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성대문학상 소설 부문 최우수작] 하마(河馬)
[2017 성대문학상 소설 부문 최우수작] 하마(河馬)
  • 성대신문
  • 승인 2017.06.06 16:56
  • 호수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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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수(철학 11) 학우

 1.

학명 Hippopotamus amphibious. 천삭동물문 포유강 소목 하마과 하마속의 포유동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의 하천, 호수, 늪지대에 분포되어 집단생활을 한다. 새로이 즉위한 우두머리 수컷은 선대의 어린 새끼를 모조리 살해한다. 무리 내 암컷들의 발정기를 앞당기고 경쟁 수컷들의 세력을 타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매년 아프리카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하마의 공격에 목숨을 잃는다.

 

2.

볕은 지옥의 불처럼 뜨거웠다.

하얗게 말라붙은 풀과 흙 위로 한 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쿠야는 늙은 거북처럼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이마와 인중을 지나 턱밑으로 흘러내리는 검은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저게 뭘까? 아지랑이 너머로 먹구름 한 조각을 볼 수 있었다. 검은 구름 주위를 두 마리의 독수리가 호위했다. 대가리가 발갛게 벗겨진 놈들이었다. 머리가 벗겨진 짐승을 믿지 말거라, 촌장은 말하곤 했다. 말씀을 듣고 올려다본 촌장의 머리는… 애매하다 할 수 있었다. 이마의 범위에 대한 정밀한 합의가 필요하달까. 촌장은 담비 가죽을 둘러 쉬이 머리를 드러내지 않았고 아이들은 그런 촌장을 놀려댔다. 그때마다 촌장은 소탈하게 웃으며 제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그럴 수 있다. 쿠야는 생각했다.

독수리의 울음이 창공을 찢었다. 울음의 성격으로 보아 능히, 쓰러진 생명의 눈알을 파먹고 뒤틀린 골해의 찌꺼기를 핥을 짐승이었다. 고약한 놈들. 욕지거리를 내뱉자마자, 날짐승이 공중에서 점멸(點滅)했다. 쿠야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끔뻑였다. 구름은 말이 없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그럴 수… 있나? 쿠야는 눈을 비볐다.

 

쿠야는 14살이 되었다. 언뜻 보이기에 대단치 않은 일일 수도 있겠으나 그바사에서 14살은 시구이를 앞두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시구이를 받는다는 것은 전사가 된다는 것이었고, 전사가 된다 하면 이제 어른이라는 소리였다. 이제 어른이라는 건 더 이상 시구이를 받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니 과연 희소식이었으나 기실 문제란 어른이 되려면 시구이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사실이 쿠야는 늘 탐탁지 않았다. 시구이를 받는다고 정말 어른이 되는 걸까? 시구이를 받아야만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쿠야는 시구이가 싫었다.

그바사를 지키는 전사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물론 근사한 일이었다. 쿠야 역시 그바사를 사랑했다.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마을에 대한 전설을 들으며 자랐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였으나 매번 반복해 듣기를 청하곤 했다.

먼 옛날, 그바사는 소녀의 이름이었다. 천지를 창조한 폰가 신과 가로 신이 소녀를 사랑했다. 언젠가 그들은 소녀 앞에 나란히 서서 연정을 고백했다. 가로 신은 드넓은 하늘과 따뜻한 태양 빛을 영원의 이름 아래 약조했다. 대답 대신 소녀는 손을 들어 하얀 구름 조각을 가리키며 까르르 웃었다. 덩달아 뺨을 붉힌 가로 신과 함께 하늘에도 노을이 졌다. 폰가 신은 푸른 들녘과 울창한 숲을 선물하리라 가슴을 펴고 호언했다. 소녀는 다만 허리를 숙여 들꽃 하나를 뽑아 들고는 눈을 감았다. 폰가 신이 숨을 죽이자 풀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고요도 소란도 있는 그대로 만족스러워 더할 나위 없는 시절이었다.

소녀는 강에 빠져 죽었다. 조각 구름을 따라 걷다가 발을 헛디뎠다는 얘기도 있었고, 노란 꽃을 꺾다가 손을 놓쳤다는 말도 있었다. 소문은 무성했으나 진실은 설사 신이라 해도 알 수 없었다. 가로 신은 분노했고 폰가 신은 비통했다. 그들은 서로를 피했다. 폰가 신이 자리를 비우면 가로 신의 분노가 대지를 데워 강을 말렸다. 강이 바싹 마르면 얼마 안 가 울부짖는 폰가 신의 눈물이 강을 채웠다. 이내 강이 넘치면 다시 가로 신이 나타났다. 그렇게 강은 반년을 주기로 마르고 넘치기를 반복했다. 사람들은 강에 ‘그바사’라는 이름을 붙여 소녀를 기렸다. 두 신의 정념이 재앙이 되어 저들을 덮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마을도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그바사 마을에는 그바사 강이 흘렀다. 하지만

시구이는 싫어. 밈바 누나를 죽였잖아.

쿠야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밈바 동생인 촐루도 씩씩하게 전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잖니. 밈바도 너희들이 용감한 전사가 되기를 바랐을 거야… 어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대꾸도 없이 집 밖으로 사라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어머니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걱정 마라, 츠와나. 제 아비를 닮아서 강하고 따뜻한 아이잖냐. 젊은 과부를 다독인 것은 촌장이었다. 온 마을의 존경과 장구한 세월의 인자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츠와나는 진심으로 웃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미소가, 더없이 다행스러운 것이라고 촌장은 생각했다.

촌장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모르긴 몰라도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 무렵부터 전해 내려왔을 전통은 오늘날 아이들에게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재앙이 되어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촌장도 힐난을 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밈바는 가장 최근의 사례였고 그새 벌써 다섯 해가 지났다. 수십 번의 우기가 지나고 역시 수십 번의 건기가 다가오는 동안 노인은 숱한 죽음을 보아왔다. 대게는 여아들이었으나 남아도 더러 있었다. 어린 핏덩이들은 성인의 문턱에서 끝내 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촌장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대도, 저 나약한 아낙도 그렇게 자라오지 않았는가. 그런 말씀을… 폰가 신도, 가로 신도 내려주지 않아 노인은 언제나 가슴 한 쪽이 먹먹한 것이었다. 노인은 허공을 응시했다.

