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캠 만남 - 박영재(산업심리 83) 동문

기자명 김아영 기자 (kay8949@skkuw.com)


 

사진 | 최원준 기자 saja312@

광고기획자, PC방 사장, 보험설계사, 재테크 강사, 중장년 재취업 전문가, 은퇴생활 전문가 ….
한 사람이 지금까지 거쳐 간 직업의 종류이다.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분야, 직종을 어우르고 매번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박영재(산업심리 83) 동문을 만나봤다.

 

이과 성향이 강했던, 놀기를 좋아했던 산업심리학도
“원래 이과로 갈 줄 알았어요.” 박 동문의 어릴 적 꿈은 과학자였다. 이과에 맞지 않는다는 적성검사 결과에 따라 문과계열로 진학했지만 돌이켜보면 박 동문이 전공한 산업심리학과는 문과 중에서도 가장 이과 성향이 강한 학과였다고 한다. 산업심리학과에 가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과 이름 앞에 산업이 들어가니까 좀 있어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심리학에 대해서는 그 전부터 관심이 있었어요”라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1학년 2학기에 들었던 대학수학 과목에서 수학에 대한 큰 흥미를 느낀 박 동문은 이후 통계관련 과목만 20학점 넘게 이수했다. 그러면서도 “저는 놀기 좋아하는 학생, 술 마시기 좋아하는 학생이었어요”라며 1학기에 공부를 하지 않은 탓에 2학기 공부를 따라가기가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산업심리학 전공 공부가 매우 어려웠다고 기억했다.
그런 대학생이었던 박 동문에게도 주된 관심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교육훈련 분야였다. 박 동문은 80년대 초반에는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교육프로그램들이 유행하듯 많이 퍼져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붐을 일으켰던 시기라 과 동기들과 연수원을 하나 세우자는 이야기까지 나눴다고 한다. 산업심리학과 자체가 선발과 교육, 훈련과 배치라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박 동문은 현재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열고 있는데 대학생 때 하고 싶었던 일을 지금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표했다.
박 동문은 지금도 종종 우리 학교 출신 고등학교 동문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선배들이 술을 잘 사주니까 동문회를 잘 나갔죠”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는 박 동문의 모습에서 학교와 동기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행복한 100세 시대 준비하기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는 박 동문.
ⓒ박영재 동문 제공

광고기획자에서부터 IMF를 겪기까지
대학 시절 교육훈련, 통계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박 동문이었지만 정작 졸업 후에는 10년 남짓 광고업계에서 종사했다. 그 계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어쩌다 보니까 광고 쪽 일을 하게 되었어요”라며 웃었다. 박 동문은 광고회사에 다닐 때를 회상하면 호텔작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한다. 지금은 아마 들어볼 수 없을 거라며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퇴근하고는 호텔로 가서 밤새 회의하고 작업하는 일상을 반복했다고 설명했다. “신혼 초기였어요. 제가 일주일 동안이나 집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아내가 울면서 전화를 받더라고요. 부장님께 말씀드리고 일찍 들어간 게 토요일 저녁 7시였어요.” 매우 높은 업무강도 아래에서 일했음에도 박 동문은 당시 광고기획을 했을 때 굉장히 재밌었고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부전공으로 경영학을 공부한 박 동문이 마케팅 수업에서 배운 이론들을 실제 광고제작 과정에 적용하는 것이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를 평생직장으로 여길 정도로 본인 일에 자부심을 가졌던 그였지만 갑자기 닥쳐온 IMF가 박 동문의 발목을 잡았다. “억울했죠, 잘못한 게 없는데.” 속상해서 함께 해고된 직원들과 술을 많이 마시고 다음날 눈을 떠보니 집이었던 일화를 전했다. 당시 옆을 보니 박 동문의 아내와 6살 딸, 4살 아들이 자고 있었는데 그 때 세상이 끝나는 것 같았다며 절망 속에 있었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던지 지금도 힘들 때 꿈에 그 장면이 나타나요.”

칠전팔기로 다시 일어나다
한 순간에 좌절에 빠진 박 동문은 한 부동산 회사의 홍보실장을 맡으며 재기를 노렸다. 6개월 동안 역임한 홍보실장 직을 그만 두고 1999년에 창업한 PC방마저 10개월 만에 망하면서 박 동문은 쓰라린 아픔을 겪었다. 그럼에도 다시 업계 15위 내에 드는 광고회사에 입사하였고 회사로부터 인정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회사의 부서장이 능력을 인정받았으니 경영에 합류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와 동시에 제 앞의 선임국장을 해고하더라고요, 하자가 없는데.” 박 동문은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사람을 가차 없이 자르는 월급쟁이 생활에 환멸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이후 박 동문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보험설계사가 되었다. 몇 년 동안은 안정적으로 일했지만 지점장이 되기에 앞서 스스로를 돌아본 결과 사람을 선발하고 교육하고 영업을 하게 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래서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점이 무엇인가를 고민해보았다. “광고회사에서 근무할 때 기른 프레젠테이션 능력과 보험설계사로서 알게 된 금융지식을 접목해보니 재테크 강사가 적합하겠더라고요.” 그때부터 박 동문은 문화센터 강의를 시작으로 교육회사에서 재무 설계, 자산관리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재테크 강사로서의 실력을 쌓아갔다. 그 시기에 박 동문은 우연히도 은퇴생활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게 되었다. “청중들의 평균 연령이 68세였는데 두 달간 그분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60대 후반 퇴직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용어를 쓰고 있는지와 같은 사실을 처음으로 알 수 있었죠.” 이때의 경험을 기점으로 박 동문은 중장년 재취업 전문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 동문은 노후 생활에 꼭 필요한 다섯 가지로 △건강 △관계 △돈 △여가 △일을 꼽았다. 그러면서 실제 경험에서 일을 비롯해 돈과 관련된 지식을 쌓았고 산업심리학을 전공하며 관계와 여가에 관련된 내용들을 배웠기 때문에 노후 설계와 경력관리와 같은 은퇴 전반을 아우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분야를 넓혀가는 박 동문의 모습을 보며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에요”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서 일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박 동문은 지난해만 총 267번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집에 잘 들어가지도 못하고 주말에도 강의 준비를 위해 쉴 틈 없이 일해야 한다며 “지난해 공공기관 임금피크제가 도입된 직후에는 너무 바빠서 코피까지 흘리며 일했다니까”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신문이나 자료를 볼 때 어떻게 강의에 활용할지 항상 고민할 정도로 하고 있는 일 자체를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박 동문의 저서 『50대, 이력서 쓰는 아빠』.
ⓒ국일미디어 캡처

은퇴생활 전문가로서의 삶
박 동문은 3년 전 설립한 한국은퇴생활연구소에서 은퇴자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은퇴 후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등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있다. “나는 특히 은퇴자들의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라며 퇴직 후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눈높이를 낮추고 현실을 직시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지금 퇴직하시는 분들은 국가 입장에서 엄청난 자산이죠”라며 국가가 베이비부머 세대를 중심으로 지금 은퇴하는 세대에 관심과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 동문은 현재 청중들에게 연락처를 공개하며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관련 정보들을 제공하는 사회공헌활동도 하고 있다. 우리 학교 학우들을 비롯한 청년들에게는 “은퇴나 노후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현재에 충실하면서 본인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라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본인의 은퇴 생활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5년 이내로 실버산업과 관련된 사업에도 도전할 예정이라며 새로운 도전에 대한 포부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