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원수의 딸을 사랑하다니…….’
그런데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원수가 된 것은 기억도 가물가물 하고, 게다가 딸은 아주 매혹적이니. 적절할 지 모르지만 요즘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본의 모습이다. 이는 몇 년 전부터 단계적으로 수용된 일본 문화에 힘입은 바 크다.
영화를 예로 들어 보자. 얼마 전 개봉된 『비밀』. 사고로 죽은 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을 통해 살아난다. 영혼은 아낸데, 몸은 딸이라니. 이 얼마나 기막힌 상황인가? 미묘하고도 위태로운 감정이 영화를 메우고 있다. 같은 배우가 등장한 『철도원』. 철도원 일을 하느라 갓난 딸을 잃은 주인공이 있다. 세월이 흘러 딸은 늙은 아버지 앞에 다시 나타난다. 영혼이 되어 몇 년씩 터울을 둔 모습으로. 그리고는 괜찮다고, 이렇게 잘 자랐다고, 또 사랑한다고 한다.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첫사랑을 깨닫는 『러브 레터』 역시 감정의 애틋함에서 앞의 영화들에 뒤지지 않는다. 세 영화 모두 미묘한 사건들과 감정들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매혹적임에 틀림없다. 이는 비단 영화에 한정되는 특징만도 아니다.
그런데 남는 의문은 조금 평범하면 안 되나 하는 것이다. 아내는 아내로 딸은 딸로 사랑하고, 또 연인 역시 그냥 옆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하면 될 텐데. 물론 어리석은 질문이다. 사실 영화가 보여주는 미묘함이나 섬세함은 정교한 배치를 대가로 한 것이다. 또 배치는 식상한 일상, 곧 ‘맨얼굴’을 외면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력은 이미 한 세기 전 그들의 문화가 사적인 것을 향할 때부터 지속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때부터 지워지기 시작한 ‘맨얼굴’의 중심에 일본의 국가주의적 팽창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또 지금은 ‘가물가물 하지만’ 우리와 원수가 되어야 했던 과거의 얼룩도 있다.
거친 논의를 이어가자면 이는 단지 일본 문화에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작금 우리 문화의 두 가지 화두는 속도와 재미다. 속도와 재미에 제대로 버텨낼 수 있는 논리는 없다. 하지만 속도가 인간의 삶을 추월해 저만치 달려가면 ‘맨얼굴’은 흐려진다. 또 ‘맨얼굴’이 서로 부대낄 여지도 사라진다. 그리고 극단화된 재미는 ‘맨얼굴’을 초라하고 진부한 것으로 만든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이 흐려지고 또 초라해진 ‘맨얼굴’과 함께 해야 할 시간이 훨씬 길다는 사실이다.
박현수 (어문학부) 강사

-한국문학 전공
-민족문학사협회, 상허학회 회원
-저서 <일본 문화 그 섬세함의 뒷면>, 논문 <두 개의 '나'와 소설의 관습의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