올 건기에는 시구이가 제때 거행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머, 촌장님. 다행이라뇨. ‘그일’ 때문에 온 마을이 벌벌 떨고 있는 걸요. 저는 혹여나 쿠야가 ‘차라리 잘된 일’ 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어요.

화들짝 손을 들어 입을 가리는 츠와나의 반응에도 촌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선을 유지했다.

쿠야 녀석이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어쩔 수 있는 일이지. 츠와나, 자식은 바오밥나무라네.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누구도, 제아무리 양 팔을 벌린다고 해서 그 둘레를 잴 수 없네. 그리고… 썩지 않는 나무에서는 절대 버섯이 자라지 않는다네. 성장한다는 것은 그래서, 부패한다는 것이지.

마지막 말을 촌장은 혀 밑으로 밀어 두었다. 일부러, 그악스런 진실을 눈먼 사람들의 코앞에 대고 흔들어 댈 필요는 없었다. 진실이라. 지그시 감긴 눈가에서 일순간 번뜩임이 일었으나, 츠와나는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쿠야는 독수리의 잔해를 찾아 열심히 눈을 굴렸다. 성과는 없었다. 단념하고 걸음을 떼려는 찰나, 등 뒤에서 크게 번쩍, 빛이 일었다. 돌아본 쿠야가 사태를 알아차릴 새도 없이, 낙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광선의 포화 앞에 소년은 앞을 보는 일조차 버거워 주저앉은 채 질끈 눈을 감았다. 다만, 우레가 없어 벼락은 고요했다. 한참을 번쩍인 구름은 대지의 절반을 검게 태웠다. 쓰러진 생명도 뒤틀린 골해도 잿더미가 되었을 터였다. 눈가가 시큰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귀도 먹먹했다. 소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소리가 너무 커서 멀어버린 것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쿠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별일이 다 있군, 어린 나이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릎 언저리에 들러붙은 하얀 얼룩을 연신 문지르는데 따닥, 소리가 났다. 쿠야는 허리를 펴 주위를 살폈다. 검게 탔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물소 떼 같은 화마(火魔)가 평원을 뒤덮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온전히 살아남지 못한 검은 땅을 불은 종횡으로 가로질렀다. 그 방향과 범위에서 그바사도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쿠야는 정신을 차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에 알려야 해. 허기진 불길은 닥치는 대로 대지를 집어삼켰다. 숨이 금세 턱 끝까지 차올랐다. 좀처럼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는 느낌과 돌대가리 촐루 녀석의 철딱서니 없는 웃음소리 따위가 황망한 와중에도 머릿속을 어지러이 매웠다. 매캐한 불 냄새가 온몸을 휘감았다.

쿠야는 발이 걸렸고 넘어져 세 바퀴 반을 굴렀다. 갈비뼈가 세 개는 나간 양 가슴팍이 욱신거렸다. 흙먼지를 한 줌 쥐어 피를 닦았다. 망할 촐루 자식, 괜한 불만을 뱉으면서도 결국은 스스로 바보 같은 생각을 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다시 땅을 박차려는데 덥석, 뭔가 발목을 움켜쥐었다. 땅을 비집고 올라온 팔이 쿠야를 붙잡고 있었다. 검고 지저분했으나 단단한 손이었다. 벌레 같은 힘줄이 꿈틀거렸다. 쿠야는 비명을 질렀지만 목소리는 제 귓가에도 닿지 못하고 입술 언저리에서 바스러졌다. 불길은 흥분한 불량배 무리처럼 들썩이며 쿠야를 에워 쌓다. 발목을 움켜쥔 손아귀 탓에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엄마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뛰쳐나온 대가치고는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문자 그대로 지옥과 같은 광경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쿠야는 마냥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재앙의 틈바구니에서 쿠야는 어스름한 형상의 움직임을 보았다. 여러모로 사방이 뜨거운 상황이었으나 순간 간담이 서늘했다. 불길 너머로 흐릿한 그림자가 소년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괴수 같기도 하고 한 무리의 사람 같기도 했다. 땅이 흔들렸고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발목은 끊어질 것 같았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쿠야는 눈을 부릅떴고

발작하듯 깨어났다. 악몽이었다. 손을 들어 식은땀과 굳은 침을 동시에 훔쳐야 했다. 대체 무엇이었을까? 비록 꿈속이었으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듯도 했다. 쿠야는 고개를 흔들며 마른침을 삼켰다. 툭,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쿠야! 어디 있었어? 한참을 찾았잖아.

돌대가리 촐루 녀석이었다. 울컥 영문을 알 수 없는 울화가 치밀었으나 진정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와 초롱초롱한 눈동자 중 어느 쪽이 더 눈이 부신지 가늠하기 힘들 만큼 촐루는 흥분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로구나, 쿠야는 직감했다. 왜, 쿠야는 어깨를 문지르며 짧게 물었다.

어서 와. ‘수색대’가 돌아왔어! 곧 셉베이라가 소집될 거야. 쿠야를 바로 앞에 두고 촐루는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쿠야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덩달아 고조되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진정 좀 해, 촐루. 그래서, 뭔가 발견하긴 한 거야?

응! 니칸 형이 쿠옹고 아저씨의 ‘유골’을 찾아냈어.

유골을? 정말이야?

되묻는 쿠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3.

촐루의 말과 달리 – 그럼 그렇지, 촐루 녀석, 쿠야는 생각했다 – 유골은 쿠옹고 아저씨의 것이 아니었다. 어른의 팔뚝만 한 짐승의 엄니였다. 그바사 강 일대를 뒤지던 수색대는 엄니를 쿠옹고가 제 ‘목숨처럼’ 애지중지하던 어망 근처에서 발견했다.

하마(河馬)로구나.

