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더, 램지, 로스에게>
<벤더, 램지, 로스에게>
  • 성대신문
  • 승인 2016.06.11 02:18
  • 호수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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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문학상 소설 부문 최우수작

1
바클리가 사라졌다.

2
중요한 건
아론은 말꼬리를 늘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턱에 괴었던 손을 팔꿈치 아래로 가져가는 동작은, 어딘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의 두터운 이마는 어두침침한 조명을 받아 눈 밑으로 길게 그늘을 드리웠다. 그늘 밑에서 번뜩이는 동공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천하의 짐 모리슨도 대학에서 만든 첫 번째 영화로 D를 받았다는 거야. 가장 큰 꿈은 대개 그런 식으로 종언을 고하지. 터무니 없이 끝나버린다고. 알겠어?
아론은 잔을 들이켰다. 여자도 마찬가지고. 그는 덧붙였다. 여기 퍼트만 씨네 핸드 펌프도 완전히 맛이 가버렸구만. 맥주 맛이 왜이래? 라는 말도 이었다. 바스가 원래 그렇잖아. 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바스는 에일답지 못한 면이 있었다. 펍 한쪽에서 환호성과 탄식이 동시에 들려왔다. 함성을 내지르며 맥주를 쏟았는지 비릿한 보리 향이 진동을 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트라이는 분명 오심이었어.
바클리가 허리를 젖히며 한 숨을 쉬었다. 목덜미에는 아직 진흙이 묻어있었다. 글쎄, 네가 럭에서 다섯 번이나 걸음이 꼬여 넘어지지 않았다면 또 모르지. 결과가 바뀌었을지. 아론은 고개를 기울인 채 턱을 흔들어 보였다. 바클리는 아론의 말소리도 제스처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미동 없이 테이블 모서리를 응시했다. 사실, 아론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공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들다 다섯 번이나 발을 헛디디는 선수가 없었더라면, 결과는 바뀌었을 것이다. 마지막 트라이의 오심 여부와 무관하게.
그런 말도 있잖아, 바클리. 축구는 불량배들이 하는 신사적인 스포츠이고, 럭비는 신사들이 하는 불량스러운 스포츠라는 말. 봐, 누가 봐도 네가 신사는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다 근육 돼지 샌님들과 부딪히기에도 너는 충분히 ‘불량스럽지’ 못하단 말이야. 그렇지? 럭비는 그만 둬. 혹시 알아? 축구공이 너한테 짐 모리슨의 기타가 될 지?
다시 한 번 펍 내부가 함성과 탄식으로 가득 찼다. 바클리는 고개를 두어 번 저은 뒤 잔을 비웠다. 짐 모리슨의 LSD겠지. 그의 읊조림은 펍의 소음에 섞여 묻혔다. 아론은 인상을 찌푸린 채 바클리를 바라봤는데 그의 말을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퍼붓고 있었다. 벌써 닷새쯤 되었나. 그러니까, 비가 아니라 안개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도시를 뒤덮은 희멀건 안개가 날이 갈수록 진해져 갔다.
낸시는 잘 지내?
아론이 화제를 돌렸다. 어, 응 잘 지내지. 어제도 같이 영화를 봤는걸. 그래? 아론은 천천히 입맛을 다시며 눈을 굴렸다. 다음에 보거든 안부나 전해줘. 지난 번에는 실례가 많았다고. 그래, 알겠어. 나는 그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낸시는 내가 아론, 그리고 바클리와 어울려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깊게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난 주말에는 다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아론 녀석이 한 시간 반 동안 집요하게 포유류의 종별 사정시간 따위를 이야기 해대는 바람에 낸시는 밥을 절반도 먹지 못했다. 아론의 표정과 말 하나하나에 바클리는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댔다. 사자가 4초, 4초라니. 그를 바라보던 낸시의 표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아 참 바클리, 내가 알아봤는데, 말도 5초 밖에 안된다더라고. 놀랍지 않냐. 말은… 말이잖아! 그런데도…
쾅.
별안간, 바클리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젠장할, 아론. 그는 내려친 잔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바클리는 완전히 눈이 풀려 있었다.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트라이가 오심이네 어쩌네 하던 녀석이 이렇게 순식간에 망가지다니, 맥주가 아니라 LSD라도 마신 것일까 이 자식.
아론… 헤밍웨이는 말이야…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성기 왜소증을 앓았어. 왜소했다고, 헤밍웨이가…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니…
젠장, 바클리. 대체 뭘 마신거야.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바클리, 성기 왜소증을 앓았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게 병이냐, 앓고 말고 하게? 성기 왜소증에 대한 콤플렉스를 앓았다… 겠지. 그리고 헤밍웨이라니, 헤밍웨이가 무슨 상관이야?
아론은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받았다. 콤플렉스를 앓았다, 역시 말이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한 쪽만 말아 올라간 입꼬리하며 등받이에 기댄 허리의 각도까지, 확실히 어딘가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자세였다. 나도 덩달아 피식 웃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쪽 테이블을 조용히 지켜보던 바텐더도 잔을 닦으며 실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 탓인가?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사실이야. 헤밍웨이가 성기 왜소증을 앓았다는 것은. 그랬기 때문에 그는, 펜으로 남근을 빚어낼 수 있었던 거라고. 문학적 남근을. 단어와 단어를 이어 문장을… 문장에 문장을 더해 문단을… 그건, 거대한 성기인 셈이지. 음경, 거대한 음경. 어쩌면 그는 생물학적으론, 고자였는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아론. 입조심 하라고, 이 친구야.
바클리는 휘청이는 다리를 추스리며 몸을 일으켰다. 헤밍웨이 자녀가 몇인데 고자라니, 어디서 주워 들은 헛소리야. 아론이 따졌지만, 바클리는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는 창 밖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지독한… 안개로군. 묵직한 발을 질질 끌며 바클리는 위태롭게 걸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바클리! 어딜 가는 거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넓직한 등이 하얀 안개와 빗 줄기 너머로 사라졌다..
냅 둬, 멍청하긴 해도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잖아. 다섯 번이면, 오늘은 충분히 넘어졌다고.
아론은 손사래를 쳤다. 그것이
바클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러스트 ┃김수현 기자 skrtn1122@skkuw.com


