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올 4월 22일 보재 이상설선생의 순국 100주기 추모식행사가 고향인 충북 진천에서 열릴 예정이다. 보재 선생은 1907년 6월 고종의 밀명에 따라 이준, 이위종 두 분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알렸던 헤이그밀사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사를 보면 선생은 공무원으로서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관철하지 못하자 가산을 정리하여 1906년 이후 간도 용정촌에 서전서숙이란 사설 교육기관을 세우고 운영한 것과 헤이그 특사 파견 이후 구미각국을 순방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고, 재미교포를 결속시켜 독립운동을 위한 지원조직을 구축한 것과 직접 연해주와 만주 등에서 한인 자제들의 교육과 군사훈련 및 산업 활동을 격려하면서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여 1914년 블라디보스톡에 설립된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의 정통령을 지낸 것 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재 선생이 본교 600주년 건물 1층에 있는 성균관 역대 총장의 명단에 들어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870년생인 선생은 1894년 갑오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생활을 하다가 1896년 개편된 성균관의 교수 겸 관장으로 부임하였다. 선생은 16세 되던 1885년 봄부터 8개월 간 이시영, 이범세, 서만순 등과 함께 정릉의 신흥사 등에서 합숙하면서 한문·수학·영어·법률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고, 1898년 가을에는 이회영, 여준, 이강연 등과 함께 매일 회합하여 정치·경제·법률·동서양사 등 신학문을 연구하여 치국안민의 신정강을 준비하였다. 일찍이 율곡 선생을 이을 학자 겸 재상감으로 평가된 선생은 신학문을 수학하면서 국제법인 『십간섭(十干涉)』, 수학인 『수리』, 물리·화학·식물학인 『백승호초(百勝胡艸)』, 계약법인 『법률만초』, 『조세론』, 정치서인 『국가론』, 『법국율례』 등의 역서와 『중학수학교과서』 등을 남겼다.
7살 연하의 안중근의사는 1909년 11월 29일 여순 감옥에서 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의병장 만인을 모아도 이상설 한 분에 못 미칠 것이다. 수차 만나서 그 인물을 보니 기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의 그릇됨이 부족함이 없더라. 세계 대세에 통하고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발달을 기도하고 국가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은 이분일 것이다. 또한 동양평화주의를 갖는 점에 있어서 이분과 같이 초절한 마음과 뜻을 가진 사람은 희귀할 것이다.”
안 의사의 기대에 부응하여 선생은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의 정통령으로서 광복군을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였으나 때마침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가 일본과 동맹국 제휴를 하면서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을 막자, 1915년 상해의 영국조계에서 신한혁명단을 조직하여 중국과 군사조약을 체결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7년 3월 2일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셨다. 그러나 선생의 노력은 그 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기반이 되었다.
헤이그에서의 막연무망(漠然無望)에도 최선을 다하고 국권상실 후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하신 선생의 삶은 사후 100년이 아니라 역사가 있는 한 후손들의 지표가 될 것이다. 유학자로서 신학문을 연마한 선생이 성균관 관장으로 부임하여 제국주의 침략을 막기 위한 노력을 은행나무는 지켜보았을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가진 성균인은 이제 500년이 된 은행나무 아래에서 선생의 삶을 생각하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