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자>
<집에 가자>
  • 성대신문
  • 승인 2016.06.25 12:10
  • 호수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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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문학상 소설 부문 우수작

  어떤 방식으로 가든 전철을 두 번 갈아타는 것이 제일 적게 시간이 걸렸다. 덕소역에서 출발하여 상봉역에서 7호선으로, 태릉입구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 서혁역에서 하차했다. 단지 전철에서만 끝나는 것만도 아니었다. 소리 마을은 서혁역에서도 버스로 10분,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길거리를 걸으며 나름은 번화가인 서혁동의 거리가 순식간에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소리 마을’에, 아니면 ‘소리 3동’에, 어쩌면 ‘소리 뉴타운’에, 사실은 ‘소리 재개발 구역’에 도착했다. 할 일 없는 주말, 3월 20일이었다. 소리 마을을 알게 된 것은 세상의 여러 잔인한 면들에 눈 뜨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읽은 시사지 <한국사회 21>의 782호 표제 기사에서였다. ‘소리의 소리를 들어라’라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표지의 반절을 한껏 채웠다. 그 뒤로는 부서진 동네와 그 동네를 깔아뭉개는 포클레인, 그리고 그 포클레인 앞에서 양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새빨간 노을을 배경으로 검게 물들여져 있는 사진이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게 남는 이 사진은 2013년 12월, 소리 마을에서 결국 재개발이 시작했을 때 찍힌 사진이다. ‘이 달의 보도사진 상’같은 상도 타고 몇 매체에서는 ‘올해의 사진’으로 꼽히는 사진이었지만, 그런 점 보다 내가 먼저 느낀 것은 사진에서 풍기는 느낌이었다. 사진은 오히려 현실의 단면보다는 기계들이 점령한 미래 지구의 SF 영화 포스터 같아 호기심을 먼저 일으켰고, 무슨 사진인지 알아차린 이후 말도 못할 안타까움을 불렀다. 그 때부터 소리 마을은 머릿속 한 구석에 남아있었다. 부서진 동네의 어느 모습으로, 혹은 기계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언젠가는 소리 마을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오다가,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소외된 자들에 대한 글쓰기 수업이 있다고 했다. 단박에 소리 마을이 생각나 이참에 마을에 한 번 들려 소리 마을의 모습을 보기로 했다. 벌써 아파트가 들어왔을까, 아직도 폐허일까, 여러 질문들이 떠돌았고 여러 가지 것들이 궁금했다. 소리 마을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싶었다. 그렇게 발길을 소리 마을로 옮겼다.

 
사회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소리 마을의 문제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88년도에 동대문구에서 중랑구가 분리될 때 같이 떨어져나간 서율구의 가장 변두리 마을이 바로 소리 마을, 혹은 소리동이다. 소리 본동과 소리 2동, 소리 3동으로 이뤄진 소리동은 서울 안에서도 지대가 가장 낮은 동네 중에서 하나고, 전쟁 직후 피난민촌으로 만들어진 직후부터 늘 철거의 대상이었다. ‘철거구’라는 오명이 쓰인 서율구에서도 가장 철거가 심한 곳,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본 사진의 배경, 그리고 열흘 전 내가 들린 곳이 바로 소리 마을이다. 전쟁이 막 끝난 1953년, 핏물 들지 않고 간신히 맑게 흐르던 소리천 주위로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이 모여들며 소리 마을이 만들어졌다. 이때의 이름은 ‘솔잎 마을’이었다. 재개발 공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오랜 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킨 소나무를 보고 지어진 이름이다. 기나긴 투쟁의 상징이기도 한 그 나무에서 마을의 모든 것이 시작했다. 재개발과 함께 뽑힐 때까지, 소나무는 마을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셈이다. 이렇게 맑고 푸른 ‘솔잎’이란 이름이 허공에 메아리치는 ‘소리’로 바뀐 이유는 상당히 기이하다. 우선 ‘솔잎 마을’의 불편한 발음이 공공연하게 ‘솔이 마을’로 바뀌었다. 이어 점차 늘어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을을 공식적으로 행정 구역에 편입해야할 필요성이 생겼다. 55년도에 구청에서 온 말단 공무원은 공무보다는 여자와 퇴근에 관심 있었던 자였다. 구석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볼 것이 많은 마을을 눈대중으로 한 시간가량 대강 본 공무원이 땅바닥에 가래침을 탁 뱉고 얼른 돌아가기 전에 물어본 질문이 화근이었다. 아마 시건방진 목소리로 ‘거 마을이 어째 생겨 잡았는지는 제까두고, 이름은 뭡니까?’같이 물었을 테다. 당연하게도 마을 사람들은 ‘솔이 마을’이라고 답하고, 공무원은 마을을 둘러봤을 때처럼 대강 ‘소리 마을’이라고 써내려갔을 것이다. 그렇게 소리 마을이 탄생했다. 큰 소나무가 있는 마을은 졸지에 소리들로 가득 찬 마을이 되었다. 단지 소리 마을이 소리동으로, 소리 본동과 2동과 3동으로, 소리 재정비 촉진 지구로, 소리 재개발 구역으로, 소리 뉴타운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리라는 의미심장한 이름부터 애초에 원했던 이름이 아닌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솔잎 마을이 소리 마을이 된 이후로 마을에는 온갖 소리들이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이후 소리 마을은 끝없는 재개발과 철거에 의해 강제로 뜯어지고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지기를 반복했다. 61년도에 있었던 동대문구 재개발 사업부터 시작해 72년도의 소리천 계획, 85년도 서울 동북부 지역 재건 프로젝트와 99년 새천년 서울 개발 계획까지 거쳤고 결국 12년 소리 뉴타운 개발 사업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4년 뒤, 2015년 봄에 그 곳을 찾아갔다. 소리란 이름이 붙여지고 60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당장에 서혁동에서 마을로 걸어가는 30분 동안에도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곳이 서율구 소리동인지 행복구 낙원동인지, 미아리인지, 답십리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땅바닥에 구겨진 채로 굴러다니는 재개발 안내 쪽지들과 이리저리 버려진 재개발 반대 현수막들이 뒤엉키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 얕은 하수구 냄새와 콘크리트 먼지 냄새가 금세 코 속에 한껏 달라붙어 마스크라도 챙겨오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냄새 때문에 입으로 숨 쉬는 것도 목구멍으로 달려드는 먼지들 때문에 그만두었다. 닫은 입에서는 돌가루와 모래의 맛이 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름이 등을 타고 올라갔다. 바뀐 분위기를 몸이 먼저 성급히 받아들이자 눈도 재빨리 시선에 잡히는 것들을 보여주었다. <한국사회 21>의 표지에서 보던 그 색깔이 보이기 시작했다. 탁한 회색이 발밑에서부터 시작되어 양 옆으로 퍼졌다. 우리들은 집 안에 벽지를 바르지만, 결국에 그것은 회색빛의 벽재들을 가리는 용도일 뿐이다. 벽지들은 너무 쉽게 뜯어졌고, 무너진 집들은 모두 콘크리트의 회색이 벽돌의 적색, 연탄의 검은색, 나무의 갈색을 집어삼킨 색조를 띠고 있었다. 누군가 씹어 뭉갠 것 마냥 부서진 집들의 조각들 사이로 비추는 물건들 또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집에서 보이는 가장 일상적인 가재도구들, 그런 물건들이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공간에 놓일 때의 어색함과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양복, 텔레비전, 냄비, 괘종시계, 누군가의 가족사진, 스티커가 붙은 거울, 밑에 천 조각을 덧 댄 나무 의자, 한쪽이 부서진 플라스틱 서랍장, 새로 산 듯한 구두 상자와 그 안의 구두, 몇 년 전 유행한 어린이 장난감, 까맣게 때 탄 봉제 인형, 90년대식 키보드, 작은 튤립이 그려진 머그잔, 끝부분이 완전히 타버린 형광등, 누군가의 어머니가 손수 무쳤을 나물들이 담긴 반찬통, 아마 신혼부부의 혼수였을 최신형 청소기, 누군가가 오랫동안 타고 다녔을 자전거, 몇 번은 읽은 것처럼 한 장 한 장 헤진 동화책, 어떤 사람이 평생을 아끼며 퉁겼을 전자기타. 수많은 기억들과 시간들이 담긴 물건들이 그렇게 재개발 속으로 묻혀버린 것이다. 마을의 마지막 주민이 된 그들을 바라보자니 등 어스름께에서 소름이 살짝 돋았다 빠르게 온 몸으로 퍼졌다. 멀리서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렸다. 이미 멀리 보이는 소리 3동에서는 아파트가 완공되었다. 아마도 은강 기업에서 만들었을 아파트 외벽에 써진 ‘CLOUD 9’이라는 세련된 필체의 글씨가 소리 마을의 잔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 글씨는 잔해들의 존재조차도 없어지는 장면도 지켜볼 것이다. 나는 마냥 걸었다. 먼지 때문에 생긴 성긴 기침이 막을 새 없이 두어 차례 올라왔다. 발밑에서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먼지 덩어리들이 흙 속에 파묻혀 내가 밟을 때마다 작고 불쾌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2012년까지만 해도 이 흙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며 부서지고 섞이며 새로운 흙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밟아줄 사람 없는 흙들은 잔해와 먼지와 콘크리트와 함께 역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었다.
