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병준 편집장 (hbj0929@skkuw.com)

정치에는 모기 눈곱만큼도 관심 없던 공대생 친구가 “요즘 정치 관련 책들을 읽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연휴 마지막 날 술자리에서의 일이다. 왜 그러느냐 물으니 “탈원전 기조를 공학만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헛웃음부터 나왔지만, 20여 년 우정을 생각해 마음을 헤아려보니 공학으로는 채울 수 없는 이해의 빈틈을 정치로라도 메꿔보고자 하는 시도인가 싶었다. “이 무슨 허망하고 민망한 짓이냐”며 괜히 놀려주려 했지만 친구의 태도가 사뭇 진지해 참았다.

지난 10일 서울대 공과대학(이하 공대) 학생들이 정부의 탈원전 정책 추진과정을 비판하는 입장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입장서를 통해 “정부의 급작스러운 탈원전 정책 추진은 관련 산업과 그 기반이 되는 학문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며 “과학기술계의 의견을 경청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과학기술정책의 기조가 바뀌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면서도 “그 결과에 따라 관련 산업과 학문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면 이는 과학기술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처사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성명에는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뿐만 아니라 공대 내 11개 학과가 모두 참여했다.

입장서의 핵심은 탈원전 반대가 아니다. 정책 추진 과정에서 최대한 정치를 배제하고 과학계의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것이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입장서에 대해 지난 14일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원전 줄이고 신재생 늘리는 게 대세라면 자연스럽게 하면 되지 왜 정치 이슈화하나…새 정부 정책 한 방에 위기에 처하는 것을 보고 젊은 학생들이 충격을 받은 것 같다. 밥그릇 싸움이라고 치부할 게 아니다. 원전의 대체와 에너지 믹스야말로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했다. 원전문제는 정치이슈가 아닌 긴 호흡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것이다.

원전문제, 정치이슈 아닌 긴 호흡 필요한 사안
“‘환경론자냐 개발론자냐’ 해묵은 논쟁에 갇혀서는 안 돼”

다만 거리는 간단명료한 구호들로 넘치고 있다. “핵 발전소 안전하면 여의도에 지어라” “신고리 5·6호기 추가, 후손에게 재앙 넘겨주는 것”과 같은 문장들과 “정부 독단적 탈원전 정책 반대” “신고리 5·6호기 건설 즉각 재개”와 같은 문장들이 진영을 이뤄 거리를 횡행하고 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혹은 재개 여부를 판단할 공론조사의 결과 발표가 임박하니 양 진영이 서로 막판 공세를 펼치는 모양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0년 “미국 경제와 안전, 지구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좌파냐 우파냐’ ‘환경론자냐 개발론자냐’는 해묵은 논쟁에 더 이상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30여 년간 중단됐던 원전 건설 계획을 발표하며 한 말이다. 미국 대통령이 이러했으니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는 유치찬란한 주장을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백년대계’ 해야 할 국가 에너지 정책이 정치이슈가 되고, 그 판에서 이념의 날라리들이 활개 치는 사태가 다만 슬퍼서 내뱉는 말이다.

정치에는 모기 눈곱만큼도 관심 없던 공대생 친구가 정치 관련 서적을 읽고자 마음먹었을 때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지난 연휴 마지막 날 “이 무슨 허망하고 민망한 짓이냐”며 놀리지 않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