3
음모야.
아론은 연신, 경찰의 소견에 의해 확신이라도 얻은 양,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음모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꽤 긴 서의 복도를 지나는 동안 아론은 족히 세 종류의 설을 늘어놓았다. 첫 번째 것은, 도시 전체가, 바클리를 납치한 외계인의 집단최면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바클리 자식이 정부의 냉동인간 프로젝트에 차출되었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첫 번째 것과 흡사한 골자를 갖춘 거의 다를 바 없는 이야기로, 차이가 있다면 납치 집단이 영미문인협회이고 납치 동기는 헤밍웨이 모독죄라는 것이었다.
도시는 여전히 바닥부터 피어 오르는 안개에 파묻혀 있었는데, 아론의 음모론이 심해의 고래들처럼 귓가를 부유하는 것은 아무래도 날씨 탓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바클리는, 그래 아론의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바클리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바클리가 모습을 감춘 지 나흘이 되던 날, 우리는 학교의 럭비 경기장을 찾아갔다. 그런 녀석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만난 바도 없다는 대답을 불량한 스포츠를 하는 신사 무리의 대장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얼간이 녀석이 누군지는 몰라도 귀찮게 하지 말아줘. 다음 주부터 지역 예선이 있거든. 바클리를 얼마나 경멸하기에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까. 우리는 우정 어린 응수의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바클리 녀석은 얼간이가 맞는걸. 잠자코 뒤돌아 나오던 아론의 말이었다. 그렇지. 나는 동의했다.
곧장 우리는 바클리의 집으로 향했다. 바클리의 집은 도시의 가장자리, 허름한 경계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매일 지역 일간지를 장식하는 상해, 강간, 절도 사건의 7할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바클리가 호주머니에 언제나 주머니칼을 소지한 채 귀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네크로폴리스가 따로 없군. 이것 좀 봐, 라스. 어떻게 모래가 보라색일 수가 있지? 아무리 해가 가려졌다고 해도 이 동네는 정말… 안개 속에 잠긴 거리를 거닐며 아론은 감탄했다. 왜 바클리 녀석이 럭비만 했다 하면 얻어터지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이렇게 험한 곳에서 보란 듯이 살아남은 녀석이 샌님들의 사교 댄스장 같은 필드 위에선 왜 그 모양인 걸까? 아론은 쉼 없이 투덜댔다. 도시 외곽의 오싹한 기운이 그를 수다쟁이로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영양 상태가 부실해서 그런 것 아닐까? 바클리 녀석, 가난하잖아. 덩치만 산만하지 뼈 속은 텅텅 비어 있을지도 몰라. 항상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시름시름 조는 것도 칼슘 부족 때문이라고. 가만, 여기가 바클리네 주소 아니야? 여긴…
‘아무 것도’ 없는 걸.
바클리의 집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양쪽에 집을 두고 딱 집 한 채 규모의 공간이 비어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 곳엔 보라색 모래로 뒤덮인 공터가 있었다. 밤 사이 신께서 몸소 행차하사 잡초를 뽑듯 검지와 엄지 손가락으로 바클리의 집만 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바클리 녀석이 얼간이라도 그렇지, 잡초 취급을 당했을 리는 없고… 실례합니다. 우리는 바로 옆 이웃집의 초인종을 연거푸 눌러 댔다. 실례합니다만 어르신, 바로 요 옆에 있던 바클리 씨의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정중한 물음이었다. 뭐요? 바클리? 네. 바클리. 제지 공장에 다니는 도날드 바클리 씨의 가족 말이에요. 현관 문에 반쯤 몸을 숨긴 어르신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얼마간 침묵하더니 혀를 끌끌 찼다. 이봐요. 내 이 집에서 70 평생을 살았건만 바클리라는 이름을 들은 바는 없구려. 요 옆에 집이 있었던 적도 없고. 아마도 자네들이 헷갈린 모양이오. 워낙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라… 우리 집 옆에는 예전부터 ‘아무 것도’ 없었다오.