 
그 흙 위에,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었다. 보통 나무도 아닌, 큰 소나무였다. 실로 거대한해서 중생대 때부터 있었다 해도 믿을 정도로 큰 소나무였다. 외국 어딘가에서 멋지게 자라고 있어야 될 것만 같은 소나무가 뿌리를 잔뜩 드러낸 채로 썩어가고 있었다. 소리 마을이 원래 솔잎 마을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보고 있는 이 소나무가 바로 그 솔잎의 어머니였다. 환히 드러난 뿌리 때문에 나무가 벌거벗겨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힘없이 뻗친 마른 가지들만큼이나 길게 뿌리들이 늘어져 있었다. 마치 두 팔과 두 다리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죽어가는 늙은 거인 할머니를 보는 듯싶었다. 넋 높은 채로 앙상히 썩어가는 나무를 보다가, 내가 왜 소리 마을에 왔는지 떠올랐다. 소리 마을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소리 마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다, 생각하면서 먼저 나무부터 출발하자고 생각했다. 쓰러져 있는 늙은 소나무의 모습을 묘사하며 소리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어 한 바퀴를 빙 돌면서 반대편으로 돌아가는데, 누군가가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고개를 무릎 사이에 푹 숙이고 말라가는 나무에 기댄 모습은 상상 속의 모습 같기도 했지만, 우선은 황량한 잔해만이 남아 있는 마을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아 저도 모르게 ‘아’하고 소리를 냈다. 소리 때문에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은 평범해 보였지만 어딘가 말라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이 약간 충혈된 것 같기도 했다. 상당히 처진 눈매였지만 날카롭다는 기분이 드는 그 눈이 살짝 빛났다. 다가가기가 살짝 꺼려져서 죄송하다고 말하려하는데, 남자는 “기자나 뭐 그런 거, 아니죠?”라고 물어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소리 마을에 대해 쓰려고 왔다고 했다. “작가나, 그런 사람인가요?”라고 되물어 대학생이고 그냥 과제라고 대답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살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대학생이시구나...”라는 구절을 한숨 쉬듯 뱉는 모습이 무언가 슬프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혹시 소리 마을에 살았냐고 물어봤다. 어째 그가 날이 서 있어도 그렇게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남자는 살짝 웃으며 그렇다고 답하고 자신을 주정택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마자 “이 나무, 몇 살까지 산 줄 알아요?”라고 물었다. 처음에는 짧게 끝날 줄 알았고, 무언가 흥미가 들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꺼려지는 기분이 완전히는 풀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달이 뜨는 것을 볼 때 즈음 맘이 살짝 급해지기도 했지만, 그 전까지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이 글은 아마, 주정택이라는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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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무는 소문을 열매로 맺는 나무였다. 사실 오래전 광화문을 지을 때 썼던 금강송이다, 그보다 더 전부터 마을을 지키던 신송이다, 그것도 아니고 사실 70년대에 억울하기 죽은 귀신이 들린 나무다, 그것마저도 아니고 그런 귀신에게서 마을을 지키는 무당 나무다. 소나무여서 열매는 나지 않지만, 아마도 났다면 그런 소문들이 여름마다 주렁주렁 열렸을 것이다. 나도 이 나무가 얼마나 오래된 나무인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이 나무는 확실히 푸르고 곧게 자라고 있었고, 지금은 죽어있다는 것이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것조차 신기할 정도로 멋진 나무였다. 투쟁을 할 때마저도 이 나무를 지키려고 했다. 경찰인지, 용역인지, 건설업자인지 모를 사람들이 잘라내려고 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 때만큼은 막으려고 했다. 실용적으로 보면 나무가 쓰러지면 주위 집들이 무너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고, 감성적으로 보면 그 나무는 우리 마을의 나무였기 때문이다. 집 안이 난장판이 되고, 길거리에 핏자국이 묻어도, 나무만큼은 흠집 하나 나지 않게 했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철거가 진행되면서 결국에 뽑히게 되었다. 거대한 포클레인, 그런 것이 왔다. 두 대나 왔다. 양쪽을 사정없이 부여잡았다. 솔잎 냄새가 훅 불어왔다. 정신이 약간 어지러운 지경이었다. 우리 나무는 정말로 뿌리가 깊은 나무였다. 포크레인 기사들이 기계에 더욱 힘을 주니, 땅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뽑혔다. 무언가 부서지고, 망가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송판 격파를 할 때 나는 소리, 강화 유리를 망치로 내리칠 때 나는 소리가 그렇게 부드러운 흙과 나무에서 들렸다. 나중에 들어보니, 기계 하나가 작업 도중에 망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분명히, 그 소리는 나무와 흙에서 난 소리였다. 그만큼 깊은 나무였다. 지금은 죽어있어도 말이다.
 
1990년 10월 24일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를 낳으시고 일 년 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나를 키우시고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두 분 모두 가셨다. 생각을 많이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쉽진 않았다. 사소한 순간순간마다 튀어나오시는 것을 견디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여러 사건이 있었다. 천천히,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내가 태어난 후로만 따지자면, 이렇게 큰 재개발, 마을 전체를 뒤집어엎는 재개발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 재개발 얘기부터 해야 할텐데,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재개발이 잦았다는 사실만 빼면, 여느 동네와 같아서 관련된 기억은 적다. 다만 조금 못 사는 동네라는 사실만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초등학교 때는 애들을 이끌고 우리 마을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녔다. 애들은 주로 <검정 고무신>에 나오는 데 같다며 우아아아, 했다. 차곡차곡 쌓인 연탄들을 보고 우아아아, 했고 햇빛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길고양이들을 보고 우아아아, 했고 옛날식 게임기를 보고 우아아아 했다. 그런 식이었다. 우리 반에서 우리 동네에 사는 애는 나밖에 없었다. 건욱이라는 남자애랑, 지은이라는 여자애, 이렇게 셋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모든 학년마다 반이 달랐다.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 99년 여름의 기억이 재개발에 대한 내 첫 기억이다. 지구가 망한다, 영국 여왕이 온다, MBC가 이상한 사람들에게 습격당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던 때다.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세히 기억난다. 낡은 선풍기가 덜덜덜 돌아가지만 땀이 옷 밑으로 흐르던, 그렇게 더운 7월이었다. 여름방학하기 이틀 쯤 전이어서, 모두가 놀고 있었다. 나는 아마 엄정화의 페스티벌을 부르면서 여느 때처럼 놀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 누군가가 교실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정택 동네 존나 망한다!”는 외침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이미 목소리의 주인은 가고 없었다. 이어 “양지은 동네 존나 망한다!”와 “노건욱 동네 존나 망한다!”가 연거푸 들렸다. 순식간에 복도가 조용해졌지만, 몇 초 지나지 않고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슬프거나 화나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저 궁금했다. 우선 ‘존나 망하는’ 것이 내가 아니고 하필 우리 동네인지, 목소리의 주인은 누군지, 동네가 ‘존나 망하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인지. 그 때는 그냥 그렇구나, 받아들였지만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애들이 있지 않나. 남이 ‘존나 망하는’ 꼴을 보고 좋아하는 애들. 아마 그런 애들이었을 것이다. 내 주위에 항상 있던 사람들이다. 여하튼 그 날 같은 외침을 들은 건욱과 지은과 그 얘기를 했다. 건욱은 잔뜩 화가 나 있었고, 지은은 울먹거리고 있었다. 나는 상관하지 말라고, 그냥 배배 꼬인 놈이라고 아는 욕 모르는 욕 다 해가면서 애들을 달랬다. 그 애들 얘기를 하자면, 꽤나 어렸을 때부터 함께 다니던 사이였다. 흔히 말하는 동네 삼총사같이 항상 함께 놀았었다. 지금 생각나는 건 건욱이는 항상 마을의 위험한 곳 여기저기 다니다가 다치기가 일쑤였고, 지은이는 잘 웃고 그만큼 잘 울었던 것뿐이다. 초등학교 때도 반은 달랐지만, 같이 등교하고 하교하는 사이였다. 함께 지내던 그 시절마저도 지은이가 중2 때 이사 가고, 건욱이가 체고를 간 후부터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애들과 함께 소리 지른 누군가를 욕하며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에게 그 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원래가 수다스러우신 분이셔서, 내가 무슨 얘기만 하면 어머니 얘기부터 우주 얘기까지 온갖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시던 분이었다. 얘기를 들은 그 날만큼은 말이 적으셨다. 저녁 내내 묵묵히 지내다가 가끔 한숨을 푹 내쉬고, 밤 즈음이 돼서 자라는 말과 함께 들어가셨을 뿐이다. 나는 닫힌 안방 문 사이로 꺼지지도 않고 새어나온 빛을 바라보며 잠들었다. 여름방학하기 하루 전이었던 그 다음날, 난데없이 외할머니 댁인 밀양으로 내려갔다. <집으로>의 유승호인 마냥 잔뜩 심통이 난 채로 내려갔다. 아버지랑 외할머니 쪽이 그저 데면데면한 사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유는 모르고 그저 심심하게 지냈다. 그렇게 2주를 있었나, 유승호보다 더 심통이 나버릴 것만 같은 지경이었다. 매 초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생각만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니, 동네가 ‘존나 망한’ 후였다. 아버지가 팔에 깁스를 하고 밀양에 오셨을 때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는 원래 팔을 많이 쓰시는 분이어서 집에서조차 조심하시는데 굵은 깁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무언가 시렸다. 그렇게 빠져나가고 싶던 밀양이었지만, 자꾸만 외할머니를 돌아봤다. 