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월드컵역사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올림픽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닌 전세계적인 스포츠 제전 월드컵. 올림픽이 전 종목을 겨루는데 비해 월드컵이 축구라는 단일 종목만의 경연장임을 고려하면 월드컵이 지닌 보편성과 매력은 대단하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90분간의 긴장과 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박진감이 사람들을 축구라는 마약에 중독시키며, 월드컵이 가진 이러한 특성 때문에 정치가들은 오래 전부터 월드컵을 자신들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정치적 개입이 있었던 월드컵 역사를 살펴보면 1930년에 제1회 월드컵을 들 수 있다. 당시 개최국 우르과이는 경제난에 휩싸여 있었고, 거리엔 실직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우르과이 정부는 월드컵을 경제난 극복의 계기로 활용했다. 또한 우르과이는 1930년 독립 1백주년이란 점을 부각시키며 사회불만을 환기시켰다. 우르과이 정부는 독립 1백주년을 뜻하는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이란 웅장한 경기장을 건설했고 이를 통해 국민들은 점차 자존심을 회복했다.

1934년 제2회 이탈리아 월드컵은 독재에 이용된 최초의 정치적 월드컵 대회였다. 당시 독재자 무솔리니는 월드컵을 통해 통치력의 극대화를 꾀했다. 이미 첫 대회 개최권을 뺏긴 무솔리니는 제2회 대회는 자국에서 유치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지시했다. 파시즘에게 월드컵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기회를 줘서는 안된다는 반대의 목소리도 높았지만 이탈리아는 결국 우여곡절 끝에 개최권을 따냈다. 이어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를 반드시 우승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제2회 대회는 무수한 판정시비를 낳으며 결국 이탈리아가 우승을 차지했다. 월드컵을 통한 이탈리아의 사례는 독일의 히틀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통해 히틀러는 ‘위대한 게르만 민족’을 전세계에 알리려 했고, 성화봉송이란 이벤트가 사상 처음 등장하기도 했다.

월드컵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례는 지난 1978년 아르헨티나에서 재현됐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월드컵을 2년 앞둔 76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사정부는 이사벨 페론을 축출하고, 5천 여명의 정치범을 처형하는 등 인권유린과 폭압정치를 자행했다. 군사정권은 월드컵을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고, 출전국들은 개최국을 변경하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와 반정부 단체로부터 각국 출전선수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서약을 받아낸 후에야 대회가 치러졌다.

한편 한·일 월드컵도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나 아르헨티나의 경우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정치와의 관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한국은 전두환 정권 당시 국민들 3S정책 중의 하나인 스포츠를 이용, 정권유지의 도구로 악용한 경험이 있다. 정부는 월드컵을 계기로 국민대화합의 논리를 내세우며 노동계의 파업 혹은 집회를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월드컵을 이용한 노동자 억압이라 비판한다.

이와 관련 민주노총(임시위원장:이수호)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정부가 대화 노력없이 일방적으로 노동계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월드컵 시기와 맞춰 입법화 시도가 있었던 테러방지법도 문제다. 제2의 국가보안법이라 불리는 이 법은 많은 시민단체로부터 비판받고 있다. 이와 관련 참여연대(공동대표:박상중) 홍석인 연대사업팀장은 “인류평화의 제전을 치안유지명분으로 악법을 제도화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순수해 보이는 스포츠 경기 이면에는 스포츠 특유의 마력으로 인해 수많은 외적 요소가 개입한다.

최진우 기자 huskal@mail.skk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