다음 날, 우리는 경찰을 찾아 갔다. 이웃집 노인의 증언을 들은 이후에도 우리는 5시간 가까이 동네를 헤집었으나, 바클리는 찾을 수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은 그 무렵이었다. 마주친 아론의 눈동자에 더 이상 웃음기라곤 없었다. 우리는 실종 신고를 하고 경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경관은 우리의 행색을 조용히 뜯어보았다. 잠깐만 기다리게. 내 행정 자료를 확인해보지. 의심스런 눈총을 거두지 않은 채 경관은 몸을 일으켰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아론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기대인지 확신인지 두려움인지 불신인지 가늠키 힘든 기운이 잔뜩 서려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했다. 경관의 시선이 전적으로 아론에게 머물렀다는데 나는… 낸시를 걸겠다.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야. 아론이 중얼거렸다. 뭐가? 나는 재빨리 되물었다. 허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톱을 물어 뜯으며 아론은 말을 이었다.

사라진 것은 바클리 뿐만이 아니야. 바클리 가족 전원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다고. 그런데 닷새가 지난 아직까지 단 한 차례의 실종신고도 들어오지 않았어. 적어도 내 말은, 바클리 아버지의 직장 동료들, 제지 공장의 근로자들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 말이야.

하지만 이웃 집 노인은 그런 기억 자체가 없다고 했잖아.

바로 그 점이 이상하다는 거지. 바클리만 사라진 게 아니라 바클리에 대한 기억까지 사라져 버렸다는 거야. 아니면 그 노인네가 노망이 났거나. 하지만 경찰에 접수된 신고가 한 건도 없는 것을 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가만 생각해보니 럭비 팀 주장도 바클리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아예 기억을 하지 못했던 것 같고. 그래서 말인데 사실은…

많이들 기다렸지. 벌컥 문이 열리며 경관이 들이 닥쳤다. 경관의 눈은 나갈 때와는 달리 확신으로 가득 차 보였다. 문제를 해결한 듯한 의기 양양함이 표정에서 묻어났다. 그는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늘어놓으며 말을 시작했다.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자네들도 짐작했다시피,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네. 그것은 대체로 행정적이거나 제도적인 문제들이지. 단순히 보고 싶고, 수상하다고 해서 일이 풀리는 것이 아니지. 특히 자네들의 경우는 더 ‘행정적인’ 문제로더군. 이보게, 젊은 친구들. 사라진 사람을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그것은 바로 사라지지 않은 사람을 찾는 일이야. 자, 여기를 보게. 자네들이 말한 그 동네에 바클리라는 인간이 살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네. 자네들이 말한 학교에도 바클리라는 학생이 다녔다는 기록은 없고. 자, 그렇지? 보라고… 여기… 또 여기랑, 여기… 맞지? 있지도 않았던 사람이 어떻게 사라질 수가 있나? 젊은 친구들이 무슨 생각으로 공공기관까지 찾아와서 거짓말을 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또 자네들의 친구가 고약한 장난을 친 거라면 납득할 수 있겠더군. 돌아가거든, 그 친구가 그 동안 정체를 숨겨온 것은 아닌지, 그 점을 파악해 보도록 하게나.