촌장은 뼈를 받아 들고는 담담하게 선언했다. 뭣이여. 올 건기도 하마여? 역시 내가 말했잖는가. 조심해야 쓴당게. 아이고야 이제 강 주변은 정말로 얼씬도 못하겄구마이.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란스럽게 촌장의 말을 받았다. 어수선한 좌중을 앞에 두고 노인은 침통한 얼굴로 뼈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쿠옹고는 아홉 번째 희생자였다. 횟수로는 네 번째였으나 쪽수로는 아홉 명이었다. 그는 그바사의 어부였고 그들의 오랜 어획 구역은 사실 하마 서식지와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종종 하마의 습격을 받거나 악어 밥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올 건기가 유독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터였다.

시작은 유난히 짧았던 우기의 말엽이었다. 잦아들던 빗줄기가 마침내 그쳤고, 햇살이 맑게 비추어 그바사 사람들의 입가에 모처럼 미소를 그려 넣은 날이었다. 쿠야를 비롯해 온 동네의 아이들이 강으로 향했고, 마을의 전사였던 후투 형제가 앞장을 섰다. 병든 노모에게 메기를 잡아다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배를 띄우던 모습을 다들 기억하고 있었다. 헤엄 실력이 형편없는 촐루를 두 번이나 뭍으로 꺼내 주고 숨을 돌리는 중이었던 쿠야는 꽤 멀리까지 나아간 후투 형제와 눈이 마주쳤다. 쿠야가 손을 흔들자 형 야웨후투가 환하게 웃어 보이며 인사를 받았다. 상당한 거리였으나 환한 미소가 틀림없다고 쿠야는 생각했다.

후투 형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바사의 전사들은 수색대를 꾸려 세 차례나 그바사 강 유역을 헤집었으나 머리털 한 올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하늘이 망자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한 듯 억수로 퍼붓던 아침, 그바사 사람들은 노모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슬픔의 뒷맛이 찝찝했으나 그바사는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모르긴 몰라도 결국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마을이 다시 애통한 침묵에 잠긴 것은 얼마 뒤 에토오 일가가 한꺼번에 사라졌을 때의 일이다. 대대로 어업에 조예가 깊었던 에토오 가족은 물길을 읽는 관록부터 작살과 어망을 제작하는 솜씨까지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장인 집안이었다. 아직도 사람들은 그 귀신같은 양반이 어쩌다 강에 당하고 만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막 환절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강바닥을 쓸기만 해도 온 마을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에토오 아저씨는 망을 들쳐 메었다. 아저씨의 두 딸이 뒤따랐고, 몸조심하게! 그바사 사람들은 웃는 낯으로 배웅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수색대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아니 찾아내기는커녕 마을의 전사였던 비툼무와 캄바, 투르키나가 수색 도중 실종되었고, 끝내 쿠옹고 아저씨마저 자취를 감추었을 때는 어느 누구도 그바사 강 근처에 접근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원인은 알 수 없었으나

코뿔소 언덕까진 찾아보지 않았잖아요 아직.

셉베이라에서 제안이 나왔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꼬박 하루를 걸어야 당도할 수 있는 강의 중심부였다. 각종 야생 동물이 우글거리는 곳이었고 맹수나 코끼리 무리의 동세의 살피기 위해 각 환절기에만 한 차례씩 순방을 도는 지역이었다. 쿠야도 어렸을 적에 수색대를 따라나섰다가 미아가 된 적이 있는 곳이었다. 촌장의 승인이 떨어졌고 정예부대가 편성되었다. 짐을 꾸리면서도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던 니칸의 눈빛을 쿠야는 기억했다.

뭐야, 형 겁먹은 거야?

조용히 해, 쿠야. 니칸 형은 너랑 달리 코뿔소 언덕이 처음이란 말이야. 떨리는 게 당연하다고. 촐루는 말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정말이지 눈치라곤 딱새 발톱만큼도 없는 놈이다. 때마침 물을 길으러 온 트위 누나가 아니었다면 촐루는 열 번째 실종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시끄러, 이것들아.

사흘이 지났고, 니칸 형은 쿠옹고 아저씨의 어망과 하마의 엄니를 찾아 돌아왔다.

 

비록 발견한 건 뼛조각뿐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언덕 근처의 다른 동물들은 죄다 물을 찾아 일찍 떠난 모양새였습니다. 강도 눈에 띄게 메말라 있었구요. 촌장님도 아시다시피 이번 가뭄이 오죽 독하잖습니까? 그럼에도 강어귀에는 배출된 지 얼마 안 된 더운 똥 덩어리가 수북하더구먼요. 촌장님 말씀대로, 하마의 것이겠지요.

촌장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점잖게 입을 열었다. 떠날 시기를 놓친 놈들이 남아서 사람을 덮치는 모양이로군.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확인했는가?

아니요. 염병할 똥 덩어리만 주구장창 봤지 실제 살아 움직이는 놈은 한 놈도 못 봤습니다. 그 동네가 워낙 넓잖습니까? 어쩌 보면 다행스런 일이기도 허구요. 보고를 올리는 전사는 손사래를 쳤다. 용맹함과 생존은 별개의 문제라고 못을 박는 듯한 행동이었다.

어망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가? 거적때기나, 아니면 뼛조각이라도 말일세.

아무렴요. 잠도 아껴가면서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뒤졌다니까요. 어망 하나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다 부서진 채로. 벌써… 악어 밥이, 아니 하마 밥이 되어븐 것이죠. 아니 그나저나 하마도 사람 고기를 먹나? 니칸이 너는 알고 있었냐?

아, 아니요. 니칸은 쿠옹고의 어망을 손에 쥔 채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이상허긴 해. 쿠옹고 그 양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흔적도 일절 없었으니께. 아, 그러고보니 발자국은 몇 개 봤네요, 촌장님. 사람 발자국 말이어요. 사이즈가 딱… 우리 니칸이만 했응께로, 아마도… 얼마 안 된 것이… 그 캄바랑 거시기… 우리 애덜… 갸들이었나 봐요… 이런 씨벌.

