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형정 기자 (hj01465@skkuw.com)

일러스트 | 유은진 기자 qwertys@

바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친구를 사귀고, 마음을 고백하고, 연락을 자주 할 여유가 없다. 일상생활을 즐기는 것보다 경제적 활동이 더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는 요즘, 대신 관계를 맺어주는 서비스가 있다. 바로 역할·감정대행서비스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과연 내 가족, 내 애인, 내 친구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아래 세가지 사례는 기자가 대행서비스업체의 인터뷰와 이용 후기를 참고하여 각색한 사례입니다.

"결혼식에 함께 갈 친구를 구합니다"
서울에 사는 김민정(가명·30대) 씨는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던 중, 한 메시지를 받고 심란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대학교 때 같은 동아리를 했던 친구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모바일 청첩장을 보낸 것이다. 각자 직장생활로 인해 왕래가 뜸했던 터라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란 것도 잠시, 결혼식에 함께 갈 친구가 없어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대학생 시절 함께 어울리며 놀았던 친구들이 있지만 졸업 후 각자의 직장생활을 하느라 바빠 만나지 못했고 결국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 친구들과 한동안 안부 인사조차 없었기 때문에 갑자기 연락해서 결혼식에 함께 가자고 하기에는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 같아 민망했다. 그래서 민정 씨는 고민 끝에 직장 선배가 예전에 이용했던 역할대행서비스 업체에 문의하기로 결정했다.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대학 동기들에게 근사한 남자친구를 보여 주고 싶었던 민정 씨는 결혼식에 같이 갈 이성 친구대행을 요청했고, 업체에서는 민정 씨의 이성 친구를 연기해 줄 사람을 연결해 주었다.

 

"내 이야기, 듣기만 해줄 친구는 없나요?"
취업준비를 하는 김민수(가명·20대) 씨는 최근 역할대행서비스 업체를 통해 친구대행서비스를 이용했다. 업체에서 나온 사람은 민수 씨 또래였으며 그들은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민수 씨는 졸업 전 취업준비를 위해 대외활동을 하던 중이었다.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친목을 위한 뒤풀이에도 꼬박꼬박 참여했다. 바쁘게 활동하다 보니 원래 가장 친했던 몇몇 친구들과는 연락이 뜸해지는 대신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의 단체 채팅방은 항상 왁자지껄했다. 이렇듯 활발하게 많은 사람을 만나는 민수 씨는 왜 친구대행서비스를 이용한 것일까. 바쁜 일상 속의 만남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날수록 에너지가 소비되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혼자 있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여러 활동을 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줄 친구도 필요했다. 친구대행서비스는 돈을 주고 구매했기 때문에 민수 씨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 대신 우리 부모님을 챙겨주세요"
김윤경(가명·40대) 씨는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늦은 밤에는 집안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이다. 능력을 인정받으며 차장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업무 중 책상 달력에 어머니의 생신이 표시된 것이 보였다. 작년에는 바쁜 직장 일로 깜빡하고 연락조차 못 드렸기에 이번 생신은 잘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평소 어머니는 무릎 관절염으로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하셨다. 그래서 오랜만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를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즐거운 상상도 잠시, 그 날에 중요한 회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경 씨가 프레젠테이션을 맡았기 때문에 뺄 수 없는 일정이었다. 그러던 중 직장 동료가 역할대행서비스 업체에 문의해 보라며 조언했다. 여러 서비스 중 효도대행서비스를 이용하면 바쁜 윤경 씨 대신 업체에서 나온 사람이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 동행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윤경 씨는 본인이 챙겨드릴 수 없어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이 서비스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붕괴된 공동체의 틈을 메워준 대행서비스
대행서비스는 우리 일상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1990년부터 2005년까지 핵가족이 주된 가구 유형으로 나타나면서 과거에 대가족 형태의 마을공동체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도움을 더 이상 받기 어려워지게 되었고, 그 빈자리를 여러 대행서비스 업체가 메우기 시작했다. 이삿짐을 대신 옮겨주는 이삿짐센터부터 배달을 대행해 주는 퀵서비스와 같은 대행서비스가 성행했다. 10년 전 대행서비스는 이처럼 고객의 잔일을 맡는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더욱 심화되고 가족 가치관이 약화됨에 따라 관계의 단절이 심각해지는 상황이 초래됐다. 주변 이웃이나 친인척 혹은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기 힘든 상황이 되면서 위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돈을 주고 빌리는 ‘역할대행서비스’에 대한 수요도 늘었다.