일이

이렇게 되었던 것이다.

경찰서를 벗어나서도 아론은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한 채, 음모론에 살을 붙이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아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래도 경관의 제안보다는 그의 추론이 어딘가 설득력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라스, 듣고 있어? 실종 신고를 하기 전, 네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말이야. 실은 어떤 남자가 사건 접수하는 말을 들었거든. 그 사람 말이 본인이 단골인 그린우드 스트리트의 칵테일 바가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렸다는 거야. 행색이 워낙 미친 사람 같아서 말을 붙이진 못했지만, 중요한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거야, 지금 이 도시의 변화를 지각하고 있는 사람이. 어이, 듣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바클리는… 어디로 간 걸까?

 

4

우리는 수색을 계속했다. 바클리의 흔적을 찾기 위해 시작한 활동은 점차 다른 성과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함께, 때론 각자 도시를 구석구석 누볐다. 뚜렷한 방법과 구체적인 목적 의식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것을 알아냈다. 한 마디로, 이 도시에서는

‘너무 많은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왜, 내가 저번에 얘기한 미친 행색의 남자 있잖아. 우리처럼 ‘낌새를 알아챈 사람’. 그 인간을 어제 발견했어. 말을 붙여보려다가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수상해 뵈서 천천히 따라갔지. 그렇게 이리저리 미행을 하다 보니까 이 인간의 목적지를 알겠더라고. 허드슨 스트리트.

그… 사창가 말이야?

응. 사창가. 그려지는 그림이 뻔해서 이쯤에서 관둘까… 돌아서려다가 길이 얼마 남지도 않았다 싶어 몇 걸음을 더 따라 걸었어. 마침내 그 남자를 쫓아 허드슨 스트리트로 코너를 돌았는데… 놀라지 마, 라스… 사창가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더라고.

통째로?

통째로. 마치 대형 괴수가 휩쓸고 지나간 듯 말이야.

콘돔 하나 남기지 않고?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그렇다면, 그 많은 창녀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아론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며 턱을 쓸었다.

글쎄, 영미문인협회의 소행일지도 모르지. 내 말은, 헤밍웨이가 정말로 음경 왜소증을 앓았다면 말이야.

…말하자면, 그런 식의 대화로 점철된 나날이었다.

한 번은, 여느 때처럼 수색을 마치고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그와 헤어져 돌아서는 길에서 나는 문득, 아론도 바클리처럼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도, 헤밍웨이는 음경 왜소증, 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는가. 그래서였을까, 뒤를 돌아 바라본 아론의 모습은 희뿌연 안개 새로 비치는 노을 빛처럼 아련하여, 왠지 콧잔등이 시큰해오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낸시를 만나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내내 나는 집요하게 사라진 바클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때문인지 낸시는 밥을 절반도 먹지 못했다. 그랬을 뿐만 아니라, 대체 바클리가 누구야? 라고 따지듯이 쏘아 묻기도 했다. 역시. 그녀도 기억하지 못하는 구나.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내 얼굴에 충격을 받았는지, 절반이 넘게 남은 밥을 뒤로 하고 낸시는 벌떡 일어나 떠나버렸다. 정신을 차린 뒤에 그녀를 쫓아가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받질 않았다. 바클리에 이어 낸시도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린 걸까. 물론 낸시는 경우가 다르지만. 다음날, 나는 이 이야기를 아론에게 들려주었다.

낸시가 그랬단 말이지.

아론도 마찬가지로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듯, 마치 지진 발생을 예견한 지질학자라도 되는 양, 말을 이었다.

어제 집에 가보니까 말야.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영, 기분이 허전하더라고. 뭐랄까… 실수로 시베리아 행 급행열차라도 탄 기분이었지.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세상에… 이웃집이 있어야 할 공간이 모조리 황량한 공터로 변해있는 거야. 그 염병할 보라색 모레로 뒤덮인 공터 말이야, 라스. 엄마한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천연덕스럽게 말하더군. 원래 이 동네에는 우리 뿐 이었잖니, 아론.