서울로 올라가고 동네의 모습을 보니, 왜 내가 밀양에 있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 여름 이후,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지만 내 안에 무언가는 멸망한 기분이었다. 애들을 데리고 다니거나 그 전처럼 달래거나 했던 동네 골목대장 같은 성격은 신기하게도 사라졌다. 모두가 나를 ‘존나 망한 동네에 사는 애’라고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다가와도 내 동네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 같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동네에 대한 어떤 부끄러움이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조차도 부끄러워졌다. 애들에게 가끔 이 얘기를 했었다. 건욱이나 지은이나 모두 나도 그렇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모두 그 날 이후 아닌 척하며 다녔지만 마음에 무언가가 들이찼었다. 그 때문에 무언가 쉽사리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들과 만날 수가 없었다. 오직 동네 속에서 어린 날들을 보냈다. 중학교에 간 이후부터에는 애들과 만나는 시간도 줄었다. 지은은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전에 무언가 급한 것처럼 마을을 떠났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 때는 이미 떠난 이후였다. 마지막으로 지은이를 보았을 때가 이사 가기 며칠 전 저녁의 하굣길이었다. “잘 살 수 있는 곳이 있을까?”라고 물어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런 곳은 좀 힘들 거 같은 거 같아.”라고 답했다. 나도 잘은 몰랐다. 모든 것이 그런 것 같은 것 같은 것처럼 애매하기만 했다. 내 애매한 대답을 지은 지은은 또 조용히 있더니 “그냥, 다 필요 없고 잘만 살 수 있는 곳은 없나?”라고 되물었다. 우리는 말없이 하굣길을 걸었고 머리 위에 떠 있던 초승달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이 희미하게 빛을 보내고 있었다. ‘저소득층’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소리의 주인공이 나란 것을 알았고, 그와 동시에 99년 여름의 그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국어 시간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제재 : 철거된 빈민 가정의 삶 / 주제 : 70년대 산업화에 대한 비판 같은 문구들을 쓸 때마다 무언가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영수니, 신애니, 윤호니, 누구니 하는 모든 사람들이 내 안으로 섞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소득 지원, 같은 말이 교실의 모든 애들 앞에서 나올 때마다 무언가가 안쪽에서 쌓여지는 것 같았다. 무상 급식, 그 얘기가 나왔을 때도 걸러내지 않은 말들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입 속에서 내던지던 사람들을 보며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여지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인데, 딱히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즈음에 커다란 장벽 하나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착실하게 쌓아올리던 벽이었다. 우리 마을과 다른 곳을, 나와 다른 사람들을 나누는 거대한 방벽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지는 벽은 기어이 부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믿었다. 나는 이 장벽을 부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체념하며 시간을 보내자 장벽은 더 이상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장벽을 지닌 채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때 아무리 다쳐도 금방금방 회복했던 건욱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체고로 간다고 하면서 떠났다. 겨울 방학 때 만나서 동네를 한 바퀴 돈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 곳 저 곳 잊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동네를 보던 건욱은 “다시 올게.”라고 입을 떼고 “적어도 좋은 모습으로 다시 올게.”라고 말하고 떠났다. 건욱은 떠나기 전에 함께 서 있었던 소나무를 올려다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내가 아는 친구들마저도 동네 너머 어딘가로 떠났다. 높은 장벽 때문에 저 너머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에 동네를 보았다. 동네의 사람들, 아이들, 길과 집들, 나무들을 보았다. 항상 짙게 깔려 있는 퀴퀴한 냄새를 맡았고 마찬가지로 쾨쾨한 습기를 느꼈다. 그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동네를 스쳐지나가는 장면을 보았다. 가난한 동네에 눌러앉는 사람은 없다. 또 다른 가난한 동네로 가거나 더욱 더 가난한 동네로 가거나 그 뿐이다. 동네가 철거되면 선택지는 그렇게 둘 밖에 없는 것이다. 가끔 어떤 집이 부서지는 장면, 혹은 부서지기 직전의 장면이나 직후의 장면을 보았다. 뽀얀 먼지들이 안개마냥 스멀스멀 콘크리트에서 빠져나와 도로를 덮고 있었다. 누군가가 소리 지르거나 울거나 흐느끼고 있었고 때리고 부수는 소리가 그 소리들을 덮고 있었다. 철거되는 소리는 그런 것이다. 소리 마을에 가장 많이 흐르는 소리, 배경 음악 같은 소리였다. 그렇게 가는 거지, 싶었다. 비록 같은 마을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이 허물어져도, 나의 집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내가 간신히 살던 옥탑 방은 어떻게 되든 남아 있었다. 나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내가 쌓아올린 장벽은 우리 마을과 다른 마을을 나누고, 우리 건물과 다른 건물을 나누고, 우리 집과 다른 집을 나눴다. 입시철이 끝나고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지내다가 용산의 사람들이 죽어갈 때에도 그렇게 가는 거지, 속으로 웅얼거렸다. 불 때문에 바알개진 영상 속에서 누군가 여기에 뭐가 있다고 소리쳤다. 콘크리트가 아니라 불과 연기가 사방을 덮고 있었다. 새빨간 불빛 때문에 눈이 아파 고개를 돌리니 불과 사람의 잔상이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장벽에 살짝 금이 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갔다. 마을에서는 이틀에 한 번 씩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다치는 일이 있어도, 흉하게 집터가 남아 있어도 그렇게 마음 쓰지 않았다. 괜찮은 줄 알았다. 2012년에 철거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런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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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길게 서두를 시작하고 잠깐 숨을 가다듬었다. 잠시 동안 조용해졌다. 해는 아파트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무언가가 공사하는 소리가 퉁, 탕, 거리며 들렸다. 자리가 불편해서인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피고 엉덩이를 툭툭 턴 다음에 “어디, 다른 곳으로 갈까요?”하고 물었다. 마을을 좀 더 둘러보고 싶다고 해서, 그는 길이었던 곳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마을의 모습을 보려고 했지만, 마을 입구에서 본 잔해들이 이어질 뿐이었다. 끝없이 무너진 잔해들과 부서진 조각들만 계속되었다. 그에게 갖고 온 생수를 주었다. 꿀꺽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생수를 들이킨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걸어도 잔해와 조각들만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아파트 쪽을 보고 걷고 있자니 CLOUD 9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그 글자 얘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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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UD 9은 영어로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뜻이다. 마을을 허물고 새로 들어온 아파트 단지의 이름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파트 이름처럼 매우 기분이 좋을까?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께 철물점 일을 조금씩 배워 공고를 다니고 졸업 이후 수월하게 가게 일을 도맡았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까 일은 두 배로 진행되었다. 집들에 찾아가서 벽 안에 있는 선들을 뽑고 다시 잇거나, 부품이 많은 가구들을 뜯어고치거나, 누군가 들고 온 물건들을 분해하고 재조립했다. 그렇게 여기저기를 바쁘게 오가는 동안 마을 지리가 몸에 배 어떤 사람이나 집을 보면 물건들이 생각났다. 옆옆집의 귀여운 여고생 네의 전기 시설은 항상 좋지 않았고, 공터에 어느새 지어진 조그마한 공장에는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정육점과 슈퍼는 항상 냉방 장치가 부실했고, 문방구가 있는 골목 전체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전기가 대판 나가는 때가 많았다. 그렇게 3년 정도를 지내니 마을 전체가 눈에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숨겨진 구석이나 멋진 풍경이 보이는 곳들을 볼 수 있었고, 나만의 장소가 되었다. 아버지한테 그렇다고 말씀드리니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며 웃으셨다. 그렇게 나와 아버지의 일상은 마을과 함께 계속되었다. 그 즈음 재개발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어딘가에서 튀어나왔다. 주말마다 회관에서 막걸리를 드시며 바둑을 두고 저녁 늘그막에 오시는 아버지가 어느 날에는 나가신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돌아오신 것이다. 아버지는 일단 회관에 가 있으라 하셨다. 길을 걸으며 저 집은 TV 안테나, 저 집은 낡은 도어락, 저 집은 수도. 어딜 고칠 지 떠올렸다. 마을 회관은 그 어느 곳보다 낡아서 모든 것을 고쳐야할 기분이 드는, 그런 곳이다. 그런 곳에 내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모두가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니 왜인지 장벽의 금이 조금씩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몇 분 후 아버지가 문을 박차고 열면서 재개발? 이라고 물어보듯 외치셨고 나는 그 단어를 입에 담고 중얼거렸다. 항상 어디선가 들었던 단어, 어떻게 흘러가고 튀어나와 발음되는지 아는 단어였지만 어째 중얼거릴 때마다 낯설어졌다. 아버지가 제일 먼저 화를 내셨다. 화를 안 내는 분이 화를 내는 것을 보니 더욱 낯설어졌다. 