수색대장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몰려든 전사들이 그를 다독였다. 아따 씨벌… 울지 마요, 대장… 이윽고 그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방귀 같은 울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좁다란 움집에 들어찬 곡소리에 풀벌레도 노래를 삼가는 듯했다. 촌장은 말이 없었다. 정신을 추스른 전사들이 물러가고 달빛에 젖은 그림자가 사그라질 무렵이었다. 별안간, 촌장의 가슴팍이 흔들렸다. 밤을 다독이듯 흉부를 쓸어내리며 노인은 무거운 숨을 토했다. 소리가 마치, 더운 똥을 쏟아내는 하마 같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촌장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아직 공기가 서늘했으나 사람들은 빠짐없이 모여들었다. 쿠야도 퉁퉁 부은 두 눈을 문지르며 어머니 옆에 섰다. 촌장의 눈에 짙은 그늘이 졌다. 그는 머리에 두른 담비 가죽을 풀어 손에 쥐었다. 사방을 훑는 촌장의 시선에 사람들은 잠 기운이 달아나는 듯 했다. 노인은 입을 연 채 한동안 소리를 내지 않았다.

사랑하는 그바사의 가족 여러분. 우리는 도합 9명의 ‘우리들’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아버지, 다정한 동무, 사랑스러운 딸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족의 주검조차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피와 살은 망실되었을 테지만 그들의 영혼은, 폰가 신의 품으로 돌아가 깊은 잠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요. 폰가 신도 그바사 강의 괴수로부터 우리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저 흉포한 하마 무리로부터 말입니다.

노인은 노란 엄니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여러분. 진실은 고통입니다. 신으로부터 온 고통이죠. 때로 그 무게를, 추위를 우리는 기꺼이 견뎌내야 합니다. 견딘다는 것은 짐을 나눠지고 버티는 것입니다. 쓰러진 이웃을 두고 섣불리 걸음을 떼지 않는 것이고 멈춰 서서 기다려주는 것이며 손을 잡고 천천히 함께, 걷는 것입니다.

마을을 휘감은 새벽 공기와 함께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사자가 아니라면 사자에 맞설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분노는 또 다른 상실입니다. 여러분이 섣부른 분노에 매몰돼 자신을 해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힘없는 늙은이가 ‘간곡히’ 당부하겠습니다. 화는 또 다른 화를 부를 뿐입니다. 강을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가족의 곁을 지키십시오. 저는… 더 이상 ‘우리들’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말을 마치고 촌장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노인의 등을 앞에 두고 군중은 흐느꼈다. 더러는 훌쩍였고, 더러는 주저앉으려는 다리에 힘을 주느라 몸을 떨었으며, 더러는 눈시울을 붉혔고, 몇몇은 코를 흘렸다. 노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조렸다. 막 떠오른 태양이 노인의 목소리에 맞추어 대지를 희붐하게 밝히었다. 새벽을 적시었던 이슬이 노인의 눈가에도 몇 방울 영롱하게 맺혔다. 동녘의 빛을 받아 옅게 반짝, 했으나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4.

남자는 허리를 숙였다. 어른의 팔뚝만 한 엄니였다. 그는 집어 든 뼈를 유심히 살폈다. 지독하구만. 지독한 크기라고 그는 생각했다. 주인 되는 놈의 턱 힘 따위를 짐작해보았을 때 어른 머리 정도는 썩은 수박처럼 으깨버릴 크기였다. 아니지, 이 정도면 악어 한 마리쯤은 쉬이 두 동강을 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남자는 나지막한 감탄사를 연발하며 뼈를 챙겨 넣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 밑의 자갈이 달그락, 했다.

그가 그바사 강을 찾아온 것은 우기가 머지않았다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북부의 사막과 동부의 해안을 지나 밀림과 초원 지대를 헤집고 내려온 그가 그바사 강 하류를 지날 무렵이면 대지를 하얗게 태우던 더위도 기세가 한풀 꺾이곤 했다. 남자의 발 밑에서 자갈들이 부지런히 달그락달그락, 했다. 머지않아 다시 비가 내릴 것이다. 멈춰 선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폭풍이 몰려오겠는걸.

그러고는 씩 웃는 것이었다.

 

남자가 그바사에 당도한 시점은 희생자들의 제(祭)를 마친 날로부터 정확히 두 번, 달이 차고 꺼지기를 반복한 다음 날이었다. 벌건 대낮이었으나 마을은 조용했다. 그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발 밑에서는 아무것도 달그락, 거리지 않았고 매캐한 먼지만이 휘날렸다.

그루메테 아저씨!

엉성한 몸짓으로 마을을 서성이던 남자를 발견한 것은 아이들이었다. 촐루랑 쿠야구나! 그루메테라는 이름의 남자는 아이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헝클어뜨릴 머리카락은 없었지만 그는 반가움에 손을 휘저어 보았다. 촐루는 이제 오줌싸개 딱지 좀 뗐냐? 나 원 드르렁 코를 골면서 어찌나 시원하게 갈겨대던지. 코끼리인 줄 알았다 인마. 쿠야는 가만 보자… 시구이를 받을 때가 됐을 텐데. 아직 아닌가? 어머니는 잘 계시지? 마을 어른들이 한 명도 안 뵈네, 뭔 일이여? 그루메테는 이방인 특유의 이채로운 어투로 말을 쏟아냈다. 쿠야는 어느 장단에 맞추어 대답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으나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는 것이었다. 촐루 역시 코끼리 이야기를 칭찬으로 들어먹었는지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다들 밖에 나가셨어요. 가뭄이 길어져서 콩이 다 말라버렸거든요. 니칸 형이랑 쉬투 아저씨랑, 또 아줌마들까지 다 같이 나갔어요. 물소 시체라도 찾아오겠다고.

사정을 설명하는 쿠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차 옅어졌다. 얼추 짐작이 갔지만 그루메테는 시치미를 떼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상하네. 물소는 고사하고 하다 못해 쥐새끼 뼈다귀라도 건지려면 그바사 강 쪽으로 가야 할 텐데, 아저씨가 그 짝에서 오는 길이거든. 아무도 없던데 어디 로들 가신 거여?

강 쪽으로는 가면 안돼요! 하마가 있거든요. 쿠야가 눈을 피하는 사이 촐루가 잽싸게 대답했다.

하마가?

네, 촌장님이 절대루, 저얼대루 강 근처로는 가지 말라고 하셨으요.