그런, 시절이었다.

 

5

그날 다시 한번 아론과 나는 미친 행색의 남자를 발견했다. 정처 없이 쏘다니는 몰골이 우리와 흡사해서, 굳이 그 미친 행색이 아니더라도 그를 알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분명 무엇인가 얻는 바가 있을 것으로 믿고 말을 붙이기로 했다. 우리는 그를 근처 술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스스로를 펌블추크라고 소개했다. 펌블추크라… 아론은 들어본 적이 있다는 듯이 이름을 되뇌었다. 혹시 그, ‘근교 시골 마을에 사는 조카 여동생의 양아들이, 대부호의 환심을 사 유학을 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견인하고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 같은 수훈을 인정받아 한 동안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바 있는, 바로 그 미담의 주인공 펌블추크’ 말이에요? 아론의 물음에 펌블추크는 다소 어안이 벙벙한 듯 바보 같은 표정을 짓다가, 그렇다네. 이 몸이 바로 ‘위대한 펌블추크 선생’이라네, 라고 선언이라도 하듯, 스스로를 인정했다. ‘위대한 펌블추크 선생’이라니, 순간적으로 나는 아론과 눈이 마주쳤는데 모르긴 몰라도 뭔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래, 젊은 친구들. 위대한 펌블추크의 무엇이 알고 싶은 겐가?

펌블추크는 여전히 스스로를 위대한 펌블추크라고 자칭했다. 풍선 같은 인간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들어간 바람이 빠질 생각을 안한다는 것.

위대한 펌블추크… 선생님께 저희가 여쭙고 싶은 것은…

아론은 될 수 있는 대로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하지만 실은 애써 터져 나오는 조소를 견디며, 펌블추크에게 정확하고 상세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펌블추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마치 우리가 본인의 위엄이 넘치고 현명한 고견을 여쭙기 위해 저를 찾아왔으며, 따라서 위대한 펌블추크는 언제라도 즉시, 눈앞의 어리석은 젊은이들을 지혜롭고 자비롭게 구원하거나, 매몰차게 퇴짜 놓을 수 있는 권능을 지녔음을 과시하는 듯 한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선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어서, 가령 오른쪽 테이블에 앉은 노부부나 맥주잔을 닦고 있는 가게 주인도 그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민망한 생각뿐이었다.

…해서, 위대한 펌블추크…선생님을 찾아뵙게 된 것이지요.

아론이 말을 마쳤을 때, 펌블추크는 코를 후비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위대한… 선생님, 소리에 도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는 잘 들었네, 애런 군(아론입니다, 아론이 말했다), 자네들의 불쌍한 친구 버물리 군(바클리입니다, 아론이 다시 말했다)의 사정은 아주 딱하게 되었네만, 들어보게, 친구들. 자네들은 이것을 알아야 하네, 세상만사, 그 중에서도 인간사라는 것은, 말하지만, 한마디로 이별의 연속이라네. 나 역시도 숱한 이별을 겪었다네. 사랑했던 여인들, 하늘 같았던 동무들, 최근에는 조카 동생의 양아들이자 내가 대부되는 아이를 먼 도시로 떠나 보냈지. 자네들도 알다시피 이 조그만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감동적인 사건이었지 않나. 허허. 아무튼, 뭐 그렇다는 이야기네. 그대들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아닌가? 흘러간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저 드넓은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나, 위대한 이 펌블추크 선생은 생각한다는 말이네. 이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 세상이란 말인가?

펌블추크는 잇몸을 드러내 보이며 눈을 찡긋하고는, 굉장한 소리를 내며 맥주를 들이마셨다. 단숨에 맥주를 들이킨 뒤, 그는 우렁차게 트림을 했다. 펌블추크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이네, 친구들. 사실 나는 사라진 허드슨 스트리트나, 그린우드 스트리트의 칵테일 바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네.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네 삶이란 그렇고 그런 것이고, 그런 곳에 정념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 곧 젊은이의 태도이고, 나는 아직도, 그리고 아마도, 자네들보다도 훨씬 젊은, 청년 펌블추크란 말이네, 허허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라네. 자네들이 산 맥주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들어두게. 실은 요 근래 사라진 건물들이 있던 자리들이 말이네, 건물과 함께, 토지와 건물에 대한 소유권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네. 이게 무슨 소리냐, 누군가는 빈 공터에 멋대로 이름표를 붙일 수 있고, 조만간 재개발이 시작될 것이라는 이야기지. 어떤가, 친구들? 자네들이라고 해서 그 누군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물론 자네들 같이 젊고 희망찬 어린 친구들이 들어온다고 해서 내가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네. 그저 우리 모두가 야심가로서 동등하게 남자의 그릇을 부딪혀보는 것이지. 어떤가,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가?

