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첫째,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나보다도 나이가 많거나 내 또래임에 분명하다. 문화에 대해서 논하자면 난 턱없이 부족하다. 둘째, 무엇인가에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못된다. 일부의 속성을 전체의 문화라고 치부 할 수 없음은 자명한 원리이다. 그러므로, 나는 청년문화에 대해서 어쨌든 당당히 말할 수가 없다. 이런 가운데서 난 청년을 만나야만 하고 전해야할 의무를 지녔다. 분명한 것은 독자들 역시 청년이며 청년문화를 같이 채우고 있는 일원이라는 것과 당신이 이 이야기의 주제라는 것.

이천 이년 유월, 월드컵 경기장에서 보여주었던 붉은 악마들의 함성과 질서를 다시 한번만 기억하자.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 붉은 악마들이 경기장과 광화문 광장을 청소하는 모습은 함께 응원하던 세계인들에게 우리 청년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또 하나의 자부심이었다. 이는 모두가 인정하는 청년의 모습이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은 가장 쉽게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문화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것들이 더 많다. 그리고 그것은 걷기 어려운 길이다. 매체를 통해서 심각성을 전해들은 강릉 수해 현장에 무엇인가 있을 것 같았다. 부서진 문화일 수도 있겠고, 그럴지라도 역설적으로 희망을 볼 수도 있을 테니까. 강릉을 밟았던 것은 나의 청년 시절에 주변의 아픔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마가 지나간 강릉의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곳곳에 아픔이 담긴 구름이 날고 있었다.

이해보다는 느낌을 통해 이것이 세상의 진실이라는 것, 침묵이라는 것, 혹은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끊이진 않지만 항상 부족한 수재의연금을 채우는 것은, 자원 봉사를 위해 달려온 그리 많지 않는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의 웃음이다.

올라오는 길은 자원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재수생들과 동석한 자리였다. 음지에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또 다른 청년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꽃동네, 청년이 되지 못한 채 누워있는 아이들이 가득한 그곳에도 희망은 있다. 그들을 돌보는 아름다운 청년들이 함께 고민하고 또 같이 웃고 있어 꽃동네는 외롭지 않다. 다 알면서 행동 못하는 것. 돌아오는 길에 필자 또한 청년이기에 눈물이 났다. 모니터를 보고, 종이를 보고 세상을 이야기하는 나와 너를 저주했다. 이런 청년들이 컸을 때, 다시 수재민을 두 번 울리는 탁상행정을 하지는 않을까.

이재원 기자 ljw-c@mail.skk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