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병준 편집장 (hbj0929@skkuw.com)

“공터라는 것은 주택과 주택들 사이에 있는 버려진 땅이다. 아무런 역사적인 구조물이나 시대가 안착 될 만한 건물이 들어있지 않은 것. 내가 이 가건물에서 산 것 같다. 지난번에도 광화문에 나갔다가 태극기 흔드는 사람들 보고 또 ‘계속 철거되는 가건물 안에서 살아왔구나. 또 헐리겠구나, 또 헐리겠어. 며칠 사이면 또 헐어버리는’ 그런 슬픔을 느꼈다. 그 ‘공터에서’라는 제목은 그런 나의 비애감과 연결이 되어 있는 제목이다.” (2017. 2. 17. 김훈 신작 ‘공터에서’ 출판 기념 SBS 기자간담회 中)

오늘날의 한국은 ‘공터’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이 공터에 시대가 안착할 집을 짓지 못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지어야 할 그 집은 밥과 생존과 안보와 경제와 효율성이라는 이름의 포크레인에 헐리고 또 헐렸다. 그 집의 이름은 ‘정의’다.

이 공터에서 “정의가 밥 ‘맥여’주느냐”는 식의 말들이 횡행한다. 취업이라는 바늘 끝을 향해 질주하는 청년들과 수많은 동기를 제치고 차장·부장의 자리에 오른 중장년들, 재산권 문제로 자식들과 씨름하는 노년들 사이에서 이러한 말들은 창궐해 있다.

모르지 않는다. 국민소득 100달러 미만의 국가가 국민소득 3만 달러에 이르는 국가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밥의 지위가 확고부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밥을 벌어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생존을 해야만 정의고 ‘나발’이고 실현할 수 있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라는 집이 헐리고 또 헐리는 사태를 그대로 관망하며 방치하는 일은 스스로를 공터에 내맡기는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다만 이제껏 외쳐왔던 정의로는 공터를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때가 되면 또다시 밥에 밀려날 것이다. 모호하고 들뜬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란 줄곧 학생 운동을 통해 확대·재생산됐다. 정의에 대한 열망은 80년대 학생운동에서 호헌철폐·독재타도·대통령직선제개헌이라는 구호와 언설을 타고 그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구호들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천지굿’과도 같은 것이었다. 밝은 세상에 대한 열망은 하늘을 치솟았지만 모호하고 구체적이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던 혁명의 이데올로기에는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자인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도, 미국과 잡았던 손을 끊고 자립경제로 간다는 것도 답이 될 수 없었다. 민중과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를 바로잡겠다는 정의감은 충만했지만 그래서 어떤 사회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건지에 대한 준비는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답은 파쇼, 반미밖에 없었다.” 386세대 학생운동세력의 ‘대부’격으로 불리는 안희정 현(現) 충남 도지사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지난 소회다.

우리는 보다 견고한 집이 필요하다. 함성과 울부짖음이 아니라 정제된 언어가 필요하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설득력을 확보한 정의야말로 밥의 논리에 밀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홉스의 사회계약설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종교적인 이해나 믿음을 버리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절박함과 그에 따른 필요로서의 정의라면 어떨까. 이는 홉스를 정답으로 상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가 공유하는 정의에 대한 감각이 그만큼 냉정하고 차가워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명해본 것이다. 밥의 논리에 밀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믿음과 구원, 유토피아와 메시아 같은 단어들은 이제껏 지어왔던 집들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일거에 모든 악인이 소멸하고, 단번에 모든 고난과 역경이 사라진다는 식의 거친 구호들은 다시금 정의라는 집을 허망한 구조물로 만드는 불량 시공 기법일 뿐이다.

지난해 첫 촛불집회 이후 1년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공터에 시대가 안착할 집이 지어지길’ ‘우리 사회에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길’ 바라는 마음에 지난겨울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나왔을 것이다. 다만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허약하고도 들뜬 정의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여전히 정치적 메시아를 바라고, 모든 악인이 일거에 소멸해 끝내는 고난 없는 세상이 오리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공터에 메시아는 없다. 유토피아도 없다. 이를 인정할 때, 정의라는 집은 이상향을 벗어나 일상에 뿌리내려 좀 더 튼튼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