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캠 만남 - 조재연(법률 75) 동문

기자명 성대신문 (skkuw@skkuw.com)

서초구 대법원 대법관 사무실, 공정한 판결을 위해 쉴 새 없이 일하는 한 사람이 있다. 
특별한 듯 보이지만 평범한, 평범한 듯 보이지만 특별한 한 사람. 
소신 있게, 인간미 있게,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하는 조재연(법률 75) 동문을 만나봤다.

진로를 고민하던 평범한 청년,
법조계 ‘천칭’ 되기 까지
신뢰받는 사법부 만들고 싶어

 

평범하게 한 발 한 발 나아가다
“조금의 차이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특이하진 않았어요.” 유년 시절 조 대법관은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이사를 자주 다니긴 했지만, 오히려 여러 환경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죠.”

학창시절 막연하게 문학가를 꿈꾸던 조 대법관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한국은행에 입사했다. “당시 고졸 출신 회사원들의 대부분이 학업을 계속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어요. 성균관대 야간부 법대에 편입한 것도 이 때문이었죠.” 20대 청춘의 그는 여느 청년들과 다를 바 없이 진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는 방송통신대 재학 당시 경영학을 전공했기에 하던 공부를 계속해 공인회계사나 행정고시를 볼지, 법학과로 진학해 사법 시험을 볼지 고민했다. 이후 사법 시험 도전을 결심하고 판사로 진로를 정했다. 편입 후 직장을 마치자마자 강의를 들으러 와야 했기에 다른 학우들처럼 동아리나 학회 활동을 할 시간이 없었다. 제대로 쉴 틈조차 없었던 대학 생활 중, 옥류정이 있는 산에 올라 나무 밑에서 동기들과 나누는 담소가 그에게는 일종의 ‘힐링’이었다. “고시반에서 기숙 생활을 하며 시험 준비를 했어요. 아침에 다른 학생들이 등교하러 학교에 올라올 때 꾀죄죄한 차림으로 밥을 먹으러 내려갔죠. 대성로를 그렇게 걸었던 기억이 나요”라며 사법 시험 준비로 고단했던 시기를 떠올렸다. 그는 교수님들의 열정이 담긴 수업, 여러 외부 특강을 활용해 법학을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은 그를 제22회 사법시험에서 수석으로 이끌었다. 

법 해석 철학이 이끈 반골 판사의 소신
‘반골 판사’. 군사정권의 압박 속 소신 판결을 내린 그에게 주어진 별명이었다. 혼란스러웠던 시기, 그는 자신만의 소신을 꿋꿋이 지켜나갔다. “정부의 압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두렵지는 않았어요. 사회 분위기상 신경을 쓰긴 했는데 크게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재판관 시절을 시국 사건의 시대와 함께했던 만큼 간첩에 관한 재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강릉법원 근무 때 어부가 이북에 잡혀갔다 간첩으로 기소가 된 사건이 기억나네요. 구형이 무기징역이었는데 그 어부가 이십 대 후반의 젊은 청년이었어요. 법조문만으로는 간첩 선고가 내려질 수 있었는데 여러 증거를 보니 간첩으로 보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와 무죄선고를 내렸죠. 이런 경우엔 구형이 무기징역이니까 제 선고에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거죠. 더 신중해 질 수밖에 없었어요.”

이와 같은 조 대법관의 소신 판결은 법 해석에 관한 그의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그는 법 형식에 치중한 형식·논리적 타당성보다는 개개의 사건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타당성을 중시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재판의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법관 개인의 종교·정치적 가치관을 일체 배제하고 재판을 진행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해요. 개인의 소신을 극복한 중립적 입장에서 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선고하라는 선서를 하고 임관하니까요. 그러나 실제로 사건을 분석할 때 신념에 따라 다른 견해를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 견해들이 결론을 결정하게 하지 않는 것이에요.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따로 없으니 법관 스스로 헌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에 임해야 하죠.”

의뢰인과 하나 된 성실한 설득
11년의 판사 시절을 뒤로하고 그는 변호사로 전향했다. 판사로서 소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에 그는 “경제적 곤란함이 이유였죠. 사람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으면 여러 면에서 위축되기 쉽습니다. 잘못하면 물질적 유혹에 이끌려 판사의 소명을 잊을 수도 있어요. 법조계에서는 법관으로서 올곧음과 청렴을 지켜나갈 자신이 없으면 스스로 법복을 벗는 것이 옳다는 말이 내려오기도 하고요”라고 설명했다. 

법관으로서 뚜렷한 소신을 지녔던 그는 변호사로서의 소신도 확고했다. 그는 의뢰인의 입장에서 변호를 성실히 하는 것이 변호사로서의 소명이나, 그 ‘성실함’을 위해선 사건을 맡을지 고민하는 과정도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누구나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원칙이죠. 하지만 제게 흉악 범죄자가 ‘선임료를 많이 드릴 테니 나를 무죄 판결로 이끌어달라’며 부정을 옹호해 달라 요구한다면 양심상 맡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변호사라고 해서 모든 사건을 다 변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신념과 어긋나 성심성의껏 변호를 할 수 없는 경우라면 더 열성적으로 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조 대법관은 의뢰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그는 두 가지의 자세로 지난 24년간 의뢰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고 했다. 첫째는 ‘인내심’을 갖는 것이었다. 의뢰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끌어내기 위해선 그 말을 인내심 있게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어 두 번째 자세로 ‘선입견 배제’를 꼽았다. 그는 “의뢰인의 이야기에서 진실을 발견하려면 선입견이 사로잡히지 말아야합니다. ‘저 사람이 뭘 감추고 있다’, ‘법에 안 맞는 얘기를 하고 있네’ 등 미리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다 전해 듣지 못하니까요. 선입견은 법을 공부하다 보면 생기는 습관 같은 건데 배제하려고 노력해야 하죠. 앞서 말한 것들은 가장 기본적인데 가장 중요해요. 항상 기본이 우선 돼야하죠(웃음)”라고 설명했다. 선입견을 배제한 뒤 인내심을 갖고 이야기를 듣는 과정은 그를 의뢰인의 입장에서 수긍하고 공감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 공감과 수긍은 의뢰인을 성심성의껏 변호할 수 있는 최고의 설득 기술이었다.

