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우성곤 기자 (hlnsg77@skkuw.com)

그동안 문화부는 주로 학교 밖 문화·예술을 소개하고 문화인을 인터뷰하며 기자의 평가를 얹어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도 자기만의 개성을 살려 예술 활동을 하는 학우들이 많다. 프로 예술가를 꿈꾸는 학우들도 적지 않다. 올해 마지막 문화부 기사는 연말을 화려한 공연·전시로 수놓고 있는 우리 학교 학우들의 인터뷰로 채웠다.


   
 
한 사람에게라도 위안이 되기를 - 철학과 김현우 학우
지난달 24일 홍대의 한 공연장에서 우리 학교 중앙 밴드동아리 ‘소리사랑’의 연말 공연이 있었다. 많은 학우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 무대에 올랐다. 두 번이나 밴드의 회장을 맡았고 이번 연말 공연 역시 참가한 김현우(철학 14) 학우는 이들의 떨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2년 전 그 역시 무대에서 떨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쇼핑몰과 영화관, 문화행사 등에서 버스킹 제의를 받고 있다. 지난달 26일에는 대학로 CGV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현재 ‘문장’이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인 그를 만났다.

주로 어디서 버스킹을 하나.
첫 버스킹은 밴드 동아리 친구들과 마로니에 공원에서 시작했다. 지난 학기 기말고사 즈음 학교 정문 공원에서도 했다. 학우들이 잘 호응해줘서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다. 요새는 ‘버스킹 플레이’라는 애플리케이션에서 목록을 보고 장소를 선택한다. 주로 상점가나 시장에서 하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탑골공원 앞 세운상가에서 하고 왔다. 다음 주 토요일은 상봉 CGV, 일요일은 대학로 CGV에서 공연이 예정돼있다.
 

 

버스킹 하며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얼마 전 마포구에서 버스킹이 끝나고 한 아주머니가 오렌지 주스를 주셨다. 기분이 참 좋았다. 벌써부터 많은 관객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제 시작이니까. 멀리서 지켜보던 한 사람만이라도 ‘잘 봤다’, ‘위안받았다’고 해주면 충분하다. 나만의 공연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언제나 기쁘다.

공연 준비는 어떻게 하나.
보컬 학원에 다니며 레슨을 받고 있다. 기타는 공연 전 집중해서 다소 어려운 부분을 위주로 연습한다. 그동안 공연은 무조건 외워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 ‘비긴 어게인’을 보니 프로들도 다 악보를 보고 하더라. 그래서 나도 악보를 보며 공연하기로 했다. 덕분에 공연 부담이 줄었다. 애드리브나 제스처 정도는 미리 짜놓고 연습한다.

주로 어떤 노래를 부르나. 
데미안 라이스나 제이슨 므라즈, 곽진언의 노래를 주로 부른다. 그래도 내 창작곡 두세 곡 정도는 항상 부른다. 그래야 내 이름이 알려질 테니까. 나머지 디테일은 상황을 보며 결정한다.

어떻게 작곡하나.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영화를 보며 기억에 남는 명장면을 기록해 뒀다가 그 내용을 바탕으로 가사를 작성한다. 개인적으로 음악에서 가사의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사를 제대로 쓰려면 내 안에 인문학적 소양이 갖춰져야 한다. 전공을 철학으로 선택한 것도 도움이 된다. 항상 가사 안에 의미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자신에게 노래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무언가를 잘하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노력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재능은 단지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말할 뿐이다. 지금까지 음악만큼 내가 좋아해 본 것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데 그걸 남들이 인정까지 해주면 그 길을 가지 않고 배길 수 없다.

음악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는.
부르는 사람에게는 자기표현, 듣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돌아보는 거울이자 위안이다. 뚜렷한 주관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면 음악하기 힘들다. 자기의 내면을 먼저 채워야 남들을 위로하는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


 
디자인의 정도(正道)를 구하다 - 디자인학과 김완호 학우
지난달 20일부터 29일까지 ‘8가지 개인기’라는 제목으로 우리 학교 디자인학회 ‘이미지 교환국’의 첫 전시회가 열렸다. 학회장이자 이번 전시 참가자인 김완호(디자인 13) 학우는 ‘Text Noise’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대상을 묘사한 문장을 읽고 인식한 바를 그림으로 표현하게 했다. 그림은 천차만별로 달랐고, 그는 그러한 그림들을 모니터에 합성했다. 텍스트를 통한 의사소통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왜 디자인 ‘학회’인가.
디자인학은 분명히 학문인데 그동안 디자인학과 동아리들은 디자인에 대한 학문적 접근에 소홀했다. 그 갈증이 디자인학회를 만들게 된 계기다. 디자인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담론을 나눠보고 싶었다. 예를 들어 모던과 포스트모던 중 우리는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 디자이너의 윤리와 책임은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한다. 누군가 ‘디자인이 무엇인가’라고 물어봤을 때 최소한 자기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내 전공은 시각 디자인인데, 외국에는 ‘Visual Design’이라는 말이 없다. ‘Visual Communication Design’, 혹은 그냥 ‘Communication Design’이다. 내가 정의한 디자인의 본질은 소통이다. 디자이너는 이미지로 소통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사람들이 이미지로 더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다.  