허, 그루메테가 내뱉은 탄식이 먼지와 뒤섞였다. 그루메테는 말없이 턱을 씰룩이며 마을을 둘러보았다. 회백색의 벽들은 햇볕에 바싹 타 갈라졌고 그림자는 짙었다. 마을의 고요함이 바로 그 어둠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이인은 비로소 알아차렸다. 그루메테는 입술을 매만지며 서성였다. 허리춤에 넣어둔 길쭉한 엄니가 옆구리를 찔러왔다. 쿠야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다시금 웃어 보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중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쿠야, 촌장님은 댁에 계시겠지? 쿠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저씨… 왜 그러냐 쿠야?

하마도 사람 고기를 먹나요?

그루메테는 무릎을 굽혀 쿠야의 눈에 높이를 맞추었다. 하마를 본 적이 있니?

아니요. 이야기만 들었어요. 짧은 다리에… 기다란 몸통에… 뒤룩뒤룩 살이 오른 두툼한 거죽을 두르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헤엄을 치고… 걸려드는 건 전부 턱과 이빨로 부숴버리는 괴물이라고요.

잘 알고 있구나, 놈들은 저 가로신의 창조물 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놈들이란다. 교활하고 난폭하기로는 하늘 아래서 제일이지. 절대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 알았니 쿠야? 어이, 아저씨 말 듣고 있냐, 촐루?

 

그날 저녁, 그루메테를 위한 환영식이 열렸다. 초목과 강으로 둘러 쌓인 후미진 마을에 외지인이 찾아오는 일도 매우 드물었거니와 벌써 다섯 번이 넘게 비슷한 시기에 죽지도 않고 돌아오는 유랑민으로는 그루메테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바사에서는 평생 구경도 해보지 못할 비상한 물건들을 치렁치렁 달고 다니며 재담을 늘어놓는 모험가 그루메테를 미워하는 것은, 마을 사람 모두에게 과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모닥불 옆에 궁둥이를 턱, 하니 걸치고 앉은 그루메테 근처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저 북쪽 사막에는 말입니다, 어른 60명을 머리 위로 세워 놓은 것만큼 큰 바위 산이 있습니다. 전부 다 사람이 만든 것이지요. 그 모래밭 한가운데에 집채 만한 돌덩어리를 일일이 옮겨와서요. 워따, 참말이지요 그럼. 에헤이… 벌써부터 못 믿으면 입 싹 닫아야지 뭐. 아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아낙들도 입꼬리를 올린 채 그윽하게 귀를 기울였다. 저 양반이 허풍은 한 가닥 혀 아주, 응? 대장장이 쉬투 아저씨는 미심쩍다는 듯 한 소리 얹으면서도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바사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굶주림과 불안의 굴레에서 벗어나 품어보는 미소였다.

자네 덕분에 마을이 잠시나마 활기를 되찾았구먼. 찾아와 줘서 고맙네. 분위기가 잦아들고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서자 촌장은 그루메테를 불러들였다.

아니어라, 족보 없는 떠돌아 댕기는 그지 새끼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이뻐해 주는 사람들한테 감사하죠. 그런 사람들 덕분에 제가 이래 팔팔하니 살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루메테는 손사래를 쳤고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접이 시원치 않았을 것이네만 자네가 이해하게. 마을 사정이 이래 놔서… 가뭄이 오죽 길어야지 말인가. 노인부터 애들까지 누구 하나 배부른 자가 없다네. 나 하나 굶주리는 고통이야 다 죽어가는 늙은이 장 치르는 셈 치겠지만, 어디 새파랗게 어린 피붙이들 말라가는 뱃가죽을 지켜보는 일이 부모한테 보통 일이겠는가? 다들 저래 웃고 있어도 속은 죄다 문드러져 있을 것이야. 아따, 촌장님 말씀도 참… 넉살 좋게 말을 받은 그루메테는 숨을 고르며 소리를 낮추었다. 대충 들었습니다, 영감님.

하마가

나타나버린 것이죠? 노인은 말이 없었고 그루메테는 헛기침을 했다.

어디선가 한 줄기 벌레 울음소리 같은 것이 밤하늘을 가로질러 공기 중으로 스미었다.

 

5.

열흘이나 지났건만 아무 소식도 없네 그랴.

쉬투 아저씨가 한숨을 짓자 앙상한 광대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그루메테 그 양반 말만 철썩 같이 믿고 움직인 것이 화근이었어,라고 투덜대는 이들도 한 두 명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 참 이 양반아 언제까지고 두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그랬다간 마을 사람들이 다 굶어 죽도록 강 근처에는 얼씬도 못할 것이네. 물론, 다수의 의견은 그랬다. 하지만 강 근처에는 얼씬도 못한 채 다 같이 굶어 죽어가는 건 지금도 피차일반이제 안그려, 라는 반론 역시 가능했다. 니기미, 며칠이나 지났다고. 저 인간은 참을성이라곤 쥐 똥만큼도 없구만. 일단은 아그들이 출정했응께 기다려 봐야 할 것 아니여. 이윽고,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옳다구나, 밥그릇을 집어던지며 피골이 상접한 늙은이들은 때아닌 혈기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아직 덜 굶었나, 싸울 힘은 있나 보오. 와야 아줌마가 혀를 찼다.

탈인즉, 이러했다. 환영식이 끝난 밤 그루메테가 촌장에게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썩은 고기와 말라비틀어진 풀 때기로 연명하며 기약도 없는 우기를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제거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마 사냥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루메테에 따르면 본인이 강줄기를 따라 내려오면서 빠짐없이 관찰한 결과, 남아 있는 놈들은 시기를 맞추어 무리와 함께 이동하지 못한 늙고 병든 버려진 수컷 몇 마리가 전부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을의 전 병력을 동원할 경우 소탕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루메테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와 마을의 수색대가 발견한 부러진 엄니는 노쇠함의 징표였다. 생기가 왕성한 하마의 이빨이 이유도 없이 통째로 뽑혀 나와 강가를 나뒹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노인은 정좌를 튼 채로 밤을 꼬박 새웠다. 분명 지금처럼 버티기로 일관하다가는 하마의 습격으로 잃은 사람들의 몇 배를 아사자로 만들고 말 것이었다.