긴 변호사 생활 동안 그는 △공정거래위원회 자문위원 △경찰청 수사정책 자문위원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규제 심사위원 △정부 공직자 윤리위원회 위원 △장애인 법률지원 변호사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등의 활동을 통해 사회에 크게 기여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에 관한 질문에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시절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사례가 기억에 남네요. 언론사 부주의로 한 여성의 얼굴이 크게 보도되면서 초상권 침해의 피해가 발생했었거든요. 이후 언론사에 관련 자료 삭제 및 위자료를 요청해 사건이 일단락됐죠. 이처럼 사회적 이슈의 큰 회오리 속에서 개인이 받은 피해가 꽤 있었어요”라며 그의 변호사 생활을 추억했다. 

사법부 신뢰를 되찾는 길, 수도승 같은 생활
조 대법관은 대한변호사협회가 추천해 임명된 최초의 대법관이다. 평생 법원에 재직해온 정통 법관들만이 대법관으로 임명되던 관례 속에서 변호사 출신인 그가 임명된 것은 대법원 다양화의 신호탄이었다. 이에 대해 “지금은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사회·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변호사 출신 대법관이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레 다가오기는 하지만 그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특히나 대법원 결정은 우리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아 어깨가 무겁죠”라고 감회를 밝혔다. 이런 책임감 때문에 대부분의 대법관은 초과 근무를 하고 특별한 경우를 빼면 사회 접촉과 제한된 생활을 한다고 했다. 그는 대법관들의 수도원 같은 생활은 ‘국민의 신뢰를 받는 사법부’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묻는 질문에 “우리 사회는 인적 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죠. 하지만 법조는 인적 관계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면 안 되죠. 많은 국민들이 실제와 관계없이 그런 문제가 만연하다고 인지하고 계세요. 이건 실체 여부를 떠나 사법부가 그 오해를 해소시켜 신뢰를 회복해나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평생 법관제를 통해 전관 발생 자체를 근본적으로 적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되겠죠. 그리고 친소관계의 문제는 내부 규정을 만들어 규제하고 양심적으로 재판을 피할 수 있도록 개선할 예정입니다”라며 전관예우 및 친소관계 개선에 관한 의지를 내비쳤다. 더 나아가 관료화된 조직 개편에 관해선 “‘관료화’는 서열에 의해 상하 관계가 나뉘는 것을 뜻하는데 법관의 독립은 ‘관료화’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에요. 관료화의 문제점은 다음 직급을 위해 법관이 임명권자나 인사권자의 의중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에 있어요. 3천여 명의 판사가 있는 큰 조직이라는 한계가 이런 가능성을 만든 것 같습니다. 따라서 효율성만을 고려해 조직을 운영하지 않고 내부 의사소통을 활발히 해 조직의 경화를 막을 계획이에요”라며 사법부 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밝혔다. 임기 이후 계획에 관해서는 수익을 위해 로펌에 취업하거나 개인 사무실을 여는 등의 활동은 하지 않을 것이며 법조계 후학 양성에 힘쓸 것이라고 전했다.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 인품의 중요성
“학교의 발전과 함께 우리 학교의 위상이 높아져 동문으로서 기뻐요. 특히 법학전문대학원의 경우, 교수진과 학생들 수준이 국내 최고라고 알고 있어요. 선배로서 흐뭇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며 운을 뗀 그는 후배들에게 성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좋은 법조인은 좋은 품성의 소유자다’라는 말이 법조계에 있어요. 부를 얻어 성공하고 싶든, 명예를 얻어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든 지식, 언변, 능력에 앞서 좋은 성품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이어서 그는 좋은 성품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인의예지 수기치인’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인의예지 수기치인에 담긴 의미에 좋은 품성을 함양할 수 있는 답이 있어요. ‘자신을 수양한 후에 사람을 다스린다’라는 수기치인을 바탕으로 책을 많이 읽고, 계속 자기 수양을 하면 인의예지 정신이 자연스레 몸에 익죠. 이렇게 좋은 품성을 갖춘 후에는 어느 분야에 있건 인정과 환영을 받는 사람이 될 거예요. 마침 우리 학교 건학 이념과도 맞아떨어지기도 하죠. 좋은 바탕의 자세를 갖는다는 건 너무나 평범하고 기본적인 얘기인데,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후배들이 알아줬으면 해요”라며 마무리했다. 당연한 것들, 기본적인 것들에서 중요성을 느끼는 선배 ‘조재연’이 후배들에게 진심을 담아 전달하는 메시지였다.