동네 사람들도 하나 둘 씩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소리 재개발을 검색하니 ‘소리 재개발, 좋은 땅에 입맛 당기네. ‘소리 재개발 분양투자 최고의 선택은?’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화면을 채웠다. 무언가 얄팍하게라도 정보를 얻으려고 인터넷을 조금 돌아다니니 재개발의 정의가 적혀 있었다. 이미 있는 것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다시 개발함. 하지만 재개발 사업자들과 구 관계자들에게 ‘이미 있는 것’은 오직 땅뿐이었다. 그 위에 집들, 길들, 나무들, 사람들, 살림살이들은 이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본 계획 수립, 정비 계획 수립, 정비 구역 지정, 추진위 설립, 조합 설립, 관리 처분 계획, 철거, 분양, 준공 인가, 입주. 재개발이 이뤄지는 단계들을 쳐다보면서 우리 마을은 지금 대체 어디에 서있나 생각했다. 대체 우리 동네를 ‘지정’한 사람들은 누구고, ‘추진위’와 ‘조합’에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고. 어느 날은 동네에 있는 조금 더 큰 집 몇 채가 비었다. 무언가 사고 파려는 사람들이 일 초가 멀다하고 동네를 오갔다. 사람들은 눈앞과 옆에, 밑에 있는 땅과 집과 사람들은 보지 않고 위만 보면서 전망이 좋겠다, 전철역과 멀지 않겠다 떠들었다. 투쟁을 합시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셨다. 2012년 9월의 일이었다. 가끔 길을 걷다 장벽의 무게가 느껴져서 멈춰 서서 나는 한숨을 크게 들이쉬곤 했다. 거리에 무언가가 없어진 것만 같았다. 많은 것들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재개발이라는 말이 거리 곳곳에 퍼진 이후 무언가가 낯설어 보였다. 투명한 재개발이 골목 여기저기에서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투쟁이라고 해서 단박에 마을 사람들이 머리띠를 매고 광장 같은 곳으로 나와 구호를 외친 것은 아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무엇을 할지 몰랐다. 항상 무언가 얘기하기보다는 얘기를 들으며 살아와서, 마을 전체가 이렇게 크게 얘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몇 번의 대규모 철거에서도 마을은 조용히 울고만 있었다. 그런 마을이 처음으로 소리를 내려고 시도하는 것이었다. 철거민 단체 관련 사람들이 와서 이러저러 얘기를 했다. 조금 있으면 용역 업체들이 올 것이고 상상하던 것 이상일 것이라고. 마을에서 간간히 집을 허물 때 일하던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다. 미묘한 표정을 무겁게 안고 작업을 하던 인부들도 있었고, 자신과는 크게 상관없지만 쌍욕을 하면서 집을 내리치는 무리도 있었다. 언제는 그냥 거대한 트럭이 와서 컨테이너로 만든 집을 번쩍, 들기도 했다. ‘용역’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깡패일수도 있지만, 그냥 돈을 버는 사람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을 쪽에서도 후려칠만한 무기니, 저쪽도 힘을 쓰면 우리도 힘을 써야지 하는 이야기들을 했다. 수많은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누가 정말로 맞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용산의 사람들이 생각났다. 용역과 경찰 쪽 사람들의 폭력에 비슷한 방식으로 맞서서 참사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힘을 길러야 한다, 대비를 해야 한다, 고 말하는 모습을 보니 살짝 불안함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마을에는 사람들의 눈매가 무서워졌고 이어 그냥 무언가가 무서워졌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본능과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합쳐진, 절박하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느낌이었다. 건장한 남성들의 무리 몇이 마을을 돌아다닐 때면 사소한 싸움부터 시작해 주먹다짐까지, 종종 그런 싸움들이 일어나곤 했다. 마을 여기저기에 자보와 현수막인지 모를 것들이 붙었다. 가장 크게 보이는 현수막에는 아버지의 글씨로 ‘소리 재개발 개소리 마라’라고 쓰여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어 밖으로 비품을 사러 갈 때마다 보곤 했다. 그 문구도 무언가 머릿속에 남아있다. 아버지의 모습도 살짝 떠올랐다. 잊고 있던 ‘존나 망한 동네’도 다시 수면 위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개소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무엇을 위해서 재개발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싸우는지 헷갈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엇이라도 안 하면 동네가 사라진다는 사실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정한 그 ‘무엇’이 불안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홍대의 어느 음식점이 철거되었을 때는 음악인들, 종교인들, 문학인들, 영화인들, 평범한 사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매일 행사를 하고 축제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굳이 그렇게 잔치를 열지 않아도 충분히 다른 방법을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용산이나 다른 수많은 곳처럼 폭력을 쓰지 않아도, 어쩌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방법’을 생각했던 것이 약간 낭만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을을 지켜냈다면 또 다른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세 달 동안은 그쪽이 무엇을 하니 이쪽이 무엇을 하니 등의 이야기들만 조금씩 오갔다. 잠이 든 사이에 다른 동에서 마찰이 있었다, 어느 집을 부쉈다는 소문 같기만 한 이야기만 들렸다. 재개발과 투쟁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지루한 신경전이 길게 이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생각할 때 떠올리던 투쟁의 모습은 2013년이 들어와서야 시작되었다. 2월 말부터 12월 초까지의 9달. 전혀 짧게 느껴지지 않았던 9달, 280일 동안 투쟁이 이어졌다. 280일을 산부처럼 참고 참아, 우리들은 실패를 낳았다, 성공을 유산한 것 아니라 실패를 낳았다. 우리가 ‘첫날’이라고 부르던 2013년 2월 28일 새벽, 골목에는 가끔 태극기가 찬바람을 맞으며 100년 전의 폭력에 맞선 사람들을 추모하고, 난생 처음으로 학교를 들어가는 아이들부터 학교를 빠져나갈 긴 여정을 준비하는 아이들까지 새 학기를 코 앞에 두고, 누구는 ‘입춘대길’이라고 문에 써 붙여 놓은 날이었다. 그 날 새벽에 마을을 찾아온 것은 봄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었다. 사람 다리로 된 불도저가 땅을 울리며 골목골목 사이로 들어왔다. 느리지만 기어이 돌아가는 오래된 LP같았던 마을의 새벽은 아주 쉽게 산산조각 났다. 잠에 취해 있어서 옥탑 방으로 누군가들의 무리가 올라오는 소리를 처음에는 듣지 못했다. 무언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깨지는 소리가 들릴 때서야 나는 내가 깨지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미 옥탑 방 밖으로 조심스레 몸을 내미는 아버지를 보았다. 파르르 떨리던 아버지의 등은 야생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초식동물의 등 같았다. 바로 밑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의 본능적인 생존감과 사명에서 그 날 선 눈매들이 태어났던 것처럼, 우리 둘도 그 사이에서 정신없이 무언가를 집어 들고 옮겼다. 나는 중요한 물건들을 옥탑 방 어딘가에 쑤셔 놓은 뒤 문과 창문을 잠근 후 덧댔고, 아버지는 옥상 문 앞에 물건들을 쌓아 올리고 굴러다니는 낡은 공구들과 철근을 주워들었다. 영화였다면 긴박한 음악이라도 흘렀겠지만,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가혹하고 진짜같이 느껴졌다. 사실 지금도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일만 같다. 골목골목에서는 싸우는 소리와 부서지는 소리, 고함과 울음소리 같은 것들이 마을을 흥건히 적셨고, 그 마을을 온통 내려다보는 망루 같은 옥탑 방에서 누군가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자니 모든 것이 진짜 같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문은 열어젖혀졌다. 뉴스와 신문에서 익히 봤던 차림새와 생김새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무언가 정신없이 휘두르고, 내던지고, 발길질해댔다. 누가 내 허우적거림에 맞고, 내가 누구의 허우적거림에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실수로 아버지를, 아버지는 실수로 나를 때린 것만 같았다. 분명 우리와 싸우던 서너 명의 그들도 아마 실수로 서로를 때리지 않았을까 싶다. 누군가가 ‘개소리 집어치워!’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저릿한 통증을 느꼈다. 그 날 새벽에게 가장 환하게 떠오르는 기억이자 가장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뻑적지근한 몸의 구석구석을 느끼며 일어났을 때는 이미 삼일절과 주말과 개학일이 지나 있었다. 모든 것이 깨어난다는 경칩이었다. 우선 여름에 따뜻하고, 겨울에 시원한 옥탑 방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느끼자 마음이 살짝 놓였다. 그러나 곧바로 불안해졌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철물점이 있는 밑으로 내려갔다. 온통 망가지고 어질러져 있을 것만 같았던 철물점은 정리되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아버지가 전등을 고치고 계셨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나는 안녕히 주무셨냐고 물었고, 전등을 손보는 그대로 서 계시던 아버지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일어났냐고 하셨다. 어느 아침에나 할 수 있던 말이 다른 어떤 날보다 다른 그 날에 오갔다. 그 인사를 했을 때부터 철거와 투쟁과, 앞으로 닥칠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일상이 돼버렸다. 아버지는 차분하게 내가 등 쪽을 강하게 맞아 목요일 새벽부터 오늘까지 총 닷새를 그렇게 죽은 듯 자는 듯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과, 3월 3일에 두 번째로 일이 터졌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철물점부터 시작해서 마을 곳곳의 건물들이 얼마나 망가지고 또한 우리들이 어떻게든 고쳐야 한다는 사실과 심하게 다친 몇은 병원에 있고, 격렬하게 저항하던 몇은 경찰서로 연행되어 하루나 이틀 동안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잠도 안 주무시고 철물점을 고치고 중요한 물건들을 따로 두셨다는 것도 알았다. 그 모든 것들이 인사 한 번으로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일상이 시작되었다. 온 몸이 찌뿌둥한 채로 대충 정리된 옥탑 방에서 비몽사몽간에 일어나면 몇 시쯤에 용역 철거반이나 경찰들, 조합원들이 마을로 오는 지 들었고, 그에 맞춰 마을을 돌아다니며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들과 함께 기나긴 시간을 보낸 이후에는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여기저기서 보고받았다. 