다시 펌블추크는 예의 그 굉장한 소리를 내며, 이번에는 내 맥주를 마셔댔다. 나는 아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입을 뻥긋 거리며 욕을 하고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참한 심경이었다. 역겨운 트림소리가 차라리 들을 만 했다. 솟아오르는 욕지거리를 나는 묵직한 비감으로 내리눌렀다. 비극, 이라고 생각했다. 도시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세 사람밖에 없는데, 그 중 하나가 하필이면 저런 인간이라니. 맥주잔을 내려놓는 펌블추크의 손동작은 마치 바클리가 영영 사라졌음을 확정 짓는 비통한 판결처럼 보였다.

 

6

노을이 졌으나 실은 안개에 파묻혀 흐릿한 하늘을 바라보며 강가에 앉아있던 아론과 나는, 도시의 명물 허스트 교가 사라졌음을 알아챘지만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론은 퀭한 눈망울로 담배만을 뻐금뻐금 피워댔는데, 마치 담배 연기로 이 도시를 하얗게 물들이는데 일조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바클리는… 어디로 간 걸까?

아론은 말이 없었다.

지난 달에, 바클리 자식이 5파운드를 빌려갔는데… 갚지도 않고,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아론이 담배연기로 도넛을 만들어 보였다. 나는 마른 입술을 빨았다.

있잖아 아론, 요 열흘 사이 너무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아. 변해, 버린 것 같아.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할 게 빤하잖아. 이 염병할 놈의 도시도, 너도, 나도, 바클리도, 그 누구도, 다시는, 제 모습을 되찾지 못할 것이고, 그건 길을 잃은 모두에게 절대 유쾌한 경험은 아니잖아. 미칠 노릇이야. 미칠 노릇인데, 이 엿같은 불쾌감과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두발 뻗고 편히 잠을 청하는 놈들이 있단 말이야. 예컨대 펌블추크 같은 놈들이지. 나는 그런 놈들과 같은 도시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고, 그런 놈들과 나를 한데 가둔 이 희끄무레한 염병 육시럴 놈의 도시를 참을 수가 없어. 그래서 말인데, 나는 바클리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 바클리도 견딜 수가 없어서 떠나버렸던 거야. 견딜 수 없어서 사라져 버린 거라고. 바클리는 먼저 알았던 거지. 이 도시가, 이 하얀 감옥이 얼마나 썩어 있었는지를. 감옥으로 치면 걔네 집은 창살 쪽이잖아.

고개를 돌려보니, 아론은 여전히 담배를 문채 말이 없었다. 그의 손과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런 아론을 보자, 나도 담배를 태우고 싶었다. 나는 떨고 있는 아론의 담배를 빼내서 입에 물었다. 몸 전체가 하얀 연기로 가득 차올랐다. 마치 입 속에 고래라도 한 마리 품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이윽고, 아론이 울먹였다.

 

그날 이후 2주가 흘렀다.

도시의 붕괴는 - 누군가는 그것을 증발, 또는 소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붕괴라고 부르기로 했다 - 이제, 일상이 되었다. 도시의 무너짐은 나의 무너짐과 병행되어 진행되는 평행 사건처럼 느껴졌다.

