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 청년이수자 '황덕성' 선생

기자명 김수현 기자 (skrtn1122@skkuw.com)

 

ⓒ황성덕 이수자 제공

선인들은 때에 따라 신을 맞춰 신었다. 입궁하는 관료들은 발목을 감싼 목화를, 국상이 났을 땐 하얀 백혜를, 나이가 든 노인은 건강을 염원하는 십장생 수가 놓인 수혜를. 이와 같은 우리의 전통신을 ‘화’와 ‘혜’라고 부른다. 장화처럼 발목이 있는 신을 화라 부르며 운동화처럼 발목이 없는 신을 혜라 한다. 화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에 맞춰 수고스럽고 고된 과정을 거쳐 제작된다. 그러나 현재는 공장에서 쉽게 찍어내는 기성화에 밀려 수요가 많이 줄었다. 다른 전통문화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화혜기술을 전수하려는 젊은이도 부족하다. 하지만 선인들의 삶이 녹아든 화혜를 놓지 않은 한 청년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 청년이수자 ‘황덕성’ 선생. 그는 화혜장 황해봉 장인의 아들로 그 뒤를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 우리의 전통문화기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황덕성 이수자를 만났다.

현재 전통신 시장은 어떠한가.
아무래도 전통신은 한복을 갖추고 신어야 해서 갈수록 수요가 줄어든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정성스럽게 만든 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시는 분도 여전히 계신다. 수요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찾아주시는 분들을 위해 열심히 만들고 있다.

화혜를 만드는 기술을 상품화해보자는 권유, 즉 대량생산방식에 장인의 기술을 접목하자는 제안을 거절했다 들었다.
이 신을 대량생산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건 지금 생산되는 기성화에 지나지 않는다. 전통신이라 할 수 없다. 수고스럽지만 일일이 손으로 제작하는 데 그 가치가 있다. 그리고 많이 찍어내고 판매해 돈을 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 일을 이어받는 이로서 화혜기술이 지닌 가치를 우선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또 6대째 가업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집안 어르신들이 지켜온 가치를 내가 함부로 훼손시키고 싶지 않다.

대략적인 화혜 제작과정에 대해 설명해 달라.
만드는 과정이 72가지나 된다.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도 꼬박 3~4일이 걸린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웃음) 혜의 제작과정을 간단하게 4단계로 추려보자면 첫째로 발등을 감싸는 부분인 신울을 준비하고 둘째로 밑창을 만든다. 셋째로 이 둘을 바느질로 연결한 뒤, 마지막으로 신골을 신 안에 넣어 모양을 바로잡는다.

ⓒ황성덕 이수자 제공

신을 제작할 때 가장 힘든 과정은 무엇인가.
물론 과정 하나하나가 다 중요해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도 하나를 꼽자면 신의 밑창을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정확하게 신의 앞코와 뒤코가 맞아야 한다. 신울과 밑창을 꿰맬 때도 아주 조심스럽다. 직접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작업하는데, 바늘 한 땀이라도 어긋나면 신발 모양이 흐트러진다.
이 일을 하려면 정말로 꼼꼼해야 한다. 신에 무늬를 새기거나 붙일 때도 두 짝에 동일하게 작업해야 한다. 무늬가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모양으로 자리해야만 같은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들었던 신 중 기억에 남는 신과 그 주인이 있는가.
이수자가 되기도 전에 첫째 아이 돌쟁이 신발을 직접 만들었다. 사랑하는 이의 신을 직접 만드는 건 굉장히 기쁜 일이다.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 부모의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아이가 앞으로 걸어갈 인생길이 형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이제 4살이 된 첫째 아이는 벌써 자신도 화혜장이 될 것이라 말한다. 물론 그 마음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지만, 아빠처럼 예쁜 신을 만드는 이가 되겠다고 해주는 마음이 참 고맙다.

ⓒ황성덕 이수자 제공

전통문화기술을 전수하려는 청년이 줄어들고 있다. 부친이신 황해봉 화혜장인도 선생에게 가업을 꼭 이어야 한다고 권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화혜기술을 전수하려 결단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어릴 때부터 항상 보고 자란 일이다. 조금씩 아버지를 도와 간단한 작업을 하기도 했다. 당연한 것처럼 화와 혜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어릴 적엔 막연히 내가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하지만 학창시절을 보낸 뒤, 자연스럽게 일반 직장에 다니게 됐다. 솔직히 전통문화기술을 배우는 길은 생계가 온전히 보장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생계를 위해 이 길을 떠나거나 애초에 배울 엄두조차 내지 못 한다. 아버지 또한 내게 자신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강요하신 적이 없다. 물론 속으론 바라셨을지 모르지만.(웃음)
그런데 누군가는 뒤를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마음속엔 계속 남아있었다. 집안 어르신들이 지켜온 화혜기술의 명맥이 끊겨선 안 된다는 책임감이 말이다. 옛날엔 국상 때 발목이 없는 하얀색의 백혜를 온 백성이 신어야 했다. 명성황후 국상 때도 마찬가지였다. 밀려드는 주문에 온 가족이 고생하며 매달려 백혜를 만들었다고 했다. 때와 일에 맞춰 의미를 담은 신을 만드는 이 일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도 젊은 시절 자신이 아니면 이 기술을 이어갈 사람이 없다는 사명감으로 온 힘을 기울여 전수하셨다. 이제 내가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까지 5대째 이어진 가업을 내가 이어야만 하겠다는, 조상들의 삶이 깃든 화혜기술을 배워 후세까지 전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전수자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는 정식 화혜장 이수자로서 열심히 배우고 있다.

전통문화기술을 전수하는 이로서 겪는 고충과 느끼는 보람이 있는가.
경제적 이익을 기대하기 힘들 뿐 아니라 혼자 하는 작업이라 일을 하다보면 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네 문화를 이어간다는 자부심이 이 생활을 견디게 한다. 옛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는 어르신들이 내가 만든 신을 보고 추억을 떠올리신다. ‘예쁘다’, ‘장하다’는 말 한마디에 새삼 행복해진다. 또 지난해 개봉한 영화 <상의원>에서 배우 유연석의 신을 만든 적이 있다. 영화엔 겨우 몇 초밖에 나오지 않지만 만든 이는 그 짧은 순간에도 자신의 작품을 알아본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쉽게 지나칠지 몰라도 만든 이는 제 주인을 찾아간 신을 보면 뿌듯하다.
 

ⓒ황성덕 이수자 제공

청년 이수자로서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는가.
아무래도 다른 장인분들은 일하는 것에만 집중하신다. 누가 알아봐 달란 것도 아니고 부를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단지 선인들의 삶이 담긴 문화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묵묵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분이 우리네 전통을 알아줬으면 좋겠단 마음이 생기더라. 그래서 블로그를 비롯한 SNS를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활용해도 사람들은 많이 모르더라.(웃음) 그래도 예쁜 화혜 사진을 올리면 간간이 댓글이 달려 뿌듯하다. 나는 젊기 때문에 SNS 활용이 어렵지 않다. 윗세대 장인분들이 하지 못 하는 것을 청년인 내가 지속적으로 해나가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

황덕성 이수자에게 ‘신’은 어떤 의미인가.
너무나 당연하게 내 인생이 되어버렸다. 신을 제작함으로써 우리의 역사를 이어간다는 사명감을 느낀다. 아버지가 예전에 왕이 신던 ‘적석’과 왕후가 신던 ‘청석’을 재현해내셨다. 아버지가 재현해내지 않았으면 그 신은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서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화혜기술을 제대로 전수해 우리의 역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