마을 전체가 거대한 군대처럼 변한 것만 같아 일상이 되자 차차 익숙해져 갔다. 그 점이 무서웠다. 우리 건물 2층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퉁퉁한 원 아저씨가 각목을 휘두르는 모습이나, 맞은편 왼쪽 세 번째 집에 최 집사님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무언가를 던져대는 모습, 마을의 고등학생 남자애들이 너나할 것 없이 덤벼대거나 달아나는 모습, 그런 모습들을 보는 것이 아홉 달 동안의 삶이 되었다. 누군가가 다치는 것, 어딘가가 무너지는 것. 처음에는 작은 상처나 깨진 창문 하나에도 걱정하던 마을 사람들이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무뎌지는 모습, 피곤해지는 모습을 보며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싸움에서 진다면 더 힘든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한 명씩 한 명씩 사라졌다. 자고 일어나면 어느 집이 텅 비어있거나, 철거되었거나, 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철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으며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고 끝나고 있었다. 옥탑 방이 있는 건물 벽에는 ‘철거 예정’이라고 쓰여 있었고, 아버지는 사흘마다 한 번씩 누군가가 찢어버린 현수막을 새로 만드셔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이며 중앙 본부 같은 역할을 했던 회관은 아예 유리창 대신에 나무판자를 댔고, 아이들을 가진 집들은 시간이 지나며 마을이 점점 폐허가 되자 황급히 떠났다. 9달 동안 일어난 일들은 단지 그 일이었다. 무언가 엄청난 승리, 엄청난 패배 같은 것은 없었다. 피해는 언제나 우리가 보았다. 단지 그 피해를 적게 보냐, 많이 보냐의 문제였다. 하루는 허벅지랑 등 쪽에 주먹 크기의 조그마한 멍이 든다면, 다른 하루는 어디가 찢어지거나 금이 가거나 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나는 직접적으로 맞서기보다는 마을을 보수하러 다니고 있었다. 정작 보수에는 더욱 소질이 많던 아버지가 가장 앞에서 싸우셨다. 나의 할아버지 때부터 쭉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그러니까 동네의 2세대 사람들이 앞장섰다. 첫째는 그들이 85년도, 72년도, 심지어는 61년도까지의 대규모 재개발과 소규모의 철거를 겪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래도 젊은 사람을 그렇게 맞게 둘 수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 또한 종종 들이닥치는 철거 용역들, 깡패들, 경찰들과 대치했지만, 항상 몽둥이 같은 것을 끝까지 휘두르다가 끌려가고 잡혀가는 것은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심정이 들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시간은 이미 두세 달씩 지나 여름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11살 때 첫 벽돌을 올려놓았던 마음 속의 벽은 누군가가 망치질을 해놓아 무너져 있었다. 상황이 ‘좋다’고 하더라도, 조합원과 토지 소유주, 건물 소유주, 동 관계자, 구 관계자와 쓸모없이 기나길기만 한 이야기를 마치고 온 동장과 마을 측 대표들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소주로 막고 있었고, 맨 앞에서 싸우던 사람들은 경찰서와 병원과 집을 오가며 성한 곳 없는 몸을 추렸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짬을 내 열심히 고칠 곳을 고치고 있었고, 나 또한 아버지가 고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손을 놀렸다. 땀과 쇠 냄새와 기름, 먼지에 덮여 있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 때에는 무언가 바라보는 곳이 있었고, 두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난장판 속에서도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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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봄이 지나갔다고 그가 말했다. 그렇게 봄이 지나갔냐고 되물었다. 그렇게 봄이 지나갔다고 답했다. 다른 계절도 그렇게 지나간다고 작게 말했다. “다만,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왔죠. 원영씨 같은 대학생 분들도 오시고요.” 나는 ‘대학생 분들’이라는 말을 듣고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대학생은 아직도 몇 십 년 전 전태일이 바라보고 동경하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소리 마을의 사람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 해 여름동안 투쟁이 심해졌고, 여기저기서 다른 사람들도 왔다고 했다. 대규모로 사람들이 들어왔던 적도 있다고 들었다. 소리 마을에 소리가 점점 많아졌다. “하여튼... 그렇게 여름이 시작되었어요.” 그렇게 여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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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름이 시작되었다. 여름이 되면서부터 자주 다른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무슨 단체, 무슨 모임, 그런 이름의 사람들이었다. 자주 광장과 거리를 채우는 사람들이었다. 도와주겠다고 했다. “힘을 합쳐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나 “꼭 소리 마을을 지키겠습니다.”같은 말들을 하며 우리 곁으로 왔다. 처음에는 한없이 고마웠고, 죄송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일에 힘을 보태준다는 점이 고마웠고,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일에 참여하게 했다는 점이 죄송했다. 어느 신문, 어느 시사지, 어느 뉴스에서 인터뷰와 취재와 촬영을 하러 왔다. 투쟁이 시작된 지 거의 세 달 만이었던 6월 초순의 일이었다. 동장과 더불어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자주 인터뷰나 취재의 중심이 되었고, 당연히 마을은 비게 되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와서 함께 투쟁에 참여하거나, 마을 정비를 돕거나 했다. 나와는 같은 연배거나 조금 어린 친구들이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욱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겨우 공고를 대충 졸업하고 마을에서 보수나 하던 내 말을 그렇게 많이 들어준 적은 없었다. 대학생이라고 하면 적어도 나보다는 많은 걸, 더 똑똑한 걸 알 텐데, 저기의 기자들이나 무슨 협회의 사람들도 그럴 텐데, 그런 사람들이 이런 마을의 이야기를 듣다는 것이 무언가 이상했다. 그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내 삶과 마을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고, 지금 나의 마음도 말했다. 털어놓을 곳이 없어 부풀기만 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털어놓았다. 그 사람들이 일회성으로 참여하는 사람, 아마 며칠 후 내 이야기를 잊어버릴 사람이더라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소리 마을의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특히 대학생들은 무언가 단호한 결의의 표정을 지을 줄 알았지만 오히려 순한 사람부터 웃긴 사람까지 많은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마을로 찾아왔고, 그 중에서도 자주 마을에 오는 몇과는 나름은 친해지기도 했다. 그들과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또 나와 같은 사람들 곁에 있겠지, 그들이 힘을 합치려 하는 소외된 사람들 곁에 있겠지, 등의 생각을 하면 미묘한 마음들이 겹쳐 지금은 딱히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는 않는다. 결국 그들에게는 집이 있었을 것이니까, 라는 생각을 자주했다. 새벽 1시, 2시까지 집회나 투쟁을 하고 모든 것을 정리할 때도 그들은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며 서울 어딘가로, 아니면 수도권 어딘가로, 한반도 어딘가로, 지구 어딘가로 떠났다. 그들이 갈 집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벽이 쌓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을에 서 있는 채로 그들에게 손짓하며 보낸 뒤 이상하게도 착잡해졌다. 어느 순간 느끼게 된 벽의 무게가 버티기엔 너무 무거워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초여름 한동안은 다양한 곳에서 마을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러 왔다. <한국 사회 21>도 자주 왔었다. 우리 부자도 가끔 인터뷰를 당했다. 어느 특집 기사에 실린 우리의 사진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투쟁’이라는 간결한 제목 밑의 사진에는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있고, 언제 또 마을을 차지하러 올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온 마을이고 사는 마을이다. 이 마을이 아니면, 더 이상 갈 곳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라는 나의 말이 쓰여 있었다. 아버지는 그 부분만을 열심히 읽으시더니 그 날 저녁 어느새 ‘소리의 이야기’라고 쓰인 현수막을 거셨다. 마을의 반의 반 정도는 항상 망가져 있었다. 누군가 찾아오고, 실려 가고, 끌려가는 삶. 무언가 망가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삶은 계속되었다. 8월쯤이 되어가자 꽤나 많이 보이던 기자나 리포터, 작가 같은 사람들도 적어졌다. 도우러 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온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좀 더 급한 사람에게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언가 기분 나쁜 것은 숨길 순 없었다. 날이 더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전체적으로 마을 사람들이 많이 지쳐있던 때다. 아버지는 “그렇게 왔다갔는데 바뀐 게 하나도 없어!” 등의 이야기가 담긴 말을 늘어놓으셨다. 바뀐 것이 없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나마 몇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 것도 넓고 깊은 세상 속에서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리는 여전히 현수막과 포스터, 종이들로 덮여 있었고 잔해와 먼지, 퀴퀴한 냄새는 그대로였다. 오직 소나무만이, 밑 등에 잔뜩 흠이 나고 불에 지져진 소나무만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에 몇 번씩 소나무를 돌아봤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정말로 지친다, 싶을 때는 나무 밑 그늘에 놓인 평상에 누워있었다. 이것만은 절대로 없어지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아버지가 부서져도 만들고 부서져도 만들어놓은 평상이었다.