하얀 안개는 더욱 짙어져만 갔고, 도시는 나병 환자처럼 제 몸을 잃어 갔다. 이제는 도시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면적이 보랏빛 모래로 가득 찬 사막 같은 곳으로 변해버렸다. 2주 동안, 5개의 은행과 3개의 병원, 2개의 사립학교와 1개의 법원, 16개의 펍과, 시청, 교도소, 국립대학과 2개의 교회, 85개의 상가건물과 1253개의 가정집이 사라졌다. 수백, 수천의 경찰과 의사, 간호사, 성직자와 교수, 학생, 그리고 술집주인과 같은 사람들이 함께 사라진 것은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적으로 놀라운 일은, 사라지지 않은 도시의 나머지는 여전히 평소처럼 화목하고,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발 밑이 무너져 내리는 섬에서 사람들은 변함없이 웃거나, 떠들거나, 울거나, 똥을 싸거나, 섹스를 하곤 했다. 지켜보는 나로서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점차 할 말이 없다, 라는 말마저도 잊어갔다. 고통도, 절망도 익숙해지면, 그 뿐이었다. 나는 가끔 아론을 만나 도시 이곳 저곳을 거닐면서 사라진 공간들과 사라진 사람들을 확인해 보기도 했고, 함께 술을 마시며 그들의 사라진 시간들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사라졌고, 또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 아론에게 더 이상 그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세계가 멸망하는데 의미나 동기 따위는, 말하자면 창조주도 상관하지 않을 일이었다. 우리는 단지 붕괴되어가는 도시를 관찰하고 체감할 뿐이었다.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것이 붕괴이든, 증발이든, 소멸이든, 멸망이든, 익숙해지면 그 뿐이었다. 아론은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절망보다 나쁜 것은 절망에 익숙해지는 거야. 우리는, 정말, 이보다 나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엿새 전, 낸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낸시는 오랜만이네, 와 같은 인사말은 하지 않았다. 반면 나는 고장난 카세트처럼 바클리가 사라졌다는 말을 반복했고, 시계바늘소리에 맞추어 캉캉 내지는 왈츠를 추어도 좋을 만큼 긴 시간의 정적 끝에, 낸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라스.

전화가 끊겼고, 나는 두 번 다시 낸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다시 전화 걸기를 일곱 번 반복한 뒤에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법 많은 양의 눈물을 쏟아내고 나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나는 허스트 교를 잃은 도시의 심정이었다. 허스트 교를 잃긴 했지만 벌써 5개의 은행과 3개의 병원, 2개의 사립학교와 1개의 법원, 16개의 펍과, 시청, 교도소, 국립대학과 2개의 교회, 85개의 상가건물과 1253개의 가정집을 잃어버린 나에게는 그마저도, 익숙해지면 그 뿐이었다.

낸시가 그랬단 말이지, 개 같은 년.

아론은 그런 반응을 보였지만, 진심 같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낸시를 개 같은 년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단지 습관적인 언어 반사였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모두 터무니없이 지쳐있었다. 보름이 넘게 진행 중인 고래의 임종을 지켜보는 생물학자들처럼, 나와 아론은 도시의 붕괴를 지루해했다. 모든 감정이 지루함의 수렁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와 아론은 슬픔과 외로움, 절망과 같은 정서들을 모조리 지루함이라는 솥에 넣고 푹푹 끓여낸 스튜로 세끼 식사를 해결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거북하고 구역질이 났다. 모든 것이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우리는 그 끝이 두렵다기보다는, 역겨웠다.

그 같은 역겨움조차 익숙해지면 그 뿐, 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아론으로부터 연락이 끊어졌다.

 

7

아론의 집이 있어야 할 장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마치 아론의 엄마로부터, 여긴 원래 아무것도 없었잖니, 라는 태연한 대답이라도 들은 기분이었다. 한 줌의 검붉은 모래가 흩날렸고,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말 그대로 뭔가가 끝장난 것만 같은 곳의 풍경이었다. 3일 정도 집을 비웠는데, 돌아와 보니 집안 여기저기 차압딱지가 붙어있고, 말라붙은 침 자국 같은 것이 사방에 남아 있고, 성한 물건이라곤 하나도 없고, 그래서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좀 알고 싶은데, 물어볼 사람조차 없고, 도시의 꼴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그랬다. 걷는 내내, 신문지와 통조림 캔 따위가 발에 걸렸다. 발에 무언가 걸려들 때마다, 나는 끝장났다는 느낌을 상기해야 했다. 멈춰 서서 숨을 내쉬었다. 아주 길고, 느리게.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때 이곳이 도시였다는 사실을 추억하며 혀를 끌끌 찰 사람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매일 하얀 안개 속을 헤집고 다녔는데 일주일 동안 겨우 3명 사람을 만났을 뿐이었다. 두 명은 길거리에 나동그라진 시체였고, 나머지 한 명은 고글 같은 것을 파는 노점상이었는데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목이 다 쉬도록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벌써 나흘 전의 일이었다. 나흘 동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기분이란, 나흘 동안 들숨 없이 날숨만으로 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후.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아주 길고, 느리게.

