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희(신방 12) 학우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티 없이 맑은 소녀가 바라보는 하늘에도 먹구름은 껴있게 마련이다. 머리를 바짝 당겨 묶어 드러난 좁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작은 여자아이가, 한동안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다시 스케치북으로 옮겨간다. 여자아이의 손이 크레파스 상자 위에서 한참을 망설인다. 고민 끝에 아이는 ‘진회색’ 크레파스를 꺼내든다.

이어 아이의 손짓에 따라 새하얀 아파트 앞에서 웃고 있는 세 식구의 머리 위로 뭉게뭉게 먹구름이 피어오른다. 색칠을 마치고 아이는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다. 다시 먹구름이 낀 창밖을 바라보는 아이의 방에 엄마가 들어온다. 아이는 자랑스레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어 보이는데 그림을 보는 엄마의 표정이 밝지가 않다.
-하늘색은 이거야.
엄마의 손이 아이가 한참을 망설였던 ‘하늘색’에 가닿는다. 이번엔 엄마의 손짓에 따라 세 식구의 머리 위에 덮여있던 먹구름이 조금씩 개어진다. 이어서 흰색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빨간 얼굴에 검은 눈코입을 가진 해님까지 나타난다. 그제야 엄마의 표정이 밝아진다. 반면, 아이의 얼굴에는 개어진 먹구름이 옮겨간 듯 어두움이 보인다.
-하늘은 이렇게 그리는 거예요. 알겠지?
아이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 것을 보고는 따라서 미소 짓는다. 엄마는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이제 밥 먹을 시간이라며 아이의 방을 나선다.
아이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드리워지고, 어두운 갈색 눈동자는 바닥에 놓인 스케치북과 창밖의 하늘을 한 차례씩 살펴본다. 아이는 ‘상아색’과 ‘검은색’ 크레파스를 번갈아 들며 바쁘게 손을 움직인다. 잠시 뒤 스케치북을 덮어 책상 밑으로 밀어 넣고 엄마가 부르는 거실로 뛰어나간다.
 
책상 밑에 버려진 스케치북에는 세 식구가 나오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하늘색의 하늘과 흰색 구름, 빨간 얼굴에 웃고 있는 태양이 그려져 있다. 그 아래 땅을 딛고 선 아빠와 엄마가 손을 잡은 채로 웃고 있다. 그리고 그 옆, 작은 여자아이가 서있다. 아이의 얼굴은 군데군데 어두운 얼룩을 품고서 우는 표정을 하고 있다.
원래는 웃고 있었을 아이의 얼굴에 울상이 덧칠해져 있다.
*
 
-여보세요.
-자고 있었니? 오늘 출국하는 날이야. 저번에 말했잖아, 인도여행. 네 아빠 좀 긴장돼 보여. 비행기 처음 타는 것도 아니면서. 추천장은 받았어?
-오늘 받으러 가기로 했어요.
-그래, 너도 준비 잘하고. 아빠 바꿔줄까? 알았어. 선물 사 올 테니까, 다다음주 쯤엔 집에 한 번 들려. 서류도 정리하고 해야지. 끊을게. 아침 챙겨 먹어.
전화기 너머 새엄마의 목소리도 꽤나 들떠 보인다. 인도를 왜 가냐고 뭐라 하더니. 막상 가는 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꿈이 그게 다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약간 찜찜한 기분이다. 꿈이야 자주 꾸긴 하지만 어린 시절에 대한 꿈이라니. 이제는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인지 조작된 기억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그런 꿈. 그리 달갑지 않다. 게다가 꿈이 남기는 기분이란 게 상대적인 패배감이라니. 이건 좀 부당하다. 꿈에 나온 엄마는 여전히 젊었다. 이제 얼추 나와 비슷한 나이일 텐데. 나에게는 크레파스를 든 어린 딸도, 성실하게 돈을 벌어오는 남편도 없다. 그나마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더 어려 보인다는 게 약간의 위안이려나. 오늘따라 이 원룸이 더욱 비좁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다 돼간다. 방 한구석에 회사에서 가져온 짐이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년 치 짐이라기엔 생각보다 크진 않았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그 시간들을 돌아보게 된다. 교수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어 그래. 추천장은 다 썼고, 이따 저녁 7시에 자주 가던 일식집에서 보자. 예약해 둘게.
 
