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민진 기자 (kmjin0320@skkuw.com)

 


‘생활 실험실’, 리빙랩
우리말로 ‘생활 실험실’이란 뜻의 리빙랩(living lab)은 특정 공간 및 지역에서 최종 사용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개방형 혁신 모델이자, 일상생활에서 기술을 시험하는 실험장이다. 대전시에서 시행된 ‘건너유’ 프로젝트는 리빙랩을 통해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례로 손꼽힌다.
대전시 유성 인근의 징검다리인 ‘물고기 다리’는 비가 올 때마다 침수되어 불편을 초래했다.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방안을 탐색하는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하천의 상태를 스마트폰으로 확인할 수 있는 웹서비스를 개발했고 이러한 서비스 운영을 위해, △모바일 웹을 통한 사용자 친화적 인터페이스 개발 △태양광 충전 모듈 개발 △IoT를 이용한 무선 IP 카메라 장착 같은 다양한 기술을 개발·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주부·디자이너 등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였고, 지자체에서도 사업비 일부를 지원하였다. 시민사회가 스스로 조직화를 시도해, 행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리빙랩은 연구자에 한정되었던 기술 개발 현장을 실제 삶으로 끌어내어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혁신활동을 지원하는 특징을 가진다.

‘사회문제 해결형 혁신모델’의 등장과 리빙랩의 확산
리빙랩은 기존 과학 기술연구 과정에서 문제점이 발견되면서 등장하였다. 과거 기술 연구 과정은 경제 발전에 최우선적인 목표를 두었고, 사회통합·환경보전과 같은 사회 문제는 하위 목표로 밀려나 있었다. 하지만 점차 과학계는 △양극화 △기후변화 △저출산 △고령화 같은 수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하는 ‘사회문제 해결형 혁신모델’이 등장하게 된다. 과거 연구 방법과 달리 사회문제 해결형 혁신모델은 사업의 최우선 목표를 경제발전과 사회문제 해결의 양립으로 설정한다. 또한, 과학자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개발 방식에 현장에서 기술을 이용하게 될 사용자가 직접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사회문제 해결과 산업 발전이 함께 동반될 수 있다는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리빙랩은 사회문제 해결형 혁신모델의 한 가지 방안으로 등장하게 된다.
2004년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교수들이 설치한 ‘플레이스 랩(Place lab)’은 리빙랩의 시초로 여겨진다. 플레이스 랩은 신기술·디자인의 실험 대상이 되는 아파트를 선정해 일상생활에서 주거자들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다만, 플레이스 랩은 사용자를 연구에 참여시키기는 했으나, 사용자는 기술의 반응을 살펴볼 수 있는 단순한 관찰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측면이 강했다. 하지만 유럽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리빙랩은 사용자가 적극적인 혁신주체로 기능하는 새로운 의미로 쓰이게 되었고, 유럽 리빙랩 네트워크(ENoLL)의 결성 이후 유럽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현재 리빙랩은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에도 퍼져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시민, 혁신의 주체로 등장하다
리빙랩의 가장 큰 의의는 수동적인 사용자에 머물렀떤 시민사회가 혁신의 주체로서 참여하게 된 점에 있다. 시민사회는 단순히 정책·기술적 원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과 함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그 능력을 활용하게 된다. 이로 인해 기업·공공기관·대학·시민사회 등 기술의 혁신주체들이 동등한 관계를 이룬다.
또한, 리빙랩은 상활현장 자체를 연구의 장으로 삼아 부작용을 미리 방지하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제품의 개발을 돕는다. 한양대학교 성태현 교수가 주도한 야간 작업자의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LED 안전복 리빙랩 사업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연구진들은 연구를 진행하며 뜻밖의 결과를 얻었다. 새 안전복이 기존보다 324g이나 가벼워졌음에도 환경미화원의 44%는 기존 제품보다 무겁다고 호소했는데, 소재의 뻣뻣한 착용감 때문에 무게를 착각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작업복에 부착되는 LED 발광부에 온도가 발생하지 않는데도, 사용자들은 뜨겁다는 의견을 주기도 했다. 피드백이 반영된 안전복은 서울시 성동구와 세종시에 시범보급 됐으며, 내년까지 추가연구가 진행된다. 이렇듯 리빙랩은 ‘과학적 사실’과 실제 사용자의 ‘느낌’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을 좁혀준다.
리빙랩은 지역 문제에 새로운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리빙랩은 연구 성과가 사용자인 주민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주민이 고려하는 사회적 가치가 강하게 반영된다. 또한, 외부조직이 주도하는 혁신활동이 아니라, 지역조직의 내부적 혁신역량에 기반을 둔 혁신모델이기 때문에 지역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스스로 찾아가게 된다.
 
IT 기술과 결합한 리빙랩, 시너지를 내다
리빙랩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리빙랩과 ICT(정보통신 기술)의 융합이 시도되고 있고 그것이 시너지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ICT 인프라가 구축되면 리빙랩에서 중시되는 개발주체 간의 협력적 커뮤니티를 강화할 수 있으며, 지역생활과 ICT 기술이 만나 새로운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 서울시에서 추진한 ‘북촌 오픈 플랫폼’ 사업은 후자의 사례다. 북촌은 수많은 관광객으로 인해 쓰레기 문제를 겪었으며, 관광객 안내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는 사물인터넷 기술을 활용했다. 재활용 쓰레기를 넣으면 북촌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로 교환되는 ‘스마트 쓰레기통’을 도입했고, ‘비콘’과 같은 사물인터넷 기술을 통해 관광객에게 지도서비스를 제공했다. 여기서 주민과 방문객은 테스트대상이자, 동시에 첨단 ICT기술을 체험한 후, 후기나 개선점을 제공하는 실험주체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 리빙랩, 아직은 시작 단계
현재 우리나라에서 리빙랩은 서울, 대전, 담양의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복지·의료·에너지·교통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도입의 움직임을 보이는 추세다. 하지만 리빙랩이 자리 잡은 유럽과 대만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이제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상태다. 성지은 과학기술정책연구위원은 “세계를 선도하는 산업은 발전했지만 삶의 질 수준은 낮아지는 낙수효과의 소멸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리빙랩 제도적 기반 및 인프라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