신을 간직한 채 서있다. 독립문을 보면서 서대문독립공원을 걷다보면 오랫동안 외세에 시달렸던 선조들의 아픔과 조국독립의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장충단 공원
현재 남산 동북쪽에 위치한 장충단 공원은 역사적 의의와 항일운동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다. 고종황제는 을미사변 때 순직한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우리나라의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은 1919년 장충단을 공원으로 만들었지만, 광복 이후 일제가 세운 건물은 모두 철거되었다. 장충단공원에서 세종 때 만들어진 수표교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의 상징인 파리장서비 등을 보며 서울 성곽을 걷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
 

 

 수표교
장충단공원에서 처음 마주한 것은 조선 세종 때 설치한 돌다리인 수표교였다.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지금의 위치인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했다. 수표교는 청계천에 흐르는 수량을 측정하고 물의 깊이를 재는데 사용됐다고 한다. 기자는 수표교 돌다리에서 일정한 간격에 따라 4개의 홈이 파여 있는 흔적을 발견했다. 수표교에는 장마철 홍수로 인한 피해를 막고 자연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파리장서비
장충단 공원을 걷다보면 눈길을 끄는 비석, 파리장서비를 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유림대표 137명이 모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는데, 이를 파리장서라고 부른다. 파리장서는 일본의 식민 통치가 부당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독립에 대한 열망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계기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파리장서를 가지고 해외로 파견되었던 인물은 김창숙이며, 당시 그는 유림 중심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파리장서비를 통해 김창숙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의 애국심을 되새길 수 있었다.

 

 

옛 러시아 공사관 
‘이런 곳에 옛 러시아 공사관이?’라는 생각을 하며 찾아간 곳에는 하얗게 색칠된 탑 하나만이 우뚝 서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지금은 대부분이 무너졌지만, 건축 당시만 해도 러시아 공사관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이는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 고층 건물들 사이에서 외롭게 서 있는 탑의 모습에서 당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의 불안과 열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고종의 고민이 느껴졌다.



성대신문 사진부

이호정 기자 sonamuda@skkuw.com
박희철 기자 wheel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