밖에서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다. 약간은 뻔뻔하다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나도 수긍했다. 저녁까지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필요한 점수는 거의 다 만들어놨지만 문제는 전공이었다. 꽤 오래 놓고 있었더니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침은 대충 챙기고 단장을 한다. 꼼꼼하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매만진다. 어제 바른 매니큐어가 조금 자극적여 보이지만 마음에 든다. 연일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얇은 옷부터 스웨터까지 차곡차곡 껴입는다. 그렇게 챙겨 입고 나왔는데도 생각보다 바람이 차다. 목도리를 코끝까지 올리고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간만에 전문용어로 빼곡하게 채워진 원서를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온다. 휴게실로 나가 캔 커피를 마시는데 무리 진 여학생들 사이에서 교수의 이름이 얼핏 들린다.
-그 교수 나한테 말 엄청 걸고 그랬는데, 학점은 이게 뭐야. 뒤통수 맞았어.
짜게 구는 건 여전한 모양이다. 시험 내용을 들어보니 확실히 그 수업이었다. 나 역시 저 나이쯤에 젊은 남자 옆에 앉아 그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확실히 그 과제만큼은 여전히 기억이 난다. ‘미디어에 비치는 페미니즘.’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건 여자가 아닌 아빠였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나약함과 페미니즘 사이의 연관성을 주제로 과제를 제출했고, 어쩌면 수업 내용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 교수에 눈에 들었다. 그에게 추천장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방법은 없었다. 오늘 정해놓은 분량을 마치고 나니 벌써 6시다.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아탄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여 작은 온돌방으로 안내되었다. 특별한 장식은 없지만, 카누처럼 생긴 나룻배를 타고 커다란 물고기와 싸우는 남자가 그려진 족자가 하나 걸려있다.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테이블 밑으로 발을 놓을 공간이 있어 언 발을 녹이고 있자니 몸이 나른해진다. 이런 상황이 여전히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게 어쩐지 우습다. 졸업논문과 인턴을 무사히 마치고 여기저기 원서를 넣던 때였다. 상담을 가장한 만남들 속에서 교수는 나의 불안정한 심리를 잘 파고들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 순간엔가 그의 삶에 부유물이 돼있었다.
 
부유물. 당시에 나는 불안한 마음속에 매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저녁, 우리는 같은 대학교 어딘가 비슷한 공간에 있다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금과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 식사 후에는 대체로 어두운 조명 아래 침대에서 하나가 되곤 했다. 그 후엔 다시 일주일 뒤를 기약한 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라는 물이 담긴 컵에 한 번씩 스며드는 기름 같은 존재. 둘은 강한 흔들림에 의해 일순간 하나가, 혹은 하나처럼, 되지만 그러한 자극이 끝나면 유막을 사이로 나는 그의 위로 부유한다. 그 당시 막 교수직에 오르게 된 그의 가정을 파괴하는 일 따위 내겐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부유물로서의 나의 처지를 실감할 때마다 날카로운 아픔이 찾아들곤 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교수가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지? 차가 막히더라고.
-아뇨, 그냥 조금.
 
처음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여전히 깔끔한 스타일이다. 이마가 드러나도록 가운데에서 넘긴 가르마는 그의 이미지를 더 유하게 만들었다. 쌍꺼풀 없는 눈에 약간은 뭉툭한 코, 살은 없지만 둥근 얼굴형이 교수라기보다는 작곡가 정도가 어울릴 것 같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는 보는 사람을 누그러뜨리는 선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그 미소가 이제는 거슬린다.
 
-추천서는 최대한 신경 써서 썼어. 별문제 없을 테니까 나중에 읽어봐. 여기 굴이 싱싱하다. 오늘은 그냥 많이 먹고 가.
-고마워요. 교수님은 잘 지냈어요?
-나야 뭐 하루하루가 비슷하지. 세미나에 논문에 수업에. 2년 전에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자리 잡는 것도 수월했을 테고. 그래 그 얘기는 안 할게, 얼른 먹어.
 