이튿날, 촌장은 그루메테의 제안을 공포했다.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그바사 사람들이 대체로 수긍했던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마을은 임계점에 다다라 있었다. 이례적인 가뭄이었고 사람들의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마을의 어른들과 몇몇 전사들, 그리고 그루메테가 모여 촌장과 의견을 나누었고 다음날 아침, 출정식이 거행되었다. 40여 명의 전사들이 집결했고 그루메테가 동행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기대와 우려와 심려와 격려와 염려와 염원과 불안과 희망과 소망과 절망과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표정을 한데 나누며 마을의 미래를 배웅했다. 촌장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열흘이 지났다.

나도 같이 갔어야 하는 건데. 쿠야가 입술을 내밀며 바닥을 찼다.

쿠야, 우리는 시구이를 받지 않았잖아. 게다가 나는 수영도 잘 못한단 말이야. 촐루가 멍청한 눈을 끔뻑이며 지적했다.

시구이 같은 거 평생 안 받을 거야! 까짓 거 받지 않아도 어른은 어른이라고. 쿠야는 분개했다.

바보야, 그럼 너는 평생 전사가 될 수 없어. 하마를 잡을 수 없다구. 우리 누나가 죽기 전에 뭐라고 한 줄 알아? 촐루한테 바보 소리를 들은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쿠야는 잠자코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뭔데?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던 촐루는 폴짝, 뛰어내리더니 손을 털었다.

시구이를 받은 다음날부터 누나는 매일 한 사발씩 피를 흘렸어. 온 집안이 비린내와 곪아 터진 고름 냄새로 진동을 했지. 누나는 비명을 지르다 지쳐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어. 나는 누나한테 울면서 말했어. 이렇게 아프고 힘든 거라면 시구이 같은 거 받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누나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촐루, 아프고 힘든 걸 이겨내야만 어른이 될 수 있어. 누나는 지금 가로 신의 시험을 받고 있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낼 만한 힘이 있는지 보려는 거지. 고통을 이겨내고 어른이 된 사람만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거든. 누나가 어른이 되지 못하면 촐루가 누나를 지켜줘야지, 안 그래? 밤새 신음하던 누나는 그 날 새벽, 의식을 잃었고 나는 바로 옆에서 잠이 들었지. 그다음은… 너도 알잖아. 담담하게 말을 마친 촐루는 뒤돌아 몇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는 새벽녘에 잠이 깬 사람처럼 부르르 떨며 오줌을 누었다. 오줌 줄기는 한참 동안 끊기지 않았다.

알다마다, 쿠야는 선명하게 기억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밈바의 시체를 부여잡고 통 놓질 않는 탓에 장정이 셋이나 들러붙어 떼어 놓아야 했던 촐루의 모습을. 무엇보다 파르르 떨어대던 입술과 빛을 잃어 눈물조차 새어 나오지 않던 그 눈을 쿠야는 잊을 수 없었다. ‘돌대가리 촐루’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땅을 적시고 넘쳐흐르는 물줄기를 조용히 보고 있던 쿠야가 입을 열었다.

촐루… 잡으러 가자, 하마. 그바사를 지켜내야지.

물줄기가 잦아들자 촐루는 허리를 뒤틀며 탁탁탁 세 번, 움켜쥔 손을 털었다.

그래, 좋아.

 

마을의 반목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었으니 실은 지당한 수순이었다. 기다리지 않고 섣불리 나선 것을 탓했던 이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부르짖었고,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었지 않았느냐고 변호하던 자들은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고 언성을 높였다. 아니 내가 왕년에 사냥을 좀 해봐서 아는데, 본래 맹수라는 것들은 마냥 때려잡는다고 하루아침에 굴복하는 놈들이 아니여. 그 놈들도 일종의 전사거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제. 음마마 뭔 소리당가. 저 양반 한 평생을 바나나 나무만 키움시로 하루 반나절씩 누워 가지고 빌빌대는 꼴을 못 본 사람이 여기 어딨다고 수박씨를 까는가. 조악한 거짓부렁과 변변치 못한 허풍이 난립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편과 소리를 갈랐다.

그루메테의 의견에 무작정 따른 것은 문제가 있으나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 라는 태도는 온건파였고, 시방 지금 우리 주민들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손가락만 빨고 앉아 있자고 하는 인간들은 정신머리가 어떻게 생겨먹은 거여 다 조져 부러 썅, 이라는 외침은 급진파였다. 뿐만 아니라, 전례 없는 흉작이 들었는데 강가에서 사람 몇 죽어나간 것이 대수인가, 전부 집어치우고 기우제부터 지내자니께, 소수의 주술파까지 족히 열이 넘는 여론들의 각축전이 벌어졌다. 고성을 넘어 이따금 주먹이 오고 가기도 했으나 닷새를 굶은 인간과 이레를 굶은 인간은 서로를 효과적으로 타격하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서히 깨달아야만 했다. 소란을 먹을 수는 없다는 것을.

도톰하니 살이 올라봐야 애벌레로 어디 코끼리 간에 기별이라도 가겠소? 촌장님한테 말씀드립시다, 어쩌면 쓰겄는지. 다들 동의하시지라. 그런 소리가 나오기가 무섭게, 싸게 싸게 혀 배고파 죽겄네 기냥, 민초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 피로와 허기를 통해 일궈낸 평화였다. 아니 그나저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촌장님이 영 조용하시네요, 마을이 이 난리인데. 뒤늦게 그런 통찰이 제기되었고, 늙은 양반 요 며칠 마음고생하더니 혼자 앓아누우신 거 아니여? 우려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기우와 청승은 들불처럼 번져 사람들의 걸음을 재촉했다. 노인의 집에 먹을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언제나 제 밥그릇보다는 다른 이들의 곡기를 먼저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싱숭생숭한 걸음을 내닫는 군중의 낯에 약속이나 한 듯 부끄러움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쓰잘머리 없는 입씨름이나 하면서 도리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만에 하나, 늦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과 함께 사람들은 땀을 흘렸다.

촌장님!

열어젖힌 문소리가 무색하게도 노인의 집은 고요했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은 고사하고 살다 간 흔적조차 찾기 힘든 단출한 공간이었다. 촌장이 아끼던 술잔이 정갈하게 뒤집혀 정돈되어 있었고 서너 자루의 지팡이도 가지런했다. 안 계시는디? 몇 사람이 더 들어와 주변을 뒤적였으나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바닥 한가운데

팔뚝만 한 짐승의 엄니가 두 개, 놓여 있었다.

