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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택 BK21 연구 교수  <사진 김시화 기자>

4·19는 흔히 일련의 숫자로 표시되는 한국 근대사의 수많은 정치적,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4·19는 1960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수많은 정치 파행과 억압을 자행했던 이승만 독재정권을 붕괴시켰던 사건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전개될 민주주의,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4·19가 붕괴시킨 이승만 정권은 정부 수립 이후 억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나갔다. 민주 세력을 탄압하고, 친일파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삼았던 이승만은 이후 ‘국민방위군사건’을 일으켰고, 관제 데모와 테러를 동원하여 반민특위를 붕괴시켰으며 정권 연장을 위해 1952년 발췌 개헌을 시도했던 ‘부산정치파동’과 헌법의 중임제한 조항을 없애 종신집권을 기도했던 1954년의 ‘사사오입개헌’을 자행했고, 1958년 정치적 반대파들을 탄압하기 위해 ‘2·4보안법파동’을 야기시키는 등 온갖 종류의 억압과 부정을 저질렀다. 이승만에 대한 반발이 점차 확산되는 가운데,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선거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부정과 파행으로 일관됐다.

1960년 2월 28일 부정 선거에 맞서 대구에서 최초의 시위가 발생했다. 정부는 28일이 일요일이었음에도 초 ·중 ·고교 학생들에게 등교를 강요하여 야당 선거 유세장 접근을 막았으며, 이에 학생들은 시위를 감행하였고 전국적으로 데모가 확산됐다. 시위는 선거 당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3월 15일 마산 시위 때 행방불명된 김주열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시위는 급격히 확대됐다. 4월 18일 고대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마친 후 귀교하는 과정에서 정치폭력배들의 습격을 받아 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 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은 총궐기 선언문을 낭독하고 중앙청으로 몰려갔다. 이에 경찰이 발포하고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이날 사망자 약 1백명, 부상자 약 4백5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승만이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진주하여 그날의 시위는 약화됐지만, 정치적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 가운데 25일 서울의 대학 교수 2백59명이 대통령과 정부 요인의 하야,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고 학생과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위가 확대되자 결국 이승만은 하야를 선언하고 4월 29일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됐다. 허정 과도정권이 성립되었고 이어 민주당이 주도하는 제2공화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4·19혁명의 주체세력이었던 학생들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정치 권력은 기성 정당이 가져가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정치적 분열을 남긴 채 소수 군부세력에 의한 쿠데타에 의해 붕괴됐으며, 그후 오랜 군부 독재의 역사가 자리를 잡게 됐다. 역설적으로 오랜 군부 독재는 4·19로 하여금 민주주의와 민주화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확고히 자리잡게끔 만들었다.

그런데 4·19에 대한 명칭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때는 이를 혁명이라 부르다가 어떤 때는 이를 의거로 불렀던 적이 있다. 사회과학적인 맥락에서 혁명은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으로 구분되기도 하는데, 정치 혁명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일부 계층이 바뀌는 것을 협의의 변화를 의미한다면 사회혁명은 지배 계급 일반의 교체,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보다 광의의 의미를 가진다. 아울러 누가 혁명을 주도했는가에 따라 위로부터의 혁명, 아래로부터의 혁명, 옆으로부터의 혁명으로 나누기도 한다.
4·19는 초기에는 비합헌적 방법으로 헌정체제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초래했기 때문에 혁명으로 규정되어 4월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이 그 정치적 의미를 폄하하기 위해 의거(義擧)로 불렀다가 문민정부 이후 다시 혁명으로 불리게됐다. 비록 이승만 정권이 표면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어떠한 정체의 변화도 없었으며 따라서 4·19를 혁명으로 부를 수 없다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이승만 정권이 표면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독재정권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4·19는 비합헌적 수단으로 헌정질서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혁명이라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