교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세미나에 대한 얘기에 나는 그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척할 뿐이었다. 작은 원통형 사기그릇에 담겨 나온 일본식 계란찜의 폭신한 식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내 술이 당긴다.
 
-술 좀 마실래요. 교수님은 안 드시죠?
-차 때문에. 잔만 채울게.
 
원래 술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 예전에도 항상 운전 핑계를 댔다. 잠시 후 따뜻하게 데운 사케와 튀김 몇 종류가 상에 오른다. 따뜻한 술을 마시니 알코올 향이 코와 입속을 금세 채운다. 몸이 나른해지면서 다시 꿈에 대한 생각에 빠진다. 분명 그 꿈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어떤 냄새를 맡았던 것 같은데. 무슨 냄새였을까. 엄마와 관련된 것이었을까.
-오늘 엄마가 나오는 꿈을 꿨어요.
-어머님? 음... 기분이 어땠는데?
-뭔가 억울했어요. 꿈속에 엄마랑 저랑 비슷한 나이였거든요. 근데 엄마한테는 저한테 없는 것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나라던가, 아빠라던가. 웃기죠? 그런 게 왠지 부러웠어요.
 
술을 한 잔 더 마신다. 그리고 한 잔 더. 교수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잖아. 불안감이 그런 식으로 나타났을 거야. 나도 이해는 가. 네가 요즘 느끼고 있을 그런 감정들. 불안감이나 초조함, 뭐 그런 종류의 비슷한 것들. 그런 생각들에 많이 사로잡힐 시기니까. 그래도 조금은 편하게 생각해봐. 어차피 지나갈 때인 거고, 그런 고민들이 의외로 그렇게 도움이 되지도 않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표시하고 살짝 웃어 보인다. 교수도 함께 따라 웃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린다.
 
-집까지는 태워주세요. 그리고 2년 전의 일,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래야만 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교수는 잠시 멍하니 나를 쳐다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우리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그날의 텅 빈 정사.
 
그의 메마르고 차가운 손가락이 나의 젖가슴을 어루만질 때 전신에 익숙한 소름이 돋았다. 내 위에 올라간 그의 등을 감싸 안자 파리한 골상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것은 그의 몸에서 풍기는 산뜻한 스포츠 향수의 냄새와 대조적으로 느껴져 한 편으로 두려웠다.
나의 그런 생각을 어느 정도 읽었는지 우리의 분리된 합일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끝이 났다. 그를 껴안은 채 잠시 아무런 말없이 누워있는데 문득 조금 전에 느낀 감정이 되살아나면서, 새하얀 백골에 짓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그의 품을 벗어나 탁자에 올려있던 담배를 하나 빼물었다. 그도 슬며시 눈을 뜨더니 담배를 태웠고, 어느 쪽에게도 좋은 감정을 주지 못한 그날의 정사는 그렇게 두 줄기의 연기로 마무리됐다.
 
감고 있던 눈을 떠 하늘을 봤다. 밖에는 포슬포슬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비가 오고 있었고, 어두운 밤하늘에는 주인 없이 별 자국만이 드문드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릴 때 교수는 필요한 것이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나는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2년 전 교수를 따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면 이렇게 돌아오지 않아도 됐을까. 어쩌면 그쪽이 훨씬 더 돌아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교수의 부인은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덕분에 교수와 나의 정기적인 만남은 문제없이 흘러갔던 것이다. 하지만 외국행이 갖는 의미는 달랐다. 그제야 사진으로밖에 본 적 없던 한 여자에 대한 연민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여자의 모습은 아빠를 떠올리게 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다시 한 번 누군가의 소중한 것을 뺏어올 수는 없었다. 또한 그것은 나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때를 후회할 이유는 없다. 집 앞에 가로등만이 총총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술이 당겼다.
 
