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여행 드로잉 작가 리모 김현길

기자명 유하영 기자 (melon0706@skkuw.com)


 
 

한 청년이 천천히 걸어간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카메라와 드로잉 도구들이 담긴 작은 가방. 납작한 계단 위에 앉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담긴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이윽고 하얀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한다. “사각사각” 40분간의 사각거림 끝에 그의 노트에는 행복 하나가 그려졌다. 만족스럽게 노트를 덮은 그는 또 다른 행복을 담기 위해 사람들 틈을 걸어간다.
티베트 어로 ‘예술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리모’를 필명으로 삼은 김현길 씨는 여행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여행 드로잉 작가다. “여행을 그린다는 것은 하얗게 펼쳐진 지면 위에 나의 여정을 오롯이 던져 넣는 일”이라는 그. 리모 김현길 작가를 만났다.


여행 드로잉 작가라는 직업을 소개해 달라.
여행 드로잉 작가는 사진 대신 그림으로 여행을 기록하는 여행 작가이다. 그림을 통해서 세상이나 사람을 관찰한다는 점에서 주로 사진을 찍는 다른 여행 작가들과는 조금 다르다. 여행 드로잉 작가는 주위에 있는 대상, 풍경들을 더 깊고 천천히 관찰해 느린 시각으로 풀어낸다. 그리고 풀어낸 이야기를 책이나 기고와 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여행 드로잉 작가가 되었다. 그 계기는 무엇이었나.
원래 꿈이 만화가였다. 그래서 중학교 때는 직접 캐릭터와 스토리라인을 만들어 연습장에 열세 권짜리 연재만화를 그렸다. 이 열세 권의 연습장이 각 반에 떠돌아다니곤 했다. 심지어 한 선생님은 열네 번째 권을 찾으시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미술부에 들어가서 입시 미술과는 잘 맞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과감하게 그림 전공을 포기했다. 그렇지만 그림 자체를 포기하진 않았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스스로 뛰어들었다. 학내 자보에도 그림이 필요하면 그려주고, 학생회에서 총학생회 정책들을 웹툰으로 학생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이렇듯 그림으로 소통하는 일을 전공으로 삼지 않았을 뿐,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왔다.
그러나 현실에 순응해서 온 대기업에서의 3년은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일했던 스마트 TV 그래픽 팀에서는 그림이 단순히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재미가 없었다. 회사의 일이 맞지 않았고, 나의 행복과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게 되었다. 원래 좋아했던 그림을 그리겠다는 마음을 먹고 난 뒤, 일을 하면서 동시에 퇴사 이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설계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옷을 벗기 전에 다음에 입을 옷을 많이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 두기 전에, 서울을 그림으로 기록한 책을 출판하신 이장희 일러스트 작가를 두 번 뵙는 등 발로 뛰어 나의 꿈을 구체화시켰다.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항상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만약 일과 내 삶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직장을 가졌다면 여행 드로잉 작가를 하지 않았을 것 같다. 3년간의 직장 생활은 힘든 기억이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리 나쁜 시간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행 드로잉이란 무엇인가
드로잉이란 밀도 있게 열심히 그린 그림부터 흘러가듯 가볍게 스케치한 그림까지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장르다. 그중에서 여행 드로잉은 여행지에서 바로 남기거나 나중에 여행지를 기록한 그림들을 의미한다. 멀리 떠나지 않고 특별한 일상을 그리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여행 드로잉을 할 때는 생략을 통해 빠르게 사물이나 풍경을 표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편이다. 그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여행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 드로잉만 하면 40분 만에 끝내고, 색칠을 하는 경우에도 1시간이 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 아래 그린다.  

유럽여행기를 담은 책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종이 위에 유럽을 담다』 표지.
 ⓒ김현길 작가 제공

유럽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각각의 여행기를 담은 두 권의 책을 냈다. 여행이 어땠는지 말해 달라.
우선 유럽 여행기를 담은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은 퇴사 직후에 간 여행으로,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여행 중에 떠오르는 이미지나 생각이 많았다. 그런 것들을 유럽의 문화 역사 등 도심의 풍경과 함께 버무려서 담아냈다. 유럽여행은 38일로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그 기간 안에 결과물을 내야 했기 때문에 미리 어디를 방문해서 뭘 그릴 지 세세히 계획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지키기 위해서 형태가 어려운 조형물들은 몇 번씩 그려보기도 했고, 섬세한 드로잉보다는 거칠지만 빠른 드로잉을 연습해 갔다. 그렇게 간 유럽에는 나처럼 여행지를 그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베네치아에서는 한 무리의 여대생들이 각자의 도구를 가지고 와서 자신만의 베네치아를 기록하고 있더라. 그 친구들과 서로 그림을 바꿔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두 번째 책 『드로잉 제주』의 배경이 된 제주도에서는 거의 1년 넘게 취재를 하면서 천천히 기록했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지 않았다. 그래서 유럽여행 때처럼 계획을 세밀하게 짜기보다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그렸다. 그리고 제주도가 가지고 있는 치유의 힘을 기록하려고 하다 보니 마을이나 도시보다는 자연 위주로 그리게 되었다.
제주도의 바다들은 느낌이 서로 조금씩 달랐다. 서쪽 바다는 영롱한 느낌이 들고, 동쪽은 고요하고 차분한 느낌, 북쪽은 거칠지만 내륙과 가장 가까운 바다였기에 그리움이 느껴졌다. 제주도 드로잉은 펜보다 연필 드로잉이 많고 연필 위에 수채를 올리는 식으로 화풍이 바뀌었다. 자연을 그릴 때 유럽에서처럼 그림의 선을 강조하거나 흑백으로 그리면 딱딱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베른의 작은 성당>, 그림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빗방울이 떨어져 번졌다.
작가는 이를 ‘베른의 빗방울이 남겨준 색다른 여행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 ⓒ김현길 작가 제공

<제주의 여름 꽃 수국>. 제주의 자연을 부드럽게 담고자 연필과 수채로 그렸다.
 ⓒ김현길 작가 제공

지난달 제주도에서 <드로잉 블루>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 전시회를 열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책은 전체적인 줄거리를 위해서 편집하기 때문에 중간에 빠진 그림들이 많다. 개인전에서는 책에 미처 싣지 못했던 그림들과 가볍게 스케치한 그림들을 전시했고, 여행지를 대표하는 풍경이나 피사체를 그린 몇몇 드로잉들은 액자 속에 넣어 전시했다. 그래서 책을 보셨던 분들에게는 책에 없었던 그림들을 통해 색다른 경험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전시의 형태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책만큼 매력적이라는 생각에 개인 전시를 열게 되었다. 책에는 글과 그림이 함께였다면 전시회는 조금 더 그림에 집중했다.
 
작가의 드로잉 도구들, 오른쪽 위에서 여섯 번째에 있는 스테들러 피그먼트 라이너를 주로 사용한다.
방수가 되기 때문에 위에 수채물감을 올려도 번지지 않아서 기록하기에 좋다.
  ⓒ김현길 작가 제공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궁금하다.
책과 전시 그리고 강의로 만나는 드로잉의 느낌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이 세 가지 활동을 모두 계속할 계획이다. 우선 지난 8월에 다녀왔던 북유럽의 이야기를 담은 드로잉 북과 오는 19일에 열릴 서울 <드로잉 블루>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앞으로도 체력이 되는 한, 매년 한 권 정도는 드로잉 북을 내고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또 지금 문화센터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드로잉 수업을 하고 있는데,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얻었던 생각들을 사람들과 나눈다는 것에서 굉장한 의미를 얻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대학 평생교육원 등 활동 범위를 넓혀 강연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