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타협하기를 거부한 고려의 자부심, 최해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고려 명현 문정공 최해 선생의 생애와 문학'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지난 10일 600주년 기념과 6층 첨단가의실에서 열렸다.  <김시화 기자 designtimesp=19717>

------------------------------------------------------------------

최해선생은 최치원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고려후기의 뛰어난 학자이며 문인으로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경력은 크게 두드러지지 못해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 때문에 그에 대한 사료는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편찬한 '동인지문'은 신라 최고운에서 시작해 충렬왕 시대까지 명인. 문호들의 시, 문을 뽑아 실은 방대한 시문집으로 우리나라에도 중국과 대등한 수준의 문학이 있음을 알린 계기가 됐다. 지난 10일 본교 600주년 기념관 6층 첨당강의실에서는 '고려 명현 문정공 최해 선생의 생애와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동인지문'의 편찬의미와 최해의 문학세계 문학사적 위치를 조명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편집자주

------------------------------------------------------------------

문정공 최해
고려시대 문인 최해는 1287년에 태어나 1340년 타계했다. 자는 언명부(彦名父) 또는 수옹(壽翁)이고 호는 졸옹(拙翁)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나 17세에 과거에 급제해 관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는 35세에는 원의 제과에도 급제했으나 실제 그의 관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성품이 강직해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사람의 선악을 말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처세에 기복이 많았다.

그리하여 뜻은 높았으나 선악을 말하기 좋아했던 그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처세에 기복이 많았다. 그리하여 뜻은 높았으나 가세가 빈곤해져 만년에는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을 써서 명현의 시문을 뽑아 '동인지문'을 편찬했고, 저서에는 '졸고천백'이 있다.


다각도로 조명한 최해의 생애
이번 학술회의는 문정공 최해 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최종대)의 후원에 힘입어 유교학술원(원장:최근덕)이 주최가 돼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최해의 생애와 문학을 논의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시작된 회의에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후손들까지 참석해 최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토론과정을 지켜봤다.
  
먼저 오전 발표에서는 서울대 조동일(국문) 교수가 ‘최해의 문학사적 위캄를 주제로 최해를 문학사적으로 앞뒤 시기의 주요 작가들과 비교하며 논의의 서두를 열였다. 이 발표는 △최치원 △이규보 △서거정 △정약용을 통해 각각 △최해가 중국에 가서 과거에 급제한 점 △스스로를 성찰하는 문학을 했다는 점 △한문작품집을 편찬한 점 △농민생활을 다룬 한시를 지은 점과 비교해 거시적으로 분석했다.  

이어진 발표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이성무, 이하:국편위) 고혜령 교육연구관이 ‘최해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다각도로 논의를 펼쳤다. 고연구관은 “최해의 글들을 통해 볼 수 있는 그의 학문과 사상은 역사적으로 고려 후기 사대부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고 지적하며 △학문과 사우관계 △사대부로서의 정치관 △불교에 대한 태도 △독자적 문화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중심으로 최해의 생애를 조명했다.

한편 오후부터 시작된 동국대 김종진(한문) 교수의 발표는 ‘최해의 현실인식과 삶의 자세’를 제목으로 졸옹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접근했다. 김교수는 “자기 주장을 갖고 현실과 타협하기를 거부하며 옛 성현을 희구해 도덕적 완전함을 추구했던 졸옹의 행위는 세인들로부터 소외되는 불우함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민족문화의 긍지 『동인지문』
‘최해 시의 문예적 성격’을 분석한 전 연세대 송준호(국문) 교수는 졸옹의 시를 그의 삶과 생각의 유기체적 반영물일 것이라는 전제에서 그의 작품들을 세심하게 검토했다. 송교수는 발표를 통해 졸옹을 “시종 유가적 인성관과 사회관, 그리고 역사관을 기반으로 삼아 시대적 대응의 삶을 산 문사”라고 결론지었다.  

마지막으로 국편위 박한남 편사연구관은 ‘최해의 『동인지문』 편찬과 그 의미’를 사륙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박연구관은 “동인지문은 정변과 전화로 파괴되고 버려진 문화기록을 복원함으로써 고려 전기 전례와 문화전통의 맥을 전하고자 했다”고 분석하며 “규모면에서 『동문선』과 비교되지 않지만 실물이 남아 있지 않은 고려전기 기록문화의 복원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발표를 마친 후에는 개별 주제에 대한 종합토론을 통해 날카로운 질의가 이뤄졌으며, 최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어졌다.

이번 학술대회는 우리나라의 선시문학의 개창조라 할 수 있는 졸옹 최해의 자리매김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명백한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술적으로 충분히 검토되지 못한 최해에 대한 논의가 계속적으로 제기되기를 기대해본다.

조은정 기자 ejcho@mail.skk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