씻고 나와 찬장을 뒤져보니 언제 받은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와인 세트가 눈에 띄었다. 어차피 배도 부른 참이라, 나는 이렇다 할 안주도 없이 와인을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술을 즐기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술은 그저 장식용일 뿐이었다. 아빠는 술에 취해 감정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자신의 나약함을 그대로 까발리는 짓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아빠도 술에 취해 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그 일이 아빠의 인도행을 설명할 유일한 방법이겠다. 그날 우리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죽은 자가 떠내려가고, 산 자가 몸을 씻어내는 강. 그 장면에서 아빠는 장식장에 술을 꺼내 잔에 따랐다. 증류된 알코올이 아빠의 속을 씻어내려 갔고, 염기 없는 체액이 아빠의 얼굴을 씻어 내렸다.
아빠는 결국 솔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지금 내겐 레드 와인도 화이트 와인도 결국 모두 술일뿐이다. 오히려 술이 깊은 풍미를 지녔다는 둥 싱그럽다는 둥 하는 얘기가 모순적이다. 우리는 술을 마심으로써 현실의 무겁고 가벼움, 진지하고 발랄함, 슬픔과 기쁨 따위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가치판단의 중압감에서 마비되어 가는 것이다.
아빠는 차라리 그때 내게 죽일 년이라 말해야 했다.
 
그리고 나 역시 차츰차츰 마비되어 어느 순간엔가 나의 판단 속에 감춰져있던 무의식에 나를 던져 넣었다.
*
 
거실. 낯이 설면서도 익숙한 가구의 배치. 아날로그 TV, 언젠가 내 몸에도 베었을 싸구려 방향제 냄새. 기억의 팽창감에 정신이 아득하다. 방학이었던가. 아니면 학교에 갔다 왔던가. 내가 지금 몇 살쯤 됐는지 헤아려보려 애쓰지만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고 곱게 차려입은 누군가가 걸어 나온다. 그 모습이 익숙하다. 저게 나인가. 그런데 방에서 걸어 나온 여자가 곧장 식탁의자 위에 올라선다. 여자의 얼굴 앞에는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보라색 넥타이가 타원을 그리고 있다. 강렬한 기시감. 이내 나는 그것이 기시감 따위가 아닌, 내게는 없지만 실제로는 있었던 기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의자 위에 올라선 여자는 엄마였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그 타원 사이로 집어넣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고, 이 장면은 내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그려봤을 그 장면인 것이다.
 
당시에 나는 중학생이었고 흔히들 사춘기라고 부르는 그런 시기에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옆집에 사는 오빠였다.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사이는, 부풀어 오르는 몸만큼 부피를 키워온 호기심과 미숙한 감정들의 상호작용 속에 급속도로 발전해갔다. 하나둘씩 화장품이 늘어갔고, 하나둘씩 엄마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들이 늘어갔다. 첫사랑은 즐거움의 연속이었고, 어린 날의 첫 키스는 달콤했다. 그런 내가 어설프게도 간과했던 것은 엄마의 오래된 우울증이었다.
엄마는 내가 겨우 말을 하고 뛰어다니던 때에도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날 엄마는 술을 마셨다고 한다. 창밖으로 몸을 던졌을 때, 엄마의 배 속에서 자리를 키워가던 작은 생명은 엄마의 또 다른 눈물이 됐다. 그리고 그날, 집이 비는 시간에 놀러 왔던 오빠를 엄마가 보게 됐다. 엄마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고, 나를 몰아세우는 엄마에게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항을 했다. 그때는 그게 무슨 감정인지도 모른 채 서럽게 울다 지쳐 잠이 들었고, 엄마는 또 다시 잔에 술을 채웠다.
 
내가 눈을 뜬 것은 문을 두드리며 나와 보라고 하는 아빠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웠고, 나는 살짝 부은 눈을 비비며 잠긴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아빠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고 내가 나오는 것을 보더니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빠를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 나 역시 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는 물웅덩이 위로 식탁의자가 나뒹굴고 있었고, 그 위로는 곱게 차려입은 채 눈은 거의 다 튀어나와있고, 혀를 쭉 뺀 엄마가 매달려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장면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빠가 울지 않았으므로 나 또한 울지 않았고, 나는 그 상태로 엄마의 죽음에 뒤따른 일련의 과정들을 목도했다.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나를 위로했고, 또 술을 마시면서 수군거렸다. 화장이 끝나고 ‘내 동생 죽인 년’이라고 소리 지르는 이모를 보고서야 나는 그 수군거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항이라는 것을 했고, 그때 엄마로부터 이제 마지막이 될 가장 큰 벌을 받은 것이다.
 