“나에겐 보여줄 관계가 필요해”
역할대행서비스 업체 관계자는 여러 가지 서비스 중 고객들이 하객대행서비스와 애인대행서비스 그리고 부모대행서비스를 가장 많이 찾는다고 전했다. 이 중 하객대행서비스는 업체에서 파견 나온 아르바이트생이 결혼식 객석의 빈자리를 채워주며 지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경제둔화로 인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지게 되면서 초혼의 연령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인간관계를 지속시키지 못해 결혼식에 초대할 지인이 없는 사람이 주로 이용한다는 것이 업계 측의 분석이다. 애인대행서비스 이용자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중요한 모임에 함께 나갈 애인이 필요하지만 바쁜 경제활동과 같은 개인 사정으로 인해 이성과 교제할 여유가 없는 30대들이 많이 이용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27.7%로 18.8%인 4인 가구를 넘어섰다. 1인 가구가 급증한 이유에 대해 우리 학교 사회학과 최문희 교수는 “1인 가구는 개인의 능력이 많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일상생활보다 경제활동이 좀 더 우위를 차지하면서 나타난 가구 현상”이라며 경제활동을 하는 데 적합한 형태인 1인 가구가 주요한 가구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늘어나고 있는 1인 가구가 역할대행서비스의 수요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실제로 한 업체는 “과거에는 동창회를 나가더라도 이웃이나 친구에게 애인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혼자 생활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부탁할 데가 없다”며 이러한 수요에 대해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관계 속 편안한 감정만을 느끼고파”
단순히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역할대행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정서적 만족감을 얻기 위해 이용하는 고객도 있다. 예를 들어, 애인대행서비스에서 애인의 역할을 맡은 아르바이트생은 모임에 함께 참석하는 것 외에도 말동무가 되어주고 함께 영화를 보며 실제 연인 관계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관련 업체인 D사는 타인과의 관계 속 감정이 그리워 대행업체에 문의하는 사람이 늘고 있고 또 이런 서비스에 고객들이 높은 만족도를 나타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최 교수는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의미 있는 관계의 필요성을 인지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사람을 사귀는 과정이 대다수가 공감하는 통념에 따라 이뤄졌다면 최근에 와서는 그 과정을 최소화하고자 한다”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인간관계를 발전시키려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성취가 중요한 무한 경쟁사회에서 △스펙 쌓기 △취업준비 △학점관리 등 해야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사람을 만나 관심사를 묻고 함께 여가생활을 하며 친해지는 과정은 성가시고 귀찮은 과정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지난해 하반기에 처음 등장한 ‘관계’와 ‘권태기’의 합성어인 ‘관태기’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에 피로함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로, 관계 맺는 과정을 기피하는 현상을 표현한다. 현수빈(신방 14) 학우는 “대학교에 들어와 좋은 사람들은 많이 만났지만 대부분 가벼운 관계였고, 이해가 얽힌 관계들이 늘어가면서 새로운 만남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고 해 현재 관태기를 겪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렇듯 역할대행서비스는 타인과 관계 맺는 번거로운 과정을 단축해준다는 점에서, 관계 속 편한 감정만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합리적이지 않아도 되는 관계 맺기
‘보여주기 위한 관계’와 ‘관계 속 감정’을 서비스의 형태로 제공해주는 역할대행서비스는 현대인의 관계 맺기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나’의 감정을 대신 전해주는 서비스까지 나타났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 대신 사과를 해주는 사과대행서비스나 부모님께 정기적으로 안부 연락을 대신해주는 효도대행서비스와 같은 ‘감정대행서비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서비스에 대해 이유정(사회 14) 학우는 “사과는 진심 어린 뉘우침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대행서비스를 통해 사과를 받게 되면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빠질 것 같다. 그런 관계는 상대방과 내가 만드는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돈으로 만드는 관계다”라며 회의감을 드러냈다.
사실, 관련 업체에 따르면 서비스의 이용자가 아직 많지 않다고 한다. 자기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감정대행을 부탁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뢰가 많이 없다는 것이다. 감정대행서비스와 관련해 “개인적 감정을 남에게 부탁할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지 않으며, 효도대행서비스의 경우 서비스를 받는 측에서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런 서비스의 존재는 개인감정의 상품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정이 수요자의 입맛에 맞게 포장되어 시장의 원리에 의해서 사고팔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역할·감정대행서비스에 대해 최 교수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개인적 영역이지만 이 과정에 제3자가 개입한다면 관계 속에 있더라도 결과적으로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경제적 합리성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일-가정 양립(Work and Life Balance)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회에 몰입한 나머지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만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친구를 파는 상점’에 방문하게 될지도 모름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