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천편일률적인 우리의 대학문화, 그 속에 성균관대만이 갖고 있는 문화의 흔적들을 찾아봤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교육기관인 성균관 그리고 유생들의 옛 모습과 정신은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성균관은 성역이었다. 그 옛날 삼한시대의 소도처럼, 지금의 명동성당이나 조계사처럼 성균관에는 공권력이 투입되지 못했다. 이전과 다르게 현대의 대학들은 성역으로서의 위상을 지켜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느 시기보다 교육열이 높은 이 때, 과연 그 열기가 진실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또한 성균관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매우 아름다워 예전엔 주변 풍광과 더불어 ‘명승’의 하나로 칭해졌다. 내부적인 환경이 건물들과 나무들이 미학적으로 잘 배치되어 그 조경미가 뛰어났으며 경내에 자연적으로 정숙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현재의 양현재 역시 조선시대 만큼의 풍류는 아니지만 주변 자연에 안락히 감싸져 있다.

도포에 갓 쓴 유생들. 그들은 양현재 모임인 재회를 조직, 자치활동을 통해 정치적 역할을 했다. 유생들은 반학교 문화적인 교관 천시 풍조가 거셌다. 성종 때에는 유생들이 교관의 학문적 자질과 인격을 희롱하는 시를 쓰고 체벌에 대한 불만을 품어 저항도 했다. 정치기강의 해이, 전란으로 인한 재정 결핍, 당쟁으로 인한 집단이기주의 풍조 등이 만연함에 따라 저항도 거세졌다.

장재천(교육) 강사는 성균관에서 계승해야 할 점에 대해 “예의가 지켜지는 수업, 창의적 교육, 토론식 수업 등 현대식 교육의 선진적 부분을 이미 시행하고 있었다”며 “대학교육의 산 역사인 성균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균관 그리고 그곳의 유생들이 모두 바람직한 의미만 갖고 있지 않다. 과거 준비에 급급한 유생들은 정치집단의 파당싸움에 우왕좌왕한다. 재생들의 주체적인 권위도 있었으나 그것이 정부에 이용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치활동들은 때로는 긍정적 효과를 얻기도, 때로는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며 변화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서있었던 위치이다. 때로는 휘둘리기도 했지만 언제나 중심에서 부딪치며 치열하게 살아온 유생들. 지금의 양현재 재생, 나아가 대학생 전체에게 기대한다면 무리가 될는지. 던져주는 바가 많다.

심연주 기자 rmfnxjrl@mail.skk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