의자 위에 선 엄마가 천장에서 내려오는 타원에 머리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든 그것을 말려보려 하지만 온몸이 뻣뻣하게 굳고 도무지 힘은 들어가지 않는다. 순간 발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져 바닥을 내려다보니 얕은 물웅덩이가 찰랑이는 것이 보인다. 그 순간 참을 수 없이 역겨운 냄새가 올라오면서 숨이 막혀온다. 온갖 오물 냄새가 진동한다. 나는 엄마의 모습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했지만, 엄마의 얼굴은 마치 모자이크 처리된 장면처럼 그 윤곽만 보일 뿐 표정을 분간할 수가 없다. 폐는 신선한 공기를 갈구했고 심장은 요동치듯 방망이질을 해댔다. 그 순간 나는 아빠에 대한 강한 혐오감과 함께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
 
후욱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쉰다. 그다음 짧게 여러 번, 다시 크게 한 번. 온몸이 땀에 젖었는지 곧바로 한기가 느껴지면서 소름이 돋는다. 나는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한참을 그 상태로 누워있었다. 창밖을 보니 언뜻 해가 보이는 것 같으면서 어둡다. 잠시 동안 그것이 어스름인지 노을인지 헷갈려 하다가 이내 지금이 해 질 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꽤나 오래 잤다는 뜻일 텐데 몸에는 묵직한 피로가 그 무게감을 뽐내고 있다. 오히려 여기저기 쑤시듯이 아파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허기. 참을 수 없는 공복감이 온몸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가 떠올랐다. 나는 충동적으로 핸드폰을 뒤져 그의 번호를 누른다.
잠시 뒤 젊은 남자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퇴근할 준비 중이라는 그의 말에 나는 불쑥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그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가 집이냐고 되물어왔다. 그렇다는 대답에 그는 먹을 것을 사 오겠노라 말하고 이내 전화는 끊어졌다.
 
왜 하필 그가 떠오른 것일까. 그와 처음 만났을 때에도 나는 배가 고팠다. 매일매일 책상에 앉아 정해진 일상을 살아가던 고등학교 생활이 끝나고,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때였다. 모두가 그렇듯 적당한 환상 속에서 새로움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렇게 맞이한 대학 생활이란 것 역시 조금 더 큰 굴레의 순환일 뿐이었다. 나의 하루는 술을 마시는 시간과, 다음날 강의실에 앉아 온몸으로 숙취를 감내하는 시간들로 빈틈없이 채워졌다.
그날도 과모임이라는 핑계로 역시나 술을 들이붓던 날이었다. 어리다는 틀에 갇혀 10년 이상을 살아오다 갑작스레 젊음이라는 세계로 뛰쳐나온 또래들의 술자리는 언제나처럼 한없이 들끓었고, 아직 제대로 된 근본을 찾지 못한 텅 빈 소리들이 술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날따라 그런 분위기에 몹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한 선배가 말을 걸어왔다.
-야, 술 좀 따라봐.
나는 얌전히 술을 따른다.
-두 손으로 안 따라도 돼. 너 어디 살아? 자취?
-네. 저기 초등학교 쪽 살아요.
-좋네. 자취하는 애면 많이 마셔야지. 왜 애들이랑 말도 안 하고 그러고 앉아있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왜 이런 새끼한테 설교를 듣고 있어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들어 멍하니 쳐다만 볼 뿐이었다.
-뭐야 얘, 왜 쳐다보기만 하냐. 뭔데, 기분 나빠?
-아뇨 그냥. 별로 말하기가 싫은데요.
주변에서도 하나둘 우리 쪽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의 특성상 조금씩 정적이 찾아드는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말했다.
-얘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데려다줄게. 우리 집 쪽 사는 것 같던데. 얘네 집 대충 알아.
뒤돌아보니 젊은 남자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 얼굴은 봤지만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본 적 없는 사이였다. 다만 익숙한 눈빛이었다. 나는 반문하는 대신 순순히 따라 일어섰다. 술집 안에는 잠시 동안 궁금증이 가득 베인 공기가 흐르다 이내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술을 따르라던 선배도 금세 흥미를 잃고 다른 여자애와 얘기 중이었다. 나는 젊은 남자를 따라 지하에 있던 작은 술집을 벗어나 한산한 밤거리로 나섰다.
 