 

6.

얼마나 흘렀을까. 칠흑 같았던 그림자가 기울어 흐릿해졌다. 쿠야는 실로 오랜만에 고개를 들어 까마득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언덕 너머의 하늘이 잔뜩 움츠린 채 꿈틀댔다. 이따금 불어오는 남서풍이 땀을 식히며 심상찮은 냉기를 전해왔다.

비가 오려나 봐.

시종 거친 숨을 몰아 쉬던 촐루도 허리를 폈다. 십사 년 살아온 세월을 모두 합한 것만큼 많은 걸음을 옮겼다는 생각이었다. 그바사 마을은 보이지 않았고 황량하게 메마른 강줄기도 더는 익숙한 모습이 아니었다. 벌써 사흘을 걸었다. 이틀 차에 당도한 코뿔소 언덕에서 그들은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선발 전사들의 발자국도 하마 무리의 더운 똥 무더기도 보이지 않았다.

쿠야와 촐루는 가장 깊었을 강의 밑바닥 한 줌 남짓한 웅덩이에서 목을 축였다. 대가리가 발갛게 벗겨진 독수리 두어 마리가 따라다니며 머리 위를 맴돌았다. 저 놈들이 먼저 지쳐서 내려온다면 포식을 할 수 있을 텐데. 없는 기운에도 촐루는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슬쩍, 올려다본 쿠야는 어딘가 낯이 익은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띄게 구겨진 하늘을 피해 그들은 바위 언덕 밑에 자리를 잡았다. 변비를 앓는 코끼리처럼 하늘빛은 어두웠다. 더 이상 든 것도 없는 보따리를 풀고 촐루는 머리를 뉘었다. 쓰러지듯 눕는 촐루 옆에 앉아 쿠야도 등을 기대었다.

바위 산을 넘어가면 아마, 바다가 나올 거야. 예전에 엄마랑 가본 적이 있거든.

돌아누운 촐루를 향해 쿠야는 입을 열었다.

엄마, 그리고 촌장님이랑 바다에 갔었어. 무더운 날이었는데, 엄마가 그바사 강 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은 강을 보여주겠다고 했지. 하루도 안되어서 따라나선 걸 후회했지만 여하 간에 바다는… 정말 굉장했어. 지나온 모든 길을 모아 밀어 넣어도 꼬르륵하고 잠겨버릴 만큼 넓고 깊었어. 저 건너편에는 뭐가 있냐고 묻자 촌장님은 여기처럼 또 다른 ‘땅’이 있다고 말씀하셨어. 나는 깜짝 놀랐지. 그래서 이렇게 물었어, 거기도… 때맞추어 촐루가 우렁차게 코를 골았다. 쿠야는 입을 다물고는 웅크린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쿠야, 일어나. 저것 좀 봐.

기분 나쁠 정도로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촐루의 숨결에 쿠야는 오만상을 쓰며 깨어났다. 뭔데 그래? 쉿! 조용히 하고 저길 좀 봐봐. 촐루의 손짓은 다급했다.

바위 너머 바깥에서 발소리, 그리고 사람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쿠야는 눈곱을 마저 떼어냈다. 그루메테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구나, 라는 반가움도 잠시,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지? 몸을 조금 움직이자 대화 상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니, 쿠야는 그 역시 사람이라 불러야 할지 잠시 망설여야 했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하얀’ 것이었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형형색색의 천조각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다. 가만 보니 게 중 몇 개는 그루메테가 두르고 다녔던 물건들과 닮은 듯도 했다. 연이어 한 무리의 하얀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들은 까맣고 윤이 나는 기다란 지팡이를 한 손에 든 채 느릿느릿 거닐며 수다를 떨어댔다. 멀리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낯선 비린내가 코 끝을 찔렀다.

대체 저게 뭐지? 촐루가 얼이 빠진 듯 물었다. 쿠야는 빨려 들어갈 듯 몸을 일으켜 거의 서있다시피 했다. 대답 대신 그는 꿀꺽 고인 침을 삼켰다. 환하게 웃던 그루메테가 뒤를 향해 손짓했다. 한 무리의 그바사 전사들이 나타났다. 손과 발이 모두 묶여 있었고 입은 큼직한 두건으로 가려진 상태였다. 숫자가 얼추 50은 되어 보였다. 헐벗은 몸과 얼굴에 상처가 가득했고 쇠고랑에 피부가 쓸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쿠야와 촐루는 익숙한 얼굴들 사이로 니칸을 찾아냈다. 그는 사람보다는 시체에 가까울 법한 눈을 한 채 발을 질질 끌고 있었다. 쿠야의 손이 떨려왔다.

서너 명의 하얀 사람들이 행렬을 정비하듯 검은 지팡이로 사람들을 툭툭 밀었다. 니칸이 허물어지듯 쓰러지자 그들 중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발로 쓰러진 니칸을 몇 차례 뒤적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호를 받고 한 명이 더 다가왔다. 놈은 니칸의 머리를 잡아 올리더니 서너 차례 뺨을 때렸다. 니칸은 반응이 없었고 하얀 사람들은 킬킬대며 그루메테에게 뭐라 말을 건넸다. 그루메테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니칸의 손과 발을 풀어주었다. 자유가 된 손은 힘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직 마을에 사람이 꽤 남아 있습니다. 늙은이와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뿐이기는 하지만요.

쿠야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역시, 익숙한 목소리였다.

여자들과 아이들이야말로 재미가 쏠쏠한 법입니다.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도 값을 후하게 쳐주는 데가 많다오. 애들은 키워서 부려먹을 수 있고, 여자가 있으면 새끼를 칠 수 있으니 말이오. 노인네들은 별로… 쓸모가 없지만요. 영감과는 달리 말 이외다. 헤헤.

과연, 그렇군요. 지긋한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하는 이는 촌장이었다. 쿠야가 알고 있는 자상한 웃음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익숙한 미소를 띤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마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펼친 그물은 빨리 거둬야 한다. 시간이 길어지면 마을에 의심을 살 것입니다. 비록 약자들뿐이나 반발이 생긴다면 고약한 일일 테지요.

