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오늘 아침 일어나서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것은 요란하게 알람을 울려주던 나의 핸드폰이다. 빨간색 알람 중지 버튼을 누르고 나서 내 손은 곧장 파란색 SNS 애플리케이션 아이콘으로 향한다. 일어나지도 않은 채 한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한참을 엄지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보는 것은 3분 남짓한 동영상들, 주변인들의 근황을 알려주는 사진과 글, 자잘한 세상의 소식들, 그렇지 않으면 이런저런 맛 집 광고들이다. 이를 보는 시간 동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그런 것 없다.
며칠 전 친구들과 영화관에 갔다. 평소의 나는 사소한 것에도 감동을 받아 울기를 잘했다. 그날 보러 갔던 영화도 평점에서 모두 눈물을 흘릴 만큼 슬프고 가슴을 울리는 영화였다. 나는 걱정했다. ‘아, 이것 또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겠구나…’ 그런 걱정은 뒤로 한 채 나는 덤덤하게 극장을 나왔다. 사실 그 120분이 뭐라고,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은커녕 흐름에도 집중을 하지 못했다. 친구가 “마지막에 두 친구가 서로를 이해해주는 부분에서 너무 감동적이지 않았냐…?”하는 말을 듣고 그제야 나는 ‘그 부분에서 그런 감동을 느껴야 하는 거였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이번에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수능을 치고 20살이 되었을 때의 나는, 하루키 소설을 방에 틀어박혀 줄곧 읽었었다. 분위기에, 내용에 심취해 책장이 넘어가는 것을 아까워하던 그 소설을 지금 읽으려고 책을 펼쳤을 때는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하고 다시 덮고 말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책을 집어 읽은 적이 있었고, 몇 시간 동안 책에 빠져있었고, 두 시간이 넘는 영화들을 내리 보며 감동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리를 스마트폰이, SNS가 대신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이어폰을 꽂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핸드폰을 보는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이고 엄지손가락은 액정을 연신 두드리고 있다. 짧은 영상들, 단편적인 글들은 오랜 집중을 요하지도 않고 나의 생각을 이끌어 내지도 못한다. 피식, 하는 잠깐의 웃음을 주고, 밥을 먹는 동안의 심심함을 달래주거나, 혹은 애꿎은 시간들을 죽인다. 요즘의 나도 그곳에 젖어있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나 자신만의 생각, 상상력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문득 그리워졌다. 하루 일과의 사이사이를 채우던 소설책과 주말 오후를 달래주던 영화, 그리고 그것들이 주는 감동에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했던 시간들이 그리워졌다. 이번 주말에는 책장에 꽂혀있던 하루키의 소설을 꺼내 다시 펼쳐 보려 한다.

 

박소윤(사학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