밝은 곳으로 나온 우리는 서로를 마주 봤다.
-진짜 우리 집 알아요?
-이제 알게 되겠지. 앞장서.
그의 눈을 봤다. 자세히 보니 엄마의 눈과 닮아있다. 쌍꺼풀도, 밝은 눈동자도. 엄마가 나에게 주지 않은 것들을 그가 갖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뒤로 돌아 집을 향했다. 좁은 골목길이라 그런 것인지 그는 나란히 서지 않고 두 발자국쯤 떨어져 조용히 나를 따라왔다. 그날은 달이 밝았다. 가로등이 없어 평소 으슥한 그 골목도 은은한 조명이 깔린 듯 환했다. 나는 남자의 눈에 대해 생각하면서 천천히 집으로 갔다. 집 앞에서 우리는 다시 마주 섰다.
 
-여기예요, 우리 집. 선배는 어디 살아요?
-후문 쪽. 전혀 안 가깝네... ... 옆 테이블에 앉았는데 왠지 눈이 갔어. 왜 저렇게 화가 나있을까, 무슨 일이라도 치지 않으려나 싶어서 보고 있었어. 궁금할까 봐 하는 말이야. 왜 그런지 물어봐도 돼?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배가 고팠어요. 안주는 맛도 없고. 다른 애들도 많은데 왜 하필 배고픈 나한테 그러는 건지, 그게 짜증 나서 그랬어요.
 
그렇게 말하고 생각해보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표정이 그 정도였나. 한 번 시작된 웃음은 돌아갈 곳을 잃은 듯 떠나지 않고 계속됐다. 그가 말한 화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내 안에서 온갖 종류의 웃음을 끌어내 전부 다 웃어버렸다. 그의 눈을 봐도 웃기고, 코를 봐도 웃기고, 그의 입도 웃겼다. 그 역시 그런 나를 보면서 어이없다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다음날 점심 약속을 잡고 달빛이 비추는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와 나는 종종 함께 밥을 먹는 사이가 됐다. 단둘이 술을 마신다거나, 함께 어딜 가는 일은 드물었다. 우린 그저 일주일에 한 번쯤 꾸준하게 밥을 먹었다. 내게 남자 친구가 생겼을 때도, 그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을 때도 우리의 그런 만남은 변함이 없었다. 교수와 정기적으로 만나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라면 어렴풋이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서로가 취업하기 전까지 그런 만남을 유지했고, 지금도 이렇게 몇 달에 한 번쯤 만나는 사이로 남아있었다.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여니 족발 집 상표가 그려진 비닐봉지와 딱 봐도 술이든 봉지를 양손에 든 그가 서있었다.
-회사 그만뒀다더니 설마 지금이 기상시간인 거야? 내일 일찍 출근해야 돼서 오래는 못 있어. 식기 전에 먹자.
-와줘서 고마워.
-배고프다 했잖아. 또 무슨 일인지 들어줘야지. 천천히 얘기해봐. 술자리에서 박 과장 그 새끼 얘기 듣는 것보다는 재밌겠지.
나는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그의 얘기의 쿡쿡 웃으며 조금씩 내 안에 술을 채워갔다. 술을 한 병 비운 뒤, 나는 유학 얘기로 시작하여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날, 엄마가 목을 매던 날로 돌아가는 꿈을 꿨어. 잊고 산 지 꽤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그 전날에는 아주 어렸을 때 꿈도 꾸고...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안 그래도 생각할 게 너무 많은데 도저히 신경 쓰여서 다른 생각을 못하겠어.
 