 
그 평상에서 거의 10년 만에 건욱을 만났다. 공교롭게도 건욱과 내가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누던 곳이었고, 더욱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다친 날도 그 날이었다. 모든 일은 항상 공교롭고 절묘하고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법이었고 2013년 광복절이 그런 공교로움이 가득하던 날이었다. 거리에는 태극기들이 먼지투성이 포장재가 되어있었고, 서울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것 마냥 애국가가 들렸다. 철거대의 이번 작전이 ‘광복절 작전’이라고 부른다고 누군가가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차 장수들이 흔히 하는 방법처럼 용역 철거반들이 애국가를 확성기로 틀어놓았다. 머리 뒤편이 시큰할 정도로 우렁찬 ‘동해물과’와 함께 작전이 시작되었다. 애국가는 1절을 넘어 오랫동안 듣지 않아 까먹었던 2절과 3절과 4절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애국가가 마을을 뒤덮었고, 그 사이에 꽤나 많은 인원들이 마을 여기저기를 항상 그랬던 것처럼 헤집고 다녔다. 이번에는 상당히 깊게 들어왔다. 중간 중간에 ‘나라 망치는 빨갱이 새끼들’과 ‘서율구의 에이즈 덩어리들’, ‘에미 애비 없는 미친놈들’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았다. 곤봉인지 막대기인지 모를 것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괜찮았다. 나 또한 몇 대를 조금 심하게 맞았다. 살짝 아팠다. 머리 어딘가가 조금 찢긴 것 같았다. 괜찮았다. 급하게 달리다 아버지랑 골목에서 만났다. “조금 없어지면, 나무 밑에서 봐”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고개를 끄덕이고 서로 다시 급하게 갈 길을 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마을 여기저기를 고치러 다니며 사람들이 평소에 발견하지 못하는 많은 구석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은 잔해 더미 사이에 숨어 있다가 소리가 잦아드는 것을 보고 소나무 밑으로 갔을 때, 그때만 해도 괜찮았다. 반쯤 부서진 평상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드는 철거반을 봤을 때도 괜찮았다. 그가 헬멧을 올렸을 때, 나는 앞 쪽에서 다가오지 말고 뒤 쪽에서 다가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가가서 알아보고 어색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니면 뒤엉켜 싸우다가 친구인 것을 깨닫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예 건욱은 잔해 뒤에서 고개만 살짝 내미던 나를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보았지만, 말을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둘 다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욱은 담배를 물고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갑옷같이 보이는 보호대 속으로 손을 넣어 살짝 긴장했는데, 낡은 스마트폰을 하나 꺼내들었다. “어, 엄마. 아니, 그냥. 알바. 괜찮아. 아냐. 아냐. 위험한 거. 그냥, 몸 쓰는 거. 공사장 했던 거. 그거랑 비슷해. 돈? 어. 많이 주지. 아, 많이는 아냐. 꽤. 아니, 조금. 어. 어. 알아. 그래도 많아. 어.... 어디서? 아, 그. 그. 우리 살던. 그. 있잖아. 소리. 그. 소리 기억나지? 소리. 소리 마을. 서율구. 어, 거기. 왜, 거기 잠깐 살았었잖아. 대학가기 전까지. 어. 기억 나? 어. 그냥, 어? 요즘... 그 지을 게, 그 많아서. 어, 그, 그렇대. 어. 지금? 쉬다가, 그. 전화하는 거지. 안 위험해. 안 위험해. 괜찮아. 괜찮다고. 어깨? 나은 지가 언젠데. 어. 어. 들어가. 아냐. 어. 당연하지. 당연히 들어가지. 자. 쉬어. 괜찮아. 진짜. 걱정 말고. 어. 먹고 사는 거잖아. 아냐, 아냐. 괜찮지? 괜찮대도. 어. 들어가. 주무세요.” 짧은 단어들로 가득한, 아마 ‘어’와 ‘그’가 반 정도 차지하고 있는 통화였지만 무언가가 마음 속에서 묵직하게 주저앉는 듯싶었다. 통화를 끝내고 남은 담배 연기를 내쉬며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도 기억난다. “하... 이게 다 뭐냐. 살던 데에서. 깡패 짓이나 하고.” 하고 건욱은 내 쪽을 살짝 쳐다본 것만 같았다. 조금씩 차오르는 달에 비친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난다. 다시 몸을 잔해에 숨긴 내 쪽을 지긋이 바라보며 남은 담배를 핀 건욱은 꽁초를 버리며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몇 분 후 저 멀리서 철수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중간 중간에 무언가 걷어차이는 소리가 몇 번 들리고 트럭 몇 대가 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애국가는 멎어있었다. 언제부터 멎어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건욱의 통화가 쩌렁쩌렁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묻혀 나는 그냥 입모양만 본 것일 수도 있다. 그의 한마디를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에 덮여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들이, 얼굴 표정이 또렷하게 기억 남는다. 그날 이후로 용역반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새까만 눈동자가 생각났고, 나는 쉽사리 그들과 뒤엉킬 수 없었다.
 
건욱이 가고난 후의 그 때에는 나를 그렇게 만든 눈동자를 생각하다가, 살짝 졸았다. 집이 무너지고 있을 때 난데없이 쏟아지는 졸음에 취한 난쟁이의 아들 영수처럼 말이다. 어쩌면 모든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졸음이 쏟아졌다. 잠깐 졸다가 잔해와 졸음에서 빠져나와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달이 머리 위를 떠나 점점 추락해도 오시지 않아 아버지를 찾기로 해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마음이 그 때부터 들었다. 다시 사람들이 붐벼 있는 쪽으로 가니 날 찾았다고, 어디 있었냐고, 아버지가 크게 다쳐 실려 갔다는 말을 들었다. 3월부터 5달 동안 아버지는 전방에서 50대의 몸으로 싸우셨는데, 한 번도 입원한 적이 없었다. 돈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심하게 다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다리뼈 쪽이 완전히 박살났다는 것이다. 순간 이전까지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섞여 들어갔다. 조금 더 일찍 아버지를 찾았으면, 졸지만 않았으면, 건욱의 말을 다 듣지 않았으면, 아예 그 때 아버지를 만났을 때 합류했다면. 과거에 대한 수많은 가정과 현재에 아무 힘도 미치지 않는 후회 속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러진 뼈가 낳은 다른 병들 때문에, 아버지는 결국 해가 바뀌고 돌아가셨다. 염증이 심해져서였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셨다고 한다. 하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에서 숨어 있다 발각되어 구타당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마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몇 번이고 세셨을 것이다.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부터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까지. 뇌를 꿰뚫도록 쩌렁쩌렁한 애국가 밑에서 아버지는 의식을 잃으셨을 것이다. 광복절 이후로 9월까지는 병원에서, 집에서 아버지만 돌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처럼 닷새가 지나서야 일어나셨다. 며칠 동안 집에서만 보내셨다. 지팡이가 필요할 듯하다는 의사의 말에 스스로 지팡이를 만드셨다. 굴러다니는 철근에 가죽을 붙여서 만든, 제법 있어 보이는 지팡이였다. 의자에 앉아 지팡이를 만드시는 아버지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어질러진 빈 철물점에 지팡이를 만드는 소리만 울려 펴졌다. 아버지는 지팡이를 들고 투쟁을 계속하셨다. 가끔은 지팡이로 철거반들을 후려치셨다. 그러다가 가끔은 지팡이가 부러졌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다시 지팡이를 만드셨다. 그렇게 지팡이와 함께하시던 아버지는 가끔은 넘어지셨다. 그 때마다 나는 다시 아버지를 일으켜 드렸다. 그렇게 삶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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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소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골목을 잘못 들어가면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어느새 다시 다른 길로, 또 다른 거리로 나오곤 했다. 그렇게 정말 좁은 길부터 덜 좁은 길까지 오가며 마을을 걸었다. 마을에 넓은 길은 없었다. 그가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여전히 잿빛 같은 거리를 둘러보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황과 파랑이 타오르면서 하늘을 채웠다. 공기가 살짝 추워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는 다시 생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야기는 이어졌다. 저 멀리서 쓰러진 소나무의 낡은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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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지나자, 상황은 점점 힘들어졌다. 마을에서 아무도 이해 못할 법조항이나 계약서, 서류, 돈 문제 같은 것이 우리가 왜 재개발을 동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추가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똑같은 투쟁만 계속되자 관심을 가지던 사람들도 뜸해졌다. 아버지가 다치셨을 때 몇 번의 취재만 왔다 갔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트럭에 짐을 싣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철거반들은 그들이 떠난 집을 부수고, 페인트와 스프레이를 뿌리고, 불을 지폈다. 그들의 작업이 끝난 집을 보니 흡사 폭사당한 집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떠난 곳은 떠돌이 동물들이 차지했다. 하루에 한 번씩은 그 동물들의 시체를 봤다. 차에 치이거나, 누군가에게 죽거나, 아니면 스스로 죽은 동물들은 축 늘어져 썩어가고 있었다. 마을은 그렇게 모든 이에게 버려지고 있었다. 땅에서 썩은 냄새가 더 심하게 올라오는 듯 했다. 소나무도 살짝 말라보였다. 여기저기서 질 것 같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소리 뉴타운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건축업자나 부동산 업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마을 구석구석을 다녔다. 그들은 피곤에 빠져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이 살던, 살고 있는 집들을 보지 않았다. 엉망이 된 거리나 건물들도 보지 않았다. 오직 앞과 위만 보았다. 뒤도, 옆도 보지 않고 그들은 돌아다녔다. 이곳에는 뭐가 좋겠네, 여기는 이걸 놓으면 좋겠네. 지금 이 땅을 차지하는 마을은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광복절 이후로 나와 아버지 모두 바뀌어서, 투쟁에는 쉽사리 참여하지 않고 마을 일만 도우며 다녔다. 소리 지르고 이야기하고 뛰어다니고 몸싸움하고 고치느라 모두가 피곤해있었다. 추석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아직까지 남아있던 마을 사람들끼리 모여서 조촐하게 잔치를 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음식들이 쌓였다. 소나무 밑에서 제사 비슷한 의식을 지냈다. 나무 주위에 소주를 뿌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달이 머리 위를 채우고 있었다. 그 때 완전히 차올라 크고 아름다워진 보름달을 보고 제발 끝내달라고 빌었던 것 같았다. 연휴 중에도 철거반들은 마을로 들어왔다. 음식상들이 엎어졌다. 소원이 달에 닿지는 못한 것 같다.