디자인은 어떻게 연습하나.
나는 손 그림이나 그래픽 연습보다 책과 글을 많이 읽고 써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는 그림만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디자이너는 누구보다 논리적이어야 한다. 텍스트를 통한 소통이 1차원적이라면 이미지를 통한 소통은 2차원적이다. 1차원적 소통에 능숙하지 못하면 결코 2차원적 소통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텍스트 논리에서 막히는데 어떻게 이미지 논리를 성립시킬 수 있겠나. 붓을 들고 무언가를 그리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이 논리를 세우는 일이다. 
 

어떤 디자인 분야에 가장 관심이 있나.
관심 분야를 한정 짓고 싶지 않다. 대학교 2학년 무렵엔 로고 디자인에 흥미를 느꼈다. 정문 앞 카페 ‘커피 볶는 김 쌤’의 로고도 직접 디자인했다. 그 이후에 사회적 디자인에 관심을 갖기도 했고 지금은 공간 디자인에 꽂혔다. 서점 ‘풀무질’의 공간 디자인 의뢰를 받아 겨울방학부터 작업에 들어간다. 광주 디자인비엔날레에서 기업제품 전시공간의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능력이 닿는 모든 분야를 섭렵해보고 싶다.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나.
광화문 광장은 차도로 꽉 막혀있어 시민들의 일상이 녹아들 수 없다. 특별한 행사만을 위한 광장은 광장이 아니다. 동대문 디지털플라자도 예쁘긴 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동대문과 동대문 시장, 청계천이라는 한국적 공간과 어떤 연결성을 갖는지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디자인들은 제대로 된 논리를 가질 수 없다. 옳지 못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디자인에 대한 충분한 논리를 갖고 싶다. 나는 옳은 디자인이 하고 싶다.


 
대학로와 학교 사이, 나만의 길을 걷다 - 정치외교학과 이민성 학우
누적 관객 수 120만. 창작 뮤지컬의 신화로 불리는 뮤지컬 ‘루나틱’이 대학로로 돌아왔다. 정신병원 환자들의 사연을 춤과 노래로 풀어내며 현대인들의 마음 속 짐을 덜고 아픔을 치료해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뮤지컬에 한 획을 그은 이 작품에서 우리 학교 이민성(정외 16) 학우는 주연을 맡고 있다. 그의 초대를 받아 관람한 뮤지컬 ‘루나틱’. 그는 쟁쟁한 선배 연극배우들에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특유의 여유로움과 강렬한 노래로 관객을 압도했다.

공연과 학업의 병행이 가능한가.
힘들긴 하지만 노력하고 있다. 밤샘 연습 후 아침 수업을 듣고 과방에서 눈 좀 붙이고 다시 내려가 공연하는 경우도 많다. 작품 준비 기간에는 보통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연습해 수업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기간에는 하루에 수업을 몰아 듣는 식으로 학기를 마치곤 한다.

 
공연은 어떻게 준비하나.
가장 먼저 대본과 노래를 외운다. 그 외에도 춤, 동선, 감정선, 조명의 방향과 위치까지 익힌다. 실제 공연이 진행될 때는 상대 배우들이 바뀌기도 하는데 그들의 개인적 특징까지 숙지해야 한다.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아무리 현란하게 연기한다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언제부터 뮤지컬 배우를 꿈꿨나.
어린 나이에 해외로 나갔다. 낯선 환경에서 영어도 익숙하지 않아 적응하기 힘들었고 자연히 자존감도 낮았다. 그때 전환점이 되어준 것이 노래였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학교 행사에 자주 서게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고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영화 ‘레 미제라블’을 통해서 뮤지컬이라는 것을 처음 접했다. 큰 충격이었다. 이후 뮤지컬 영상들을 수도 없이 돌려봤다. 한국에 돌아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뮤지컬을 보고 나서 이 길이 내 길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오디션에 합격한 후 무엇이 변했나.
사실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해서 불안함이 끝난 것은 아니다.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끝나고 다음 작품이 있을까?’ 하는 불안은 어떤 배우든지 갖고 있다. 부모님께서도 이런 걱정 때문에 배우라는 길을 여전히 반대하신다. 그래서 늘 실력을 키우고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올해 여름 독립영화 한 편을 찍었다. ‘백화’라는 제목의 위안부를 주제로 한 독립영화에서 일본군 역할을 맡았다. 일본군을 단순히 절대적인 악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도덕적 가치관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 사람의 여러 측면을 동시에 이해해야 진정성 있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하나의 측면만으로 인물을 표현하면 가짜 연기가 된다.   

앞으로의 계획은.
뮤지컬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에도 진출하고 싶다. 내가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에 도전하겠다. 50주년 레 미제라블 무대에 서보는 것이 지금으로서 가장 큰 목표이자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