그는 천천히 소주잔을 기울이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나도 소주를 한 잔 마신 뒤 잔뜩 기름이 낀 족발 한 점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사실 그리 맛있지는 않았다. 꿈의 끄트머리에서 맡은 냄새가 내 몸 어딘가에 붙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먹는다는 행위에 있어서 후각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나는 그 자명한 사실을 몸으로 체득해가면서 물컹한 비계와 퍽퍽한 살코기를 계속해서 씹어 넘겼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 너한테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은 게 있었어... ... 그 벌이라는 말. 그 표현이 이상해서. 엄마의 죽음이 어쩌다가 벌이 된 걸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더라고. 어머님이 돌아가신 날, 무언가 놓친 게 아닐까. 그래서 넌 그 상황을 벗어나질 못하는 거고. 말하자면 어떤 배우가 역할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카메라가 꺼졌는데도 계속해서 배역을 연기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엄마가 죽은 건 영화가 아니잖아. 현실이라고.
-물론 그건 확실한 사실이지. 문제는 너야. 넌 지금까지도 마치 네가 어머님을 죽이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잖아.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분명히 내게 죽일 년이라고 말했다. 나는 침묵한 채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마지막 잔을 비우고도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나의 침묵을 그가 이해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들 때까지만 있어줘.
 
젊은 남자는 먹은 것을 대충 치우고 침대 옆에 앉았다. 어두운 방 안에 그의 숨소리만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그는 오늘 평소에 비해 많은 말을 했지만 그의 숨소리에는 못 다 한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있었다. 그것은 위로 같기도 했고 격려, 혹은 동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 저변에 깔린 애정의 존재감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나의 존재를 잊지 않을 수 있다는 듯이, 그의 손에 담긴 온기를 통해서 나의 손이 그곳에 있음을 느꼈다.
 
그가 떠나가고도 한참 동안 나는 꿈과 현실 사이를 오고 갔다. 나는 나의 비좁은 원룸에 누워있었고, 10년도 더 된 어느 날의 아파트 거실에 서있었으며, 어디선가 아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갠지스 강에 누운 채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울고 싶었지만 울지 못했다. 죽일 년은 울 자격이 없다. 언뜻 강가에 서서 울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
 
눈을 떴을 때 젊은 남자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이번 주말에 어디 다녀올래? 생각해보고 연락해. 밥 잘 챙겨 먹고.’
나는 잠시 핸드폰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내려놨다. 먼저 끝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차분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천천히, 꽤 오랜 시간 샤워를 하고 꼼꼼하게 화장을 했다. 선물 받고 거의 쓸 일이 없었던 틴트도 바르고, 사놓고 안 입던 원피스도 꺼내 입었다. 머리도 정성 들여 매만진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는데 다행히 받지 않는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려면 아직 며칠 정도 시간이 남았다. 전화를 끊는데 손톱이 엉망이다. 한참을 망설이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준비과정을 거치고 나면 다시 망가질 것이다. 깔끔하게 다듬기만 하고 원룸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대형마트로 향했다. 집 냉장고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서 아주 기본적인 재료부터 담기 시작했다. 만약에라도 무언가 부족해서 다시 나와야 한다면... ... 시간에 맞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늘 상영할 영화에 막간은 없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흐트러짐 없이 끝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커다란 마트 봉지를 가득 채워 다시 거리로 나섰다.
아파트 단지 내를 걷는 동안 다양한 기억을 떠올려 봤다. 어렸을 때는 실제로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아파트였으며 주변에 이만큼 높은 건물이 없어서 어떤 위용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신축 아파트에 그 위용을 뺐긴 채 낙후된 구시대의 산물 같은 느낌만 주었다. 그래도 그런 상대적인 느낌을 배제하고 보자면 이 자체는 거의 변한 것이 없다. 교복 입은 여자애들 몇 명이 지나간다. 저희들끼리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분명 저 때쯤이었겠지. 느낌이 좋다. 잘 해낼 수 있다.
 