훕.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아론이 있었다. 그를 인식하면서 나는 천천히 반가움이라는 감정을 상기해냈다. 나는 아론에게 어딜 갔었던 것이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아론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는 남은 생 동안 날숨만으로 숨을 쉬려는 사람처럼 길고 느리게 연기를 들이마셨다.

라스, 이 모든 것이 헤밍웨이를 모독한 대가라면, 그 양반은 역시 대문호 가운데 대문호야.

나는 그렇겠지, 라고 말해주었다.

라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 너에게 세계의 운명이 걸려있으니 말이야.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봐 라스, 왜 그때, 내가 했던 이야기 기억해? 바클리가 영미문인협회에 납치를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 말이야. 나도 정말 그럴 줄은 몰랐는데, 믿기 힘들겠지만, 내 말이 맞았어. 이건 모두 놈들의 소행이었던 거야. 하지만 그 발단이 바클리 자식은 아니었어. 바클리가 사라지기 사흘 전, 배리라는 인간이 이런 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지. 디킨스 개자식. 그래, 그 놈이 바로 그린우드스트리트의 칵테일 바 사장이야. 그때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지. 일이 그렇게 된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는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 어림잡아도 족히 300개는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고심 끝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이 세계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좋은 질문이야, 라스. 이제부터가 본론이지. 자, 그들이 최후의 생존자인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어. 너는 그들 중 대표 한 명과 리프팅 대결을 해야 해. 여기 있는 이 공으로 말이야. 네가 그를 이긴다면, 세계는 무사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이대로 모든 게 끝장이야. 물론, 선택은 전적으로 너의 몫이야, 나의 친구, 라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표는, 누가 나오는 거야?

글쎄, 게리 리네커나 바비 찰튼? 어쩌면 조지 베스트가 나올지도 모르지?

베스트가?

세계는 벌써 끝장난 것과 다름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조지 베스트와 리프팅 대결 같은 것을 해서 이길 수가 있다는 말인가. 사실 세계를 위한다면야 리프팅 게임 한 번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비열한 영미문인협회 놈들의 계략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던 대목은, 세계를 구한다니, 내게는 벌써 구해내야 할 세계가 끝장나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 기회라니, 그것은 영미문인협회의 농간이자 교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론, 나는 그냥 기권할래.

아론은, 주먹으로 내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훌륭한 선택이야, 친구. 난 네가 그렇게 할 줄로 믿었어. 알게 뭐야, 문학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아주 길고, 느리게.

 

8

눈을 뜨자마자 나는, 이제 끝났군, 이라는 생각을 했다. 까짓 리프팅 하나 해보질 않아서 세계를 끝장내 버렸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찰튼 경의 정강이 같은 것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렸다. 어차피, 세계도 끝장날 것이었다.

끝이 났다네 나의 아름다운 친구여

끝이 났다네 나의 소중한 친구여

나는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론이 즐겨 듣던 짐 모리슨의 노래였고, 얼굴 위로 떨어지는 것은, 그것은 빗방울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나려 했다. 눈물을 참으려 옆을 돌아봤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헤밍웨이가 누워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놀랍긴 했지만 헤밍웨이와, 처음 뵙겠습니다, 비가 오는군요, 와 같은 인사를 주고받을 기분도 아니어서 개의치 않고, 계속 노래를 불렀다.

눈물을 참으려 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사람이 하나 둘씩 늘어 종국에는 거의 일개 합창단 수준의 규모가 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그 합창단의 구성원 목록이었다. 합류한 순서대로 헤밍웨이의 오른편으로는 레프 톨스토이와 조지 오웰, 앤서니 버지스와 오스카 와일드, 니코스 카잔치키스,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가, 내 왼편으로는 제인 오스틴과 찰스 디킨스, 알베르 카뮈와 스콧 피츠제럴드, 도스토예프스키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곁에 누운 채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막바지로 치닫을 무렵, 뒤늦게 나타난 게리 리네커와 바비 찰튼, 그리고 조지 베스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끝이 났다네 나의 아름다운 친구여

끝이 났다네 나의 소중한 친구여

어디선가 이제 어떡하지, 라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는데, 어떡하긴 이대로 뭐 강낭콩이라도 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자꾸

눈물이 나려 했다.

눈물이, 나려 했다.

박강수(철학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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