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소연 기자 (ery347@skkuw.com)

자동차 사고에서 탑승자를 보호해주는 안전벨트. 그러나 이 안전벨트가 모두에게 동등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웨덴의 국립 도로교통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안전벨트를 매고 주행 도중 사고를 당할 경우 여성의 부상 위험이 남성보다 더 크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일까? 그 답은 ‘젠더혁신’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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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혁신, 이전의 과학기술을 돌아볼 때
과학기술은 합리적이며 젠더중립적인 분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과학 △기술 △의학 관련 분야의 지식을 창출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젠더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2005년 론다 슈빙어 스탠퍼드대 석좌교수가 만든 용어인 ‘젠더혁신’은 바로 이러한 관점을 반영한다. 젠더혁신이란 성·젠더 분석을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여 새로운 지식을 만들고 혁신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이다.
젠더혁신이 등장하게 된 것은 연구 과정에서 젠더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제품들이 부작용을 일으키면서부터이다. 신경과학자인 콜롬비아 대학의 라에 실버 박사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0년 사이에 부작용으로 인해 퇴출당한 10개 약물 중 8개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위협적이었다. 이에 신약 개발 과정에서 실험동물의 성별 차이가 고려되지 않았고, 암컷 실험동물을 대상으로 약물의 안전성을 적절하게 검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뒤따랐다. 자동차 충돌실험에 사용하는 인체모형인 ‘더미’ 역시 교통사고 발생 시 여성의 부상 위험이 더 크게 나타난 원인으로 추정됐다. ‘더미’가 남성의 신체 데이터를 토대로 제작되면서 여성은 상대적으로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졌다. 스웨덴 국립 도로교통연구소에 따르면 실제로 여성이 부상당할 확률은 남성보다 47% 더 높다. 이러한 부작용은 과학기술에서도 젠더차이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젠더혁신의 필요성으로 이어졌다.

‘젠더혁신’에서 ‘통합적 혁신’으로
젠더혁신은 남녀의 성차를 반영한 연구를 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 만큼 여성만을 위한 개념이 아니라 양성 모두를 위한 혁신이다. 연구 과정에서 여성이 배제됐던 경우도 있지만, 남성이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던 사례도 존재한다. 골다공증은 흔히 폐경기 여성에게 발병 위험이 크다고 알려졌지만, 미국과 유럽의 골다공증성 골절 환자 3분의 1이 넘는 환자는 남성이었다. 또한, 골절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여성형 질환이라는 편견 때문에 1997년에 남성 표본이 마련되기 전까지 골다공증 골밀도 판단 기준은 여성을 표준으로 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남녀 모두를 위한 연구 혁신을 위해 젠더 혁신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젠더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성·젠더의 개념이 너무 부각되면 인종·환경 등 다른 요인이 연구에서 제외될 수도 있으며, 젠더의 개념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젠더혁신’을 넘어선 ‘통합적 혁신’ 또한 강조되고 있다. 진정한 혁신을 위해서는 성별뿐 아니라 지역과 인종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의 편견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서의 지역적 차이로 인해 젠더혁신의 양상 또한 달라지면서 이제는 통합적 혁신의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다.

작년 8월, 서울에서 열린 '2015 아시아태평양 젠더서밋'.

젠더서밋, 논의의 지평을 넓히다
과학기술은 객관적·보편적 지식을 도출하고자 하므로 젠더분석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객관성의 확보가 어렵고 사회적 비용이 야기될 수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 선진국에서는 일찍부터 연구 혁신을 위해 젠더 요소를 고려할 것을 강조해왔다. 미국의 심장학 관련 저널들은 2010년에 투고지침을 개정해 임상연구 결과 보고 시 젠더 영향 보고를 의무화했다. 또한, 미국 국립보건원은 연구에 사용되는 동물의 성비를 맞춰야 한다는 규정을 추가했다. 유럽연합도 2001년부터 다양한 젠더 혁신 방안을 구축했다. 또한, 연구비 지원 시 젠더 요소를 고려하도록 의무화했다. 2011년에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서 연구 분야에 젠더를 접목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젠더, 과학 및 기술에 대한 UN 결의안이 통과되고 미국국립과학재단 또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젠더서밋’ 또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젠더서밋은 젠더 결함이 없는 연구를 통한 과학기술혁신을 목적으로 2011년부터 매해 열리는 행사이다. 유럽에서 처음 열리기 시작해 2013년에는 북미지역, 지난해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확산됐다. 지난해 열린 ‘아태젠더서밋’은 국내에서 개최돼 선진국에 비해 걸음마 수준이던 국내 젠더 논의의 시발점이 됐다. 32개국의 500명 이상의 연구자와 젠더전문가 등이 모여 성별 다양성을 고려한 과학기술 정책과 연구 네트워크 구축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자리 잡기 위해서는 제반 여건 마련돼야
젠더혁신의 개념과 필요성은 국내외에서 점차 확산되고 있지만, 젠더혁신이 실제로 연구 분야에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여러 제반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아태젠더서밋 공동 주최자인 이혜숙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전) 소장에 따르면△연구 지원 정책 △연구 발표 △학부 교육 등의 분야에서 제도적인 뒷받침이 뒤따라야 한다. 연구 과정에서 남녀를 모두 고려하려면 실험해야 할 경우의 수가 더 많아지는데, 이는 연구비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 하에서는 세심하게 고려되기 어렵다. 또한 이 소장은 “국내와 달리 외국의 경우 젠더 분석과정을 명시하거나, 젠더 분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도록 요구하는 학술지들이 30여 곳 존재한다”라며 “젠더를 고려하지 않고 연구해왔던 관행을 바꾸기 위해서는 논문에 젠더 분석을 포함하도록 학술지 차원에서 권고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자연과학 및 공학 분야에서 젠더차이를 반영하는 시각을 가지도록 교육하는 것 또한 제반 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소장은 “학생들이 (젠더 차이 등을 고려하는) 새로운 시각을 가진다면 가치창출과 시장기회로 이어질 것”이라며 학부 교육에서 새로운 관점의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사도우미

◇젠더=사회적인 의미의 성. 남녀 간의 관계에서 사회적인 평등을 실현시켜야 함을 내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