우선 청소부터 시작한다.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여기저기 먼지를 닦아낸다. 며칠간의 부재의 흔적이 집안 구석구석에서 느껴진다. 나의 손길에 따라 조금씩 온기가 퍼져나간다. 기본적인 청소를 마친 후에는 무대를 꾸민다. 없었던 액자, 화분, 장식품들은 모두 빈 방으로 옮겼다. 신경 써서 입은 옷이 망가질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한다. 바뀌어버린 가구들은 어쩔 수 없으니 위치만을 맞춰본다. 탁자가 원래 이쯤이었나... 얼추 정리를 끝내고서 다시 한 번 청소를 한다. 이제 무대는 차려졌다.
처음부터 자연스레 생각났던 것이 된장찌개와 조기구이였다. 그 당시의 저녁 메뉴를 떠올리자니 그 둘이 가장 확실해 보였다. 천천히 재료들을 손질해 나간다. 호박, 양파, 고추 그리고 두부를 썬다. 멸치 국물이 끓기 시작하고 된장을 푼다. 푸근하게 퍼져가는 된장 냄새를 맡고 있자니, 순조롭게 그때의 익숙함이 되살아난다. 하나씩 재료들을 넣고 조미료들을 뿌린다. 이제 끓이기만 하면 끝이다. 조기까지 굽고서야 밥을 안 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다행히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쌀을 안치고 불을 끄고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니 잠시 귓가가 윙윙거린다. TV를 켜볼까 하다가 이내 관둔다. 잠시 이렇게 앉아 기다리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베란다를 통해 차오르는 석양의 이미지가 거실 안을 따뜻하게 채색한다. 그날의 하늘도 이랬을까. 엄마도 잠깐은 이 자리에 앉아 무엇인가라도 지나간 어떤 것을 한 번쯤 붙잡아봤을까. 몸을 일으켜 안방으로 가 아빠의 옷장을 연다. 엄마의 목을 졸랐던 것과 가장 비슷한 네이비색 넥타이를 꺼내 거실 천장에 매단다.
밥이 다 된 소리에 마저 상을 차린다. 시간은 딱 맞았다. 이제 베란다 바깥 하늘에는 붉은 영역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거실 불을 켜고 양주 진열장 앞에 섰다. 술 종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15년산이 눈에 띈다. 그렇다면 이 술은 최소한 그전 시대에 양조됐다는 뜻일 테니까. 진열장에서 꺼내어 마개를 여니 독한 향이 순식간에 코를 파고든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아 잠시 그대로 서있어야 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온더록 잔에 술을 따랐다. 당연히 얼음은 없었고 나는 물을 조금 탔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잔에 담긴 액체를 모조리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곧바로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이빨을 깨물며 참아야 했다. 독한 술이 내 식도의 위치를 알려주듯이, 지나가는 모든 길을 뜨겁게 달구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잠시 뒤 눈을 떴다. 이제 곧 엔딩이다.
 
잔을 치우고 잠시 식탁 앞에 서본다. 식탁 위에는 세 사람의 저녁이 차려져있다. 술 냄새에 가려 밥상의 냄새는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천장에 매달린 넥타이로 눈을 돌린다. 잠시 멍하니 쳐다본다. 그뿐이다. 망설임 없이 의자 위로 올라가 원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는다.
 
타원 안에서 본 거실은 무척이나 쓸쓸하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방울 두 방울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겉잡을 수없이 빨라져 급류를 타고 내려왔다. 눈앞의 장면이 흐려진다. 엄마의 영화는 이렇듯 부옇게 흐려져 가며 끝난 모양이다. 아빠가 마주 선 강은 이것보다 더 흐릴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울었다. 넥타이를 꽉 쥔 손이 아파왔고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자꾸만 숨이 막혀왔다.
 
식탁에 올려둔 핸드폰의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빼고 핸드폰의 액정과 눈앞 허공에 그려진 타원을 번갈아보며 쳐다본다. 이번 주말에는 어딘가로 강을 보러 가야겠다. 입안으로 짜디짠 눈물이 흘러 들어온다. 강물은 짜지 않을 것이다.
 
-죽일 년.... 죽일 년... 죽일 년... ...
 
나는 배가 고팠다.

박찬희(신방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