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병준 기자 (hbj0929@skkuw.com)

검지와 중지의 끝 마디가 떨렸다. “여기 맞아?”, “이렇게 하는 게 맞아?”라는 질문들 사이사이로 볼을 향하던 손끝이 몇 번이고 멈칫거렸다. “여기 말고 저기”, “그렇지.” 지켜보던 여기자들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오른쪽 볼을 겨우 몇 번 찍어 눌렀다. 거울 속 떨리는 손 주변으로 왼쪽 볼과 이마가 보였다. 각 영역의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푸석함과 어두움을 몰아내야 할 터였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른쪽 볼 위에서의 작은 전쟁을 치르고 나니 손가락에 쥐가 나는 듯했다. 왼쪽 볼과 이마가 광활해 보였다.


남자가 화장을 해?

얼굴에 분을 찍어 바르고 있는 거울 속의 본인을 대치하고 있노라니 허망했다. 남자가 화장이라니. 화장은 여자들만의 권리이거나 의무 그사이 어디쯤일 것이라 생각해왔다. 민낯을 벗어날 수 있는 무기로써, 혹은 민낯을 가려야만 하는 족쇄로써 화장은 여자들만의 그 무엇이라 여겨왔다.

하물며 남자의 화장이랴. 기자에게 화장하는 남자란 성소수자이거나 영업 전략에 충실한 남자 아이돌 스타 정도였다. 이들은 영육일치(靈肉一致) 사상에 따라 외모를 가꾸었다던 신라 시대 화랑과 같이 고대 적 먼 나라 이야기 속 인물들처럼 느껴졌다.

운이 좋아서 이러한 화장한 남자들을 현대의 캠퍼스 안에서 마주칠 기회가 간혹 있었다. 주로 그들은 하얗게 뜬 얼굴 위로 아이라이너와 아이셰도우에 그늘진 두 눈이 고혹적이었고 그 아래로 입술이 붉었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 안의 여성성이 남성성을 이겨버릴 듯한 조바심을 느끼곤 했다. 그들이 아이돌 스타일 확률은 낮았고 화랑도 물론 아닐 것이었다. 화장한 남자에 대한 기자의 눈초리는 가늘었고 좁은 시야는 뒤틀려있었다.
사진 | 장소현 기자 ddloves@

그루밍족이 되어보다

지난달 27일 동대문의 한 바버샵(Barber Shop)을 찾았다. 바버샵은 헤어 스타일링뿐만 아니라 습식 면도로 턱, 귀 등의 잔털까지 제거해주는 남성을 위한 그루밍 스팟(Grooming Spot)이다. 이곳의 한 직원은 “미용실이 여성들만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어서 남성분들이 미용실에 가면 금방 나와야 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하더라”라며 “바버샵은 남성들의 미용을 위한 전용공간이라 많은 남성분들이 편하게 찾아주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많게는 하루에 30~40명 정도의 남성이 이곳을 이용한다고 한다. 이곳으로의 발걸음은 기자가 그루밍족이 되기 위한 첫 단계였다.

먼저 쉐이빙 시술을 받았다. 한 시간가량 이뤄진 시술에서 눈썹 주변과 볼, 콧속과 미간, 귓등과 귓불에 난 모든 털들이 정리됐다. 시술을 마친 후 걸어 나오는 기자를 보며 동행한 여기자들이 “피부에서 광이 난다”, “숨어있던 윤곽이 살아난 것 같다”는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호응해주었다. 걸어갈 때 얼굴에 와 닿던 바람의 느낌이 생소했다.

이어서 헤어 스타일링을 받았다. 왁스를 바르고 앞머리를 빗으로 넘겨 올려 포마드 스타일을 구현했다. 들쳐 올린 머리 아래로 드러난 구레나룻으로부터, 이어지는 머리 선을 따라 면도칼이 오갔다. 헤어 스타일링을 마친 기자를 본 여기자들은 “정말 달라졌다”고 했다. 정말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머리에 바른 왁스 냄새가 코를 찌르며 넘어왔다. 쉐이빙으로 콧속에는 코털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바버샵을 나와 화장품 가게가 즐비한 거리를 돌아다녔다. 타고난 피부가 까매서, 톤이 맞는 화장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호수별로 화장품을 손등에 발라보며 매장을 오갔다. 돌아다니면서 기자에게 “웜톤 중에서도 웜톤일 것”이라고 하는 여기자들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 매장에서 피부 톤에 맞는 남성용 파운데이션을 구입할 수 있었다.

신문사로 복귀하여 화장법에 대한 속성 강습을 받았다. “파운데이션은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눈썹은 눈의 길이에 맞춰서”, “컨투어링은 안면의 윤곽을 살리기 위한 것”과 같은 기본원칙들을 배웠다. 각 원칙들이 내포한 그 오의(奧義)를 알 수 없어서 배웠다기보다는 외웠다. 메이크업 픽서, 프라이머, 색조화장 등의 용어가 생경했다. 푸석함과 어두움을 몰아내야할 양 볼과 이마는 광활한 전쟁터였다.

늦은 귀가 후 옷장을 열었다. 이른 아침 신중을 기해 옷을 고를 자신이 없어, 취침 전 미리 그루밍족에 걸 맞는 옷들을 선별해두기 위해서였다. 옷장에 걸린 옷들을 살피며 날마다 입던 청바지와 후드티를 어렵사리 건너뛰고 분홍 와이셔츠와 회색 니트, 차콜(Charcoal)색 재킷과 검정 면바지, ‘땡땡이’ 무늬 박힌 양말을 꺼내 들었다.

다음날이었던 지난달 28일 아침, 그루밍족으로서의 하루가 시작됐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기자의 기상부터 등교까지의 평균 소요 시간은 40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은 그루밍족이 되기 위한 준비에만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전날 여기자들에게 배운 서툰 화장법으로 잠이 걷히지 않은 얼굴을 꾸미려니 쉽지 않았다. 파운데이션을 고르게 바르지 못하거나 눈썹을 그리다가 만화 속 짱구의 눈썹처럼 되어버리면 다시 세수를 했다. 머리는 왁스를 발라 포마드 스타일로 고정했다. 준비해둔 옷까지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서보니 거울 그 안쪽 어딘가에 그루밍족이 보이는 듯도 싶었다. 민망함을 뒤로하고 현관을 나섰다.

꾸미는데 남녀 없다

등교하니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화장한 얼굴과 분홍 와이셔츠를 보고 이전의 기자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아이돌도 아니고 화랑도 아닌 것이…”라는 반응을 보일까 우려했으나 다행이도 마주친 대부분이 호의적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거냐”, “소개팅 나가냐” 등의 조소 섞인 반응도 없지 않았지만 “깔끔한 회사원 같다”라는 호응이 주를 이뤘다. 연장된 눈썹과 분홍 와이셔츠를 부끄러워하는 기자에게 “요즘 남자 꾸미는 게 별거냐”라며 박준우(아청 12) 학우가 타박했다.

더욱 예상외였던 것은 기자 스스로였다. 이날을 계기로 남자의 꾸밈이라는 것이 기자의 뒤틀려있던 시각을 뚫고 자기관리의 한 영역으로 다가왔다. 외관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자기 안에 숨어있던 아름다움을 쟁취해내는 것이 꾸밈인 듯싶었다. 남자의 꾸밈에 대한 편견을 집어던지고, 본인도 이제 좀 꾸며보려 한다.

수업이 끝나고 여기자들을 만나 전날 빌린 화장용품을 돌려주었다. 성능 좋은 무기를 반납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