 
그렇게 9월이 지나고 10월도 지났다. 성과는 갈수록 줄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반 쯤 체념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마을을 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지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 한다. 갈 때까지 가버린 투쟁의 끝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체념 아닌 체념이 남아있던 것이다. 이제는 왜 투쟁을 시작했는지, 어떻게 투쟁이 이어지고,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날선 사람들의 절박함은 수많은 폭력 속에서 무뎌지고 무뎌져 가장 중심에 애처롭게 남아있는 절박함이 사람들을 움직였다. 마을 사람들의 상태가 그렇게 자포자기기 되거나 말거나, 한결같은 철거반들은 마을을 때려 부쉈다. 말리는 사람이 적어지자 그들은 더욱 열심히 마을을 부쉈다. 아마 저 사람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저러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욕을 해대는 말결과, 봉을 휘갈기는 손길, 힘껏 차대는 발길에는 우리와 비슷한 절박함이 있었다. 건욱의 통화가 자꾸 떠올랐다. 아버지는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손에는 여러 부품들을 들고 오가셨다. 그래도 고칠 건 고쳐야 된다는 것이 신조셨다. 삐끗해서 넘어지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11월이 되며 날이 점점 추워졌다. 공기처럼 자욱하게 깔린 콘크리트 먼지와 수많은 잔해들과 쓰레기들이 마을 주민들의 자리를 채웠다. 우리가 살던 옥탑 방과 다른 주민이 사는 집 몇 채 만이 그나마 남아 있었다. 마을 회관도 반파된 마당에, 마을의 다른 부분을 지킬 여력이 남아나지 않았다. 천천히 침몰하는 배와 비슷했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은 다 가라앉아가는 배가 좋다고 남아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구명보트를 찾아 탈출하는데, 열심히 물만 파대는 것이다. 어차피 들어오게 될 물을 파대고, 어차피 가라앉을 배를 지키겠다는 모습이었다.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일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자 마을이고 벽이고 뭐고 힘이 빠지고 말았다. 철거반들도 다 끝났는지 적게 오고 있었다. 누군가 말을 하지 않았을 뿐, 기나긴 싸움에서 졌다는 점은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졌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던 것이었다. 마침내 12월이 왔다. 마을 사람들은 수많은 ‘이해관계’로 얽힌 회의에 갔다가 수많은 이해관계를 업고 돌아왔다. 여남은 사람들이 모여 동장의 말을 들었다. “졌습니다.” 450만원이라는 돈이 우리에게 돌아갔다. 부서진 동네에 서서 난 어디서 살아야 하나, 중얼거렸다. 기나길게만 느껴진 9달의 하루하루는 무너지는 마을을 보니 정말 짧게 느껴졌다. 12월 4일이었다. 며칠 뒤 옥탑 방을 철거하러 포클레인 몇 대가 왔다. 기사들 또한 살아남기 위해서 이 포클레인을 모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살아남지 못한 사람이 살아남고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포클레인 앞에 서서 양 팔을 벌렸다. 아마 “기억해주세요!”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탁한 유리 때문에 기사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기계 소리에 내 목소리도 묻혔지만, 계속 기억해달라고, 잊지 말아달라고 소리쳤다. 몇 주 뒤 아버지가 잡지를 하나 가져다 주셨다. 표지에 내가 있었다. 옥탑 방도, 나도, 포클레인도, 마을도 다 역광 때문에 시꺼멓게 보였다. 몸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나머지를 덮고 있었다. 울부짖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 사진이 <한국 사회 21>에 올라갔는지는 모르지만, 오랫동안 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잡지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CLOUD 9’이라는 이름의 아파트 선전은 벌써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 우리 동네가 지형적으로 뛰어난 역세권이란 것을 처음 알았다. 뽑히는 소나무 뒤로 소리 뉴타운이 올라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철물점의 물건과 기계들을 팔며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셨다. 나도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돈을 벌어야만 했다. 다시 살아남아야 했다. 50년을 넘게 이어진 소리 마을은 이제 끝나고 말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계속 살아남아야 했다. 마을이 없어지면 나까지 없어질 것 같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서 마음은 더욱 찢어지고 생활은 갈수록 분주해졌다. 돈과 법과 집과 관련된 일 때문에 12월은 금방 지나갔다. 서울과 경기도를 거의 나누는 곳에 닿아있는 200/20 반지하방을 어렵사리 구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바닥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곰팡이 꽃이 벌레를 달고 꽤나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그 방에서 새해를 맞았다. 아버지의 병세가 그 때 쯤 시작되셔서 이불을 잔뜩 쌓아두시고 누워계셨다. 만히 휴대폰의 시계가 13/12/31/23:59:59에서 14/01/01/00:00:00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바뀐 것은 없었다. 난데없이 나이를 하나씩 더 먹었을 뿐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했다. “세상은 새해 복만으로는 안 되나 보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잠드셨다. 가만히 앉아 시간들을 돌이켰다. 그런 시간은 점점 더 많아졌다. 방을 구하고 짐을 풀고, 9달 동안의 몸과 마음을 풀기 시작하도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돌아가신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다치실 때도, 돌아가실 때도 함께 있지 못했다. 평생을 쌓아온 벽보다도 무겁게 마음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갔다. 아버지와 내가 나눈 마지막 대화가 생각난다. 둘이서 술을 줄곧 먹고 새벽 2시가 되어 겨우 돌아와 이부자리를 폈다. 아버지의 온갖 이야기들과 나의 온갖 이야기들에 빠져 피곤이 쏟아져 눕자마자 눈이 감겼다. 아버지는 갑자기 기억나느냐고 물으셨다. 옥탑 방에서 보던 하늘이 기억나느냐고 물으셨다. 적어도 그 곳에서 하늘은 보였는데 이곳은 하늘마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피곤한데다가 잠이 쏟아지던 찰나여서 네, 네만 반복했다. 마을을 잃어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옥탑 방에 살며 노래도 부르고, 삶도 보내고, 즐거워하고 괴로워했지만, 결국 또 웃으며 다시 꿈을 꾸었다는 말을 하셨다. 그 말에 잠이 깼다. 조금 더 마음을 담아 네, 라고 했다. 올해는 괜찮았으면 좋겠구나. 라고 말하시고 잠이 들으셨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몸을 뒤척이다가 열심히 했는데, 지고 말았네... 잠꼬대를 하셨다. 그 다음 날 아침에 공사판으로 나가며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한 말은 다녀오겠다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작게 “그래”라고 하시고 “몸 조심해라” 말하셨다. 온갖 고생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다녀왔냐는 말을 못 하셨다.
