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범준 편집장 (magic6609@skkuw.com)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비극적 사건들의 피해자는 공통적으로 영유아·여성·노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도 아닌 문명화된 국가에서 이런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 비극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과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한 얘기다.

애덤 모턴이라는 철학자는 잔혹함에 대하여라는 책을 통해, 악인과 보통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며 대부분의 악은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논증한다.
그는 악의 개념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악과 잘못을 구별한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강남역 살인 사건’은 악이다. 가해자 김모 씨는 ‘여성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는 화장실에서 30분가량 여성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범행했다. 그냥 ‘마주치는 아무나’가 아니라 ‘여성 중 아무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진술과 범행 정황을 봤을 때, 여성혐오가 그의 살해 동기였을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 정신과분석의의 말대로 이 사건은 그가 앓고 있던 정신병의 증상이 ‘여성혐오’라는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발현된 것일 수 있다. 모턴에 따르면, 정상적인 인간은 잔혹 행위를 가로막는 심리적 장벽을 갖고 있다. 그는 이 장벽을 어떻게 회피하느냐에 따라 악한 성격을 네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 기준에 의하면 김모 씨는 ‘장벽을 무력화하는 문화적 토양’의 영향을 받은 사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약자에 대한 가혹 행위를 쉽게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의 병적인 심리와 착목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을 제공하거나 혹은 묵인했다는 혐의를 쉽게 던져버릴 수 없다. ‘강남역 화장실녀 사건’과 같은 미디어의 명명(命名)이나 사건의 원인을 피해 여성의 옷차림과 음주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들,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맙시다’라는 근조 화환을 보내는 행위 등에서 드러나는 일각의 인식은 그런 혐의를 더욱 강화한다.

위의 사례가 잔혹한 악의 행위였다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자신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부주의했던 여러 개인의 ‘잘못’이다. 이 ‘잘못’은 위 사례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더 나쁘다. 모턴의 말대로 “상당수의 불행은 증오나 사디즘에 빠진 소수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신중함이나 상상력이 부족한 다수의 행동에서 비롯된다.”

정부는 ‘자기 부처 소관이 아니다’, ‘관련 법규가 미비했다’며 성급히 변명했다는 점에서 신중하지 못했고, 검찰과 언론은 사태의 심각성을 초기에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상상력이 부족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일차적인 가해자였던 옥시만큼이나, 피해를 미리 방지하지 못한 정부, 초동수사에 미흡했던 검찰, 피해자의 절규에 무관심했던 언론의 책임 또한 크다.

우리는 잔혹한 행동을 악이라고 단정하고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행동이 나오게 된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올바른 대처 방법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강남역 살인 사건’을 단순히 한 정신병자의 일탈로만 보는 것은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문제 해결을 위해 제도적 개혁과 의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인간의 ‘잘못’을 초래한 제도의 문제는 역설적으로 제도의 보완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정부는 유해물질 사각지대를 없애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복지부, 환경부, 농식품부, 해수부, 산자부 등으로 갈라진 유해물질 제품 관리를 통합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입법부는 일부 살생물제만 제한적으로 관리대상에 포함해 문제가 되는 ‘화학물질 등록법 및 평가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규들을 재정비해야 한다.

어떤 개인과 사회도 전적으로 악과 무관할 수 없다. 과거의 악을 직시하고 이해하고 기억하면서, 악의 징후에 민감해지자. 또 다른 끔찍한 악을 경험하지 않도록.

 

박범준 편집장
magic6609@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