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병준 기자 (hbj0929@skkuw.com)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의 집 안방에서 유품정리업자와 폐품정리업자들과 기자가 둘러앉아 고개를 처박고 자장면을 먹었다.
안방은 거실을 사이에 두고 공부방과 대치하고 있었다. 거실에는 오전 작업 때 쓸어 모은 각종 폐품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다. 거실을 가로질러, 공부방으로부터 건너오는 냄새는 콧등을 찌르며 넘어왔다. 온 집안을 둘러싼 날 선 냄새에 코가 얼얼했으나, 코끝을 간질이는 자장 냄새는 기어이 기자를 허기지게 했다. 당혹스러웠지만, 가구를 옮기고 책들을 쓸어 담고 수많은 옷가지를 포대에 구겨 넣은 오전의 육체노동에, 점심의 허기는 당연하고도 정당했다.
학창시절에는 입학식이나 졸업식, 본인 생일이나 친구 생일에 주로 자장면을 먹었다. 용돈이 좀 생기면 학교 밖으로 나가 급식 대신 이따금 자장면을 먹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자장면을 먹었다. 1,2학년 때 학회실에서, 복학해서는 신문사에서 학교 근처 자장면 집을 섭렵하다시피 먹었다.
입대 날에도 민머리를 들이밀며 중국집에 들어가 자장면을 먹었다. 당시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훈련소 5주 동안 자장이든 짬뽕이든 구경도 못 할 생각에 스물두 살 사회에서의 마지막 중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만 무엇을 선택하든 다가올 후회는 선명해서, 고심 끝에 짬뽕을 주문하고도 옆 테이블 자장면을 힐긋거리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장면을 함께 시켜주셨다. 자장면에 대한 기억은 줄곧 마음을 부풀게 한다.
지난달 21일 고독사 취재 현장에서의 자장면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시취 속에도 허기가 지는 사태가 당혹스러워서, 몸을 쓰면 허기가 지는 인간으로서의 비애는 시취만큼이나 맹렬했다.
마음을 부풀리는 자장면과 짓누르는 자장면은 다만 같은 자장면이다. 면발과 소스처럼, 마음속에서 비벼진 자장면에 대한 두 인상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전면적으로 낭만적이지도 전면적으로 슬프지도 않은 것이 자장면인 것이다. 사실 모든 사물이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