 
내가 들어오기 6시간 쯤 전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2월 21일이었다. 투쟁이 시작된 지 1년에서 한 주가 모자라던 날이었다. 열심히 했는데, 지고 말았네라는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이후는 장례식 때문에 바쁘기 싫어도 바빠졌다. 함께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 장례식에 오셨다. 장례식에서는 울지 않고 반지하방으로 가서 울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울었고 문을 닫고 나오며 그쳤다. 몇 개의 시사지나 철거민 통신이 아버지를 추모했다. 주영배 열사라고 쓰여 있었다. 아버지는 열사가 되셨다. 돌아가신 다음에야 정택이 아빠, 철물 아저씨, 주씨, 주형, 아버지라는 호칭을 벗어나 주영배가 되셨고, 주영배 열사가 되셨다. 그 와중에도 살짝 신기했다. 마음이 아픈 만큼 감사했다. 49재를 마치고 탈상을 하니, 봄이 와 있었다. 봄은 어떻게든 왔다. 탈상한지 며칠 되지 않아 사람들을 태운 거대한 배가 가라앉았다. 여전히 세상은 살아남기 힘들었다. 반지하방을 정리하고 고시촌으로 들어갔다. 누우면 몸에 꼭 맞는 골방이 차라리 나았다. 아픈 한 해였고 나 또한 아픈 한 해를 보냈다. 아버지 일로, 그밖에 수많은 일들로. 주위를 둘러보니 살아남는 것이 미치도록 힘겨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과 무언가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개발이 끝나고 다시금 높이 쌓아올려진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갖갖이 마음들이 솟아 올라왔다. 무언가 탓을 하고 싶었지만, 탓할만한 대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주위의 아픈 사람들, 힘든 사람들이 보여도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몇 달 전의 사람들이 내게 그랬던 걸 고스란히 돌려줄 수가 없었다. 마음을 주는 것도 마음이 있는 사람들만 가능한 일이었다. 막노동을 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늘 고시원에 틀어 박혀 지냈다. 천장을 보거나, 바닥을 느끼거나 하는 식이었다. 마을을 자주 생각했다. 시간을 돌려 수많은 일로 힘겹게 지낸 여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봄, 결국에 지고 말았던 겨울, 자포자기했던 가을, 아버지가 다치시고 건욱을 본 여름을 지나 투쟁이 삶이 되었던 봄, 모든 것이 시작된 그 날로 돌아갔다. 시간을 돌려 전운에 휩싸인 몇 달과 재개발 소식을 들은 어느 날, 그저 살아남고 있었던 수많은 날들로 돌아갔다. 열심히 벽을 쌓던 고등학생 때, 중학생 때. ‘존나 망한 동네’와 밀양의 여름날들, 골목대장이었던 어린 날들, 태어나던 그 때까지로. 시간을 더 돌렸다. 아버지의 삶. 어머니의 삶. 할아버지의 삶. 할머니의 삶. 외할아버지의 삶. 외할머니의 삶. 소리 마을은 솔이 마을로, 솔잎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다 문득, 마을을 다시 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절대로 보러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마을에 다시 가고 싶었다.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밖으로 나섰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그렇게 몸과 마음이 망가진 것처럼 움직일 때가 모두에게 가끔 있을 테다. 작년 가을의 일이었다. 낙엽이 하나 둘씩 빨개지던 때였다.
 
다시 가 보니 흔적도 없었다. 가장 늦게 철거된 본동은 콘크리트와 먼지의 잔해들만 떠돌고 있었다. 소나무가 누운 채로 썩어 가고 있었다. 괜히 왔다, 싶었다. 문득 고개를 들으니 구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파트의 로고였다. 발길은 아파트 쪽으로 향했다. 잘 만들어진 공원, 깨끗한 페인트칠, 새 아파트 특유의 향기가 채우고 있었다. 이곳에 소리 마을이 있었다. 조그마한 점포 가게들과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전봇대들. 수많은 계단과 골목들이 있었다. 사람들, 식물들, 동물들도 있었다. 지금은 단지 아파트들만이 서있을 뿐이다. 문득 한 집에 불이 들어왔다. 일찌감치 입주한 사람이었다. 4층 즈음이어서 얼굴도 살짝 보였다. 혼자 사는 여자였다. 저 사람이 어쩌면 소리 마을이 없어진 후 처음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니 분한 마음인지 궁금한 마음인지 누군지 궁금해졌다. 404호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편물을 확인했다.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다. 404호의 여자에게 온 고지서에는 양지은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쓰여 있었다. 승강기가 띵하고 울리는 소리에 놀라 고지서를 떨어뜨리고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그 여자가 정말로 내가 알던 지은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건욱의 통화를 들었던 것보다는 조금 덜 후회했지만, 조금 더 충격 받았다. 소리 마을에 살던 세 아이 중 하나는 동네를 지키고, 하나는 동네를 부수고, 하나는 새 동네에 들어왔다. 기분이 묘했다. 그날 집에 가자는 생각을 했지만, 고시원에 차마 들어가지 못했다. 길거리를 떠돌다가, 장난처럼 흐르는 한강 다리를 건너 강북과 강남을 오갔다. 새벽 내내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다. 그렇게 걸으며 뭉쳐진 채로 떠도는 기억들과 생각들을 애써 짓눌렀다. 질문들만 머리를 가득 채웠을 뿐이다. 겨울은 그렇게 질문에 쌓여 보냈다. 거의 이틀에 한 번씩 소리 마을로 갔다.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다. 아파트를 지을 것이다 해놓고 부숴놓은 마을에 정작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았다. 죽어가는 소나무에 기대 지냈다. 가끔 공사판에 나가 돈을 벌었다. 나머지 시간은 무얼 할지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할지도 모른 채 거리를 떠돌았다. 해는 다시금 빠르게 바뀌었다. 나는 여전히 서울을 떠돌았다. 내 삶, 내 생각, 내 추억, 내 마음. 그런 것들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 생각하고 잘못은 대체 어디에 있나 생각했다. 사람들, 골목들이 눈에 선했다. 가끔 아파트로 갔다. 지은인지 누군지 모를 여자를 멀리서 보았다. 그것도 한 두 번 하고 그만두었다. 우연히 지은을 만나고 건욱을 만난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이 다 우연처럼 느껴졌다. 어딘가를 붕 떠서 떠도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걷기만 했다. 소나무에 기대어 앉아 생각만 했다. 오늘도 그렇게 잔해만 남은 마을을 떠돌다가, 당신을 만난 것이다. 내 삶은 여기까지다. 어쩌면 당신 때문에 내 삶이 살짝 바뀐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 오랜만이다. 정말 오랜만이다. 들어줘서 고맙다. 정말 고맙다. 당신이 대학생이라고 했다. 아마 막 투쟁이 한창이던 때의 그들 같은 사람일 테다. 쉽게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야기를 잊었다. 그것만 하나 부탁드린다. 어찌되었던,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밤이 늦었다. 이제 집으로 가셔야하지 않나. 얼른 가시는 게 좋을 거 같다. 얼른 집에 가라.
 
*
 
집에 가라는 그의 말을 듣고 놀라 주위를 보니 이미 처음 만났던 그 소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조금씩 노을이 땅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그 모든 것들을 본 것이 꿈만 같았다. 얼마나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들었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를 모조리 녹음하느라 휴대폰 배터리는 거의 방전할 지경에, 용량도 꽉 찰 지경에 이르렀다. 다리도 꽤나 뻐근해졌다. “집에 가셔야죠.” 그가 말했다. 그의 표정은 웃는 듯 우는 듯 미묘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이 이야기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연락해도 되냐 물었다. 그에게 번호를 주었다. 연락하라고 말했다.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죄송하다는 말도 추가했다. 여러 생각들이 들고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쉽사리 나오지가 않았다. 마을을 나오면서 무언가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이 마을에 왔는지 생각하려 했지만 내가 애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수많은 콘크리트와 먼지와 잔해들을 보았다. 뒤를 돌아보니 소나무 가지만이 보였다. 그는 그 뒤편에 아직도 앉아있을까, 아니면 어딘가로 또 발길을 옮겼을까. 궁금했다. 생각을 얻으러 갔다가 이야기를 얻고 돌아왔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와 전철 안에서 그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었다. 77분짜리 이야기였다. 생각이 엉켰다. 잠이 쏟아지니 77분이 지나 이야기는 다시 첫머리로 돌아와 있었다. 집에 돌아온 다음에도, 학교를 다니면서도 생각은 계속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야 하나.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다시 소리 마을로 가볼까, 하다가 말았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는지 생각하니 그 이야기를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 쓰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글로 담으면 나 또한 어떤 생각이 들까. 미칠 것 같은 이 위험한 세계에서 겨우 살아남고 있거나,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껴야 할지 생각했다. 이 글을 쓰면 답 비슷한 것을 얻지 않을까 싶었다. 아직은 내게는 이야기만이 남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이렇게 썼다. 내가 서울특별시 서율구의 소리 마을과 그 곳에 있었던 수많은 삶들, 그리고 주정택이라는 사람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아직도 수많은 질문이 든다. 어쩌면 그 질문은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좀 더 다른 세상, 더 이상의 소리 마을이나 주정택의 삶 같은 이야기가 우리를 덮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이야기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잊지 말라고 전하는 하나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그 메시지를 나의 방식으로 전하는 것뿐이다. 그 뿐이다. 지금도 아파트는 올라가고 있을 것이고, 잔해는 남아 있을 것이고, 주정택은 서울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처럼 떠돌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글을 쓰면서 그들의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서시지 않은 때를 향해 글을 쓰고 있다.

철학 15 나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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