영감, 우리나라엔 이런 말이 있소. 오징어의 분노는 어부의 기쁨이다. 우리가 하루 이틀 일 해온 사이도 아니잖소. 5년에 걸친 거래가 곧 결실을 맺을 터이니 염려 마시오. 그간 수고 많았소. 내 보수는 섭섭지 않게 쳐주리다.

아…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촌장은 머리를 조아렸다. 쿠야는 촐루를 바라보았다. 촐루는 넋을 놓은 듯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쿠야는 촐루의 팔을 잡았다.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때, 조아린 노인의 머리를 사이에 두고 백인 하나가 쿠야와 눈이 마주쳤다.

저, 저, 저거 뭐여? 그가 바위 뒤에 서있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친 것과 일대의 모든 인간들이 시선을 집중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도망쳐, 촐루! 쿠야와 촐루는 놀란 가젤처럼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달려드는 서너 명의 백인을 피해 쿠야는 잽싸게 몸을 날렸다. 고함과 먼지 틈바구니로 정신없이 내달렸으나 쿠야는 얼마 못 가 넘어지고 말았다. 쓰러진 니칸의 팔에 발이 걸린 것이었다. 넘어진 쿠야는 니칸과 눈이 마주쳤다. 눈곱 같은 흙이 묻은 퀭한 눈에 눈물이 몇 방울 맺혀 있었다.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으나 이미 사방을 포위당한 뒤였다. 팔과 어깨가 붙잡힌 채 몸부림치는 쿠야의 시야에 촌장과 그루메테의 벙찐 얼굴이 들어왔다. 뛰어, 촐루! 쿠야는 있는 힘껏 외쳤다. 뜀이 빠른 촐루는 어느새 무리를 빠져나가 부리나케 뛰고 있었다. 촐루가 마을에 알릴 수 있을 거야…

매캐한 불 냄새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들개처럼 달리던 촐루가 픽, 쓰러졌고 백인 무리 가운데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었다. 촐루, 일어나! 쿠야는 악다구니를 썼다. 촐루도 저처럼 소리에 놀라, 발을 헛디딘 것이라고 쿠야는 믿었다. 촐루, 일어나, 어서! 촐루는 뜀이 빠르고 머리가 단단한 아이였다. 코끝과 눈두덩이 주위로 무언가 가득 차오르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먼 거리였지만 쓰러진 촐루의 머리가 절반쯤 허물어진 모습이 선명했다. 왈칵, 붉은 피가 솟구쳐 마른땅을 검게 적셨다. 촐루는 일어나지 못했다.

 

7.

15세기 중엽, 노예무역이 융성해짐에 따라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는 새로운 직종이 나타났다. 본래 그들은 아프리카의 토착 흑인으로, 처음에는 노예로 생포되었으나 점차 노예상들에 의해 교육되어 포르투갈어를 익히고 통역자 노릇을 하게 된다. 이후 이 같은 아프리카 통역인들은 직접 항해에 참가해 지리 정보를 제공하고 노예무역 중개와 안내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포르투갈의 항해자와 상인들은 아프리카 통역인의 존재를 매우 중하게 여겼으며 그들을

‘그루메테(grumete)’라고 불렀다.

 

8.

굳이 이런 날씨에 출항을 하는 그 심보는 뭐여. 정말 고약하다니까. 까딱 잘못하면 다 같이 물귀신 되게 생겼네, 지미럴.

넘실대는 파도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으르렁거리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다닐루가 투덜댔다.

말도 마라. 막판에 애새끼들 때문에 노발대발하는 꼴을 너도 봤잖냐? 깜둥이 노친네를 개 패듯이 패는 것이… 하여간 우리 선장 그 좆같은 성깔은 어디 안가.

말린 담배를 돌돌 말아 입에 물며 페페는 고개를 저었다. 출렁, 배가 흔들렸다. 아 뜨거, 씨벌. 환하게 불이 붙은 성냥이 갑판 너머로 떨어져 바다에 닿기도 전에 빛을 잃었다. 물가에 닿는 소리는 당연히, 들리지 않았다. 이런 육시럴. 페페가 충혈된 눈을 부라렸다. 킬킬대며 배를 잡는 다닐루의 발 밑으로 검은 파도가 위태로웠다.

 

어둠 속에서 쿠야는 눈을 떴다. 뱃바닥이 연신 출렁였다. 널찍한 공간을 양초가 듬성듬성 밝히었다. 손과 발, 그리고 목이 묶인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죽음 같은 잠을 청하고 있었다. 바닥은 그들이 게워낸 토사물과 소변 등으로 번들거렸고 악취는 말할 것도 없이, ‘지옥에서나 날 법한’ 냄새였다. 어쩌면 벌써 몇 구의 시체가 썩어가는 줄도 모르는 일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쿠야는 생각했다.

관절이 적어도 세 개는 부러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쿠야는 애써 몸을 일으켰다. 폐부를 뾰족한 막대기로 찍어 누른 듯 가슴이 아파왔다. 입을 벌리며 얼굴을 구겼으나 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벌어진 일도, 목격한 일도, 아무것도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정확한 것은 아픔뿐이었다. 고통에 찬 비명이 무성(無聲)하게 뼛속을 울려댔다. 쿠프프흐… 쿠야 대신 눈물짓기라도 하듯 등 뒤에서 기괴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쿠야는 구부정한 몸을 돌렸다. 어둠이 잔뜩 움츠린 채 쿠야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거대한

하마(河馬)였다.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짧은 다리에… 기다란 몸통에… 뒤룩뒤룩 살이 오른 두툼한 거죽을 두른… 모습이 영락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쿠야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냄새가 났다. 네가 바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헤엄을 치고… 걸려드는 건 전부 턱과 이빨로 부숴버리는… ‘괴물’이구나. 쿠야는 사지가 쇠고랑으로 묶인 괴물에게 손을 뻗었다. 한 차례, 배가 크게 흔들렸고 우레와 같은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품을 하듯 하마는 입을 벌리고 턱을 치켜올렸다.

아래턱에 붙은 엄니 두 개가 모두

